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6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63화
163화. 신교를 뒤엎은 소문
여울나무 숲 옆에 자리한 높은 언덕.
수많은 계단이 기다랗게 이어지고 그 끝엔 널따란 마당을 가진 건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여울나무의 실권자 투파창귀의 거처였다.
그곳 중정 한가운데로 한 소녀가 자리에 앉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소녀.
마치 죽은 건 아닌가 싶을 만큼 호흡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그때, 한차례 미풍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내려온 이파리가 소녀의 앞을 지나간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날아가던 풀잎이 그대로 멈추어 선 것이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허공에 우뚝 멈춰선 그것.
이파리만이 아니었다. 꽃잎도 흙먼지도 소녀의 주변을 지나갈 때면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휙 바람을 타고 담 밖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소녀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
"이제 끝이 보이는 모양이구나."
"예, 스승님."
청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투파창귀는 하던 일 계속하라며 손을 저었다. 잠시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
"듣고 있다."
"뭐 하나 여쭈어봐도 될까요? 수련 외의 질문입니다만……."
이곳에 데려온 뒤로 그런 질문은 처음인지라 투파창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턱짓을 하자, 청청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 싸움…… 그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냥 저희가 투항하면 안 되는 건가요?"
"쯧.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외부에 협력을 요청한다는 건 저희가 그만큼 불리하다는 이야기잖아요. 왜 그렇게 무리하게 싸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본래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다. 살아남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혹 누군가는 자신의 원대한 뜻을 펼치기 위해 끝없이 분투한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럼 스승님이 품고 있는 원대한 뜻은 무엇인가요?"
청청의 질문에 투파창귀의 시선이 잠시 하늘에 머물렀다. 창공의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와 뭇 과거를 회상케 만들었다.
- 지금 저 천것들에게 우리 아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요?
- 어머니. 당장 쫓아내요, 저것들!
- 이래서 무를 안 익힌 것들은 상종을 말아야 한다니까요. 몇 대 때렸다고 죽어버리다니. 쯧쯧.
무미건조하던 투파창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내 악귀와 같은 표정을 지은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오랜 세월 품은 그 뜻을 드러냈다.
"내 야망은, 모든 무림인들을 멸하는 것이다."
"예? 무림인을…… 대체 어째서?"
"무림인들은 쓰레기다. 자신이 가진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망나니들이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나 망조가 든 나라처럼, 난 그것들이 값을 치르고 몰락하길 원한다."
"그럼 저희 할아버지도…… 악가를 멸족시킨 것도……."
그래. 그 원대한 뜻의 시작이었다.
내 가문을 시작으로 모든 무림인의 핏줄을 끊는 것.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했다. 그날의 일이.
고작 무를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눈앞에서 맞아 죽었다.
"소요악사 네 할아버지는 쓰레기다. 다른 악가 연놈들 또한 마찬가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응당 악가를 멸문시킨 것을 제일로 할 것이다."
쓰레기 같은 것들.
그냥 죽일 게 아니라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투파창귀가 이를 바득바득 갈자, 청청이 몸을 잘게 떨며 물었다.
"그럼 전 왜 살려준 거죠? 제 몸에도 악가의 피가 흐르는데……."
"네년의 어미가 무림인이었다면 네년 또한 절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악가를 멸문시키러 간 날.
그는 보았다. 한 소녀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사실 아버지의 가문을 멸문시킨다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는데, 악가의 만행이 전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 중인 걸 본 그는 10년 만에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와 제 손으로 멸문시켰다.
그리고 소녀를 거두었다.
물론, 일가를 전부 죽인 살인귀를 그녀가 순순히 따를 리 없었고 수시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혼자 세상에 나가본들 죽을 게 뻔했기에 그 아이의 한쪽 다리를 회수했다.
옆에 붙여놓고 가르친 뒤, 훗날 모든 무림인을 다 처리하고 나면 그때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다 성장했을 테니까.
청청과 투파창귀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청청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외쳤다.
"스승님이 그런 흉악한 뜻을 품고 있을 리 없어요! 당신은 누구죠? 제 스승님은 어디 계시는 거죠!"
"……무슨 뜻이냐?"
"스승님과 똑같이 생겨도 전 알 수 있어요! 당신 정체가 뭐예요? 제 스승님은 어디 계시나요!"
매섭게 추궁하는 청청.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투파창귀가 시선을 돌려 천산의 절벽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이 찬찬히 움직였다.
"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
"예?"
"내가 쌍둥이란 걸 말이다."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제 스승님은 어디 계시나요?!"
그의 말대로 청청은 그들이 쌍둥이라는 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었고, 그게 사실로 확정되면서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어서 말하세요!"
청청의 외침에 투파창귀의 입이 나직이 움직였다.
"죽었다."
"네……?"
"육체는 죽었지. 그러나 혼은 살아있다. 아직 내 안에 남아있어, 나와 함께 달리는 중이다."
자신의 가슴팍을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린 투파창귀가 손을 떼 청청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 숨이 다할 때까지 무림인을 멸한다는 뜻이 꺾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싸움을 멈추는 일도 없다. 투항도 마찬가지."
다시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청청…… 괜찮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소녀의 머릿속에 칠현금 구소환패의 목소리가 와 닿았다.
"그럼 계속 수련하거라."
투파창귀가 마당 밖으로 발을 옮겼다. 가만 굳어있던 소녀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투파창귀님."
"말하거라."
"제 스승님…… 누가 죽인 거죠?"
잠시 멈추었던 발을 다시 놀리며 투파창귀가 말했다.
"흑살마신이다."
***
묵범귀영의 말대로, 채 한 달이 되기 전 천산 내로 다량의 외부 유입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었으나, 천산을 방위하겠다고 병력을 배치했다가는 언제 어디서 기습을 받아 병력 손실로 이어질지 모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더욱 짙어진 전운.
살얼음을 걷듯, 외부 인력들의 유입은 두 세력이 더욱 날을 세우게 했다.
"일단 전면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네."
"뭐…… 그렇겠지."
교주의 말에 천강이 긍정하고 나섰다.
사실 천강이나 투파창귀나 둘 다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다.
천강은 그저 흑막을 끄집어내길 원했고, 투파창귀는 중원을 정벌하기 위한 전력손실 최소화를 요망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온 다량의 인사는 현 싸움의 향방을 전면전의 분위기로 급히 몰아갔다.
"근데 어떻게 안 것인가?"
교주의 시선이 천산 서쪽을 향했다.
그쪽으로도 몇몇 외부 인력들이 은밀히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천강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모를 것이었다.
"아아. 괜찮은 정보원을 찾았어."
그 정보원이란 추밀이다.
낮에는 새로, 밤에는 쥐로.
그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로워서, 사실상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산 내의 모든 움직임과 중요 정보는 다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정보에서만큼은 확실히 우위를 점하게 된 교주 측이었다.
"문제는 머릿수인가."
곱절이 넘는 차이.
"외부 인력들은 지형에 익숙지 않으니 그 정도 수는 감당할 수 있을 거다."
"그건 그렇지만……."
문득 양측의 싸움 인원이 다 모이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교주 측은 수성이고 적들은 공성의 입장이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적을 포위하는 데에는 10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하였다.
그런데 겨우 곱절?
천강의 미간이 좁혀졌다.
전면전에 들어서기 전 다른 무언가가 터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실체를 갖춰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영을 막론하고 마인을 넘어 그저 평범한 신교 주민들까지,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 쑥덕쑥덕 떠들었다.
"자네, 들었는가?"
"뭘 말인가?"
"신선환 이야기 말이네."
"신선환? 초절정 때 먹으면 환골탈태를 자연스레 이끌어준다는 환? 그게 왜?"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소곤거렸다.
"이건 내 자네에게만 말하는 걸세. 아니, 글쎄…… 그걸 초절정 때까지 안 기다리고 먹어도 운 좋으면 단번에 화경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인가?!"
듣는 이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평균적으로 무(武)를 익히는 자들이 일평생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일류다.
좀 싸움에 미친 집단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마교에서조차 평균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절정이고.
그만큼 초절정의 경지는 높은 법이었다.
그런데 신선환이라는 약이 생겨나면서 무림계엔 큰 반향이 일어났으니, 어떻게든 초절정만 도달하면 바로 화경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경이란 한때는 꿈의 경지라 일컬어진 단계다. 그 경지에 이른 이들은 숱한 이야기를 만들며 전설로 불리기도 했고.
'근데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초절정만 달면?'
단순히 하나의 사실이 알려졌을 뿐인데 그것은 무림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훈련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화경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아지게 되었다.
세가나 유명 문파의 자제들이 성인이 되기 전 화경에 도달하는 기이한 현상은 덤.
하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남달랐다.
『 신선환을 언제 먹든 상관없다. 그저 확률의 차이일 뿐. 운이 좋으면 곧바로 화경에 도달할 수 있다. 』
처음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화경에 올라설 수 있었다는 이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그 소문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 신교를 뒤덮었다.
"까짓거 먹어보고 안 되면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신선환의 가격이 폭등했다.
진영에 상관없이 너도나도 사 먹기 시작하고, 이내 돈 좀 있는 일반인들도 사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 퍼져 나가는군요."
"지휘첨사께서 잘해주신 덕분이지요."
"일반인이 좀 죽겠지만, 잘하면 마교 작당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습니다."
천산 아래 진형을 갖추고는 천산을 바라보는 지휘첨사에게 지존(地尊)이 물었다.
"신선환이 부족하진 않습니까?"
"예. 넉넉히 챙겨오라 하셔서 분부하신 대로 많이 챙겨왔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남은 건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일뿐."
지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지휘첨사가 한쪽으로 팔을 벌렸다.
"하핫. 이쪽으로 드시지요. 제가 귀한 차를 준비했습니다. 차 한잔하시면서 기다립시다."
천산으로 1만 개의 신선환이 추가 공급됐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다 팔렸고, 이내 웃돈을 얹어줘야 살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