흑살마신 16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69화
169화. 암운사신과 괴기나한
"봤어? 아까 적들 표정?"
"장난 아니었지. 큭큭."
천산 지하수로.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지하수로 하류로 내려서는 아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적들의 공습에도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에선 먼저 공격하는 이가 유리하다. 대부분의 싸움이 그러하다.
그것이 검을 들고 싸우는 진검 결투가 되었건, 한낱 조그마한 나무판 위에서 모의로 이루어지는 바둑이 되었건 선수(先手)를 쥔 자가 승리에 한발 더 앞선 법이다.
거기에 기습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말 그대로 몇 수를 앞선 꼴.
그런데도 피해가 전무했다. 적들을 따돌리는 건 덤.
첫 전투의 뛰어난 결과에 아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역시 천강이야. 이거를 노린 걸까?"
"그럴지도. 걔 1년 차 때 풍미관에서도 한 건 제대로 했었잖아."
"큭큭. 그랬지. 그때 뭘 모르는 여울나무에선 무슨 구미호가 나타났다느니 뭐니 말 되게 많았었는데."
안 그래도 한없이 높은 천강에 대한 신뢰도가 이제는 거의 차고 넘칠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은 한참을 떠들며 물을 타고 하류로 내려갔다.
그때 제일 앞에서 나아가던 초아가 손을 치켜들었다.
"이제 다들 조용."
그 신호에 약속이라도 하듯 입을 다무는 아이들. 곧 그들 앞으로 웬 거대한 공동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했다.
사백동굴보다도 더 큰 그 공간.
빛이라고는 몇몇 천장에서 내려오는 게 다였지만, 그럼에도 그 크기를 짐작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공동에 자리한 거대 기둥 중 하나에 초아가 올라서자, 몇몇 아이들이 기둥에 찰싹 달라붙고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매달려 하류로 떠내려가는 걸 방지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서아를 제외하고는 최고참인 초아가 입을 열었다.
"자, 지금부터 나아갈 길을 지시해줄게. 지금 조별로 뭉쳐 있는 것 맞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초아와 서아는 한 조씩 그들이 거슬러 올라갈 상류를 지목해 주었다.
"3조 따라와. 이쪽."
"4조는 날 따라오렴."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무운을 빌어준다. 그들은 천강의 말을 떠올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이번 일에 임했다.
- 기억해. 너희들이 맡은 임무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신교 내 그 누가 맡은 임무보다도 더 중요하니까.
"다들 힘내."
"그래. 이따 보자."
"무운을!"
천산 지하수로 내로 은밀한 움직임들이 상류를 향해 나아갔다.
***
"자, 그럼 싸움을 시작하지요. 선수를 양보하겠습니다."
일필일사의 거처 연무장.
약 이백여 명의 고수가 관객으로 선 곳에서 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괴기나한과 광존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이 싸움은 광존의 말도 안 되는 요구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화경과 현경의 싸움이라니.
보통 현경은 화경 열 명도 거뜬히 이길 수 있다. 실력에 따라서는 오십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게 요 근래 정설이었다.
근데 반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싸움. 그것도 생사투에서 이제 와 선수를 양보한다는 건, 말 그대로 놀림거리로 만들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괴기나한의 얼굴은 일그러질 뿐 그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강하다.'
눈앞에 상대는 그 명성에 걸맞은 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건방을 떠는 게 당연할 정도로.
'마주하기만 해도 떨리게 되는 존재감이라니…….'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
맹익이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어 서자, 줄곧 기운을 쏘아 보내던 광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올라왔다.
"화경치고는 제법이군요. 얼굴이 늙어 반쪽짜리 화경인가 했더니, 제법 강단이 있는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하나만 하지 그러나?"
"그럼 어디 이젠 실력을 볼까요?"
맹익이 자세를 잡았다. 광존은 뒷짐을 지고 섰다.
두 사람 사이로 묘한 기운이 흘렀다.
미풍에 어디선가 이파리가 날아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그것이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맹익이 전방으로 뛰어나갔다.
맹익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망치에 검은 기운이 응집되고, 곧바로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후웅. 그걸 가볍게 몸만 비틀어 피하는 상대.
그러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맹익의 연이은 맹공이 이어졌다.
"오오. 제법입니다. 실력은 화경에 불과하지만 형(形)은 제법 탄탄하군요. 근데 왜 이런 실력을 가지고 기관진식에 종사하는 겁니까?"
맹익은 대답 대신 더욱 팔을 움직였다. 왼손에 쥔 끌과 오른손에 쥔 망치가 번갈아 가며 광존을 압박해 갔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내지르는 발길질에, 맹익이 복부를 잡고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큿……."
"대답을 하십시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거 예의 없게……!"
광존의 몸이 회전하더니 발뒤꿈치로 맹익을 후려쳤다.
간신히 망치를 들어 그것을 막아낸 맹익은 데굴데굴 꼴사납게 구른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핫. 제법입니다. 화나서 머리를 부숴버릴 각오로 찼는데, 그걸 막다니요."
빈말이 아니었다. 천강과 암운사신, 두 사람과 오랜 기간 대련하며 터득한 이전 날의 경험치가 없었더라면, 조금 전 일격으로 머리통이 터졌으리라.
- 가만 보면 사람들은 마무리를 지을 때 꼭 머리를 노리더라. 그냥 몸통을 노리면 일말의 실수도 안 할 것을.
60년도 더 된 천강의 조언 덕분에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
순간적으로 광존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맹익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뒤였다.
"커헉……."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노인. 광존의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이 올라왔다.
"아. 속상합니다. 흑살마신은 왜 이렇게 안 나타나서 나로 하여금 이런 흉악한 짓을 하게 하는지."
맹익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장이 꼬인 듯한 통증은 그렇다 쳐도, 몸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광존의 내기를 잡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럼 잘 가십시오."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누군가 나타나 그를 발로 차 밀며 제지했다.
암운사신이었다.
"……뭡니까?"
"지원 나왔다."
"죽기를 희망한다면야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일대일의 규칙은 지키셔야지요? 그 무슨 무인 같지 않은 행태를."
"흥. 웃기는군. 협박을 해 약자와 싸우는 게 그대가 말하는 규칙인가? 그렇게 무인 운운할 거면 교주께 직접 싸움 신청을 하지 그랬나?"
광존의 시선이 천마에게 닿았다.
솔직히 그는 천마의 실력은 알지 못한다.
빙궁, 신교, 남만. 이 셋은 워낙 베일에 싸인 곳이라 마주칠 접점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실력은 나보다 낮은 것 같지만…….'
천마신공이라는 절대적인 무공과 신검.
이 두 개의 불확실성 때문에 천마에게 섣불리 못 까부는 광존이었다.
그는 자신이 질 것 같은 싸움은 절대 안 하는 주의였다.
"왜. 막상 교주를 보니 겁나나 보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다가는 편히 죽진 못할 겁니다."
"흥. 고상한 척 예의를 차리더니 슬슬 본래의 인성이 드러나는군."
암운사신이 목을 풀었다. 두 개의 단도가 그의 품에서 슥 빠져나왔다.
"이것으로 놀이는 끝이다."
"이대로 싸움이 일어나기를 원하나 봅니다? 흑살마신 없이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콧방귀를 끼는 건 암운사신이었다.
이미 광존과 정사파 인원들이 참가한 이유를 아는 만큼, 암운사신은 앞뒤 재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입 털지 마라. 어차피 내가 싸움을 걸어도 섣불리 응하지도 못할 거면서."
"……."
광존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사파 무리들이 팔짱을 끼고는 몸을 뒤로 빼며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 씨발 진짜…… 그냥 확 다 조져버려?'
광존의 이마 위로 힘줄이 올라왔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뻣뻣이 굳었다.
이대로 저들의 조건을 들어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들어주지 않고 싸움을 걸자니 이번 싸움에 참여한 이유가 없어졌다.
그로 인해 잠깐 고민한 광존이 살기를 드러냈다. 한 가지 깨달음이 그의 머리에 안착한 것이다.
'저 둘은 흑살마신의 벗들. 저들을 죽인다면 무림의 법도에 따라 은원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면 흑살마신은 그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본인 발로 찾아오겠지.
약속을 지킬지 모르겠지만, 투파창귀에게 그 부분에 대한 확답을 받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 투파창귀. 흑살마신을 처리하는 것에 기한은 없습니까?
눈치 빠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흑살마신의 수급을 가져온다면 내 바로 태아를 건네주겠소.
- 그 말 믿겠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광존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암운사신의 앞에 섰다.
"죽고 싶다고 입을 놀리는데, 암. 응해줘야겠지요."
"가능은 하고?"
미소를 짓는 두 사람. 흉흉한 살기가 사방을 뒤엎는다.
그걸 본 교주 측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여울나무 측에서도 그에 맞춰 앞으로 나왔다.
연무장으로 나오다, 서로를 보고는 멈춰선 양 진영.
"다른 분들은 끼어들지 마십시오. 이 문제는 우리 셋이서 해결할 터이니."
광존의 한마디에, 적삼혈마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르신?"
교주 측에서도 일필일사가 천마에게 같은 조언을 했다.
"상황을 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교주님."
일단 그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선 두 우두머리가 한발씩 물러나고. 양 진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움직임 끝남과 동시에 광존의 신형이 사라졌다. 암운사신의 온몸이 검은 도포 자락으로 뒤덮인 것도 그때였다.
쾅. 쾅쾅.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두 존재. 검이 수차례 빛을 발하며 번뜩였다.
화경과 현경의 싸움.
분명 쉽게 끝을 볼 것이라 생각한 싸움이었으나 전투는 한없이 길어졌다.
경지는 광존이 위였으나, 암운사신 특유의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기술은 제아무리 광존이라도 상대하기가 매우 껄끄러웠던 탓이다.
'낮이었으니 망정이지, 달빛조차 거의 없는 밤이었으면 곤혹을 치렀을지도 모르겠군.'
그걸 감탄을 터뜨리며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마교 서열 3위의 고수."
"화경인데 무려 현경인 광존과 막상막하로 싸우다니…… 역시 마교는 뭔가 다르긴 다르군."
암운사신의 기술을 처음 보는 정사파 무리들은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여울나무 마두들은 자신들이 싸우려 했던 이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확인하면서 얼굴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이대로는 광존이 역으로 밀리는 것 아니오?"
실제로 암운사신의 기술을 처음 접한 광존으로서는 아주 제대로 고생하고 있었다.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암운신공뿐만 아니라, 신묘한 신법과 경공을 내포한 암운행보의 원리는 광존으로 하여금 순간순간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젠장. 쥐 새끼마냥 귀찮게!'
질 리는 없지만, 잘못하면 화경 수준의 상대에게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광존의 머리에 안착했다.
그건 명성을 깎아 먹고 자칫 광존의 칭호를 뺏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때 그의 눈에 이 상황을 타개할 목표물이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