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5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58화
158화. 투항할 것을 권고하다
이전부터 흑살마신의 약점은 알고 있었다.
그의 친한 두 벗. 암운사신과 괴기나한.
그중 암운사신의 경우는 워낙 행동이 불분명하여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흑살마신의 일이라면 제 일처럼 들고 일어서는 괴기나한만큼은 그의 약점이 될 게 확실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교주 측 마두들이 늘 붙어 다닌다는 점이었다.
약점은 아는데 함부로 노릴 수 없는 상황.
그런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암운사신이 입장을 확실히 표명해 온 것이다.
적삼혈마가 투파창귀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렸다.
"어르신.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최대한 발 빠르고 실력 있는 자들로 모았고, 기관진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을 추가했습니다."
"잘했다."
투파창귀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태양이 산 아래로 내려서며 땅 위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언제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축시(丑時)에 출발한다. 그리고 지금 바로 교주 측에 기별을 넣어라."
적삼혈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의자에 몸을 푹 실으며 투파창귀가 설명을 덧붙였다.
"자시(子時)에 차 한잔하는 게 어떠하냐고 전해라."
***
"교주님. 여울나무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녁 회의를 진행 중이던 천마의 시선이 신전 복도를 향했다. 보고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투파창귀가 흑살마신을 포함해 셋이서 차 한잔하고 싶다고 합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이 어디지?"
"금일 자시(子時)에 서쪽 누각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천강과 천마의 시선이 마주쳤다. 갑자기 차를 마시자니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일필일사와 마두들이 우려를 드러냈다.
"응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투파창귀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인물. 상당히 수상쩍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시와 마찬가지인 지금 상황에 갑자기 차를 마시자니요."
굳이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암살이나 음독 시도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강의 생각은 달랐다.
"가겠다."
"흑살마신!"
"선배님!"
잘못된 직감인지는 몰라도, 이전의 투파창귀와는 달리 이번 투파창귀는 상당히 위험했다.
전에는 일정한 선이란 게 있었다면, 지금의 녀석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거칠 게 없어 보였다.
그게 꼭 아니라도 한 번쯤은 가까이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패하지 않는 법이니까.
"영 안 되면 나 혼자서라도 갔다 오도록 하겠다."
고민에 잠긴 천마.
슥 천강을 살펴본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든 안 하든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다.
그만큼 걱정을 안 한단 의미로 받아들인 교주 또한 평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응하겠다고 전해라."
그렇게 자리를 갖게 된 마교의 세 절대 강자들.
누각에 앉아 먼저 기다리고 있는 투파창귀를 보며 천강이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물론, 한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자신감이 대단하네. 진짜로 혼자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자신감이 아닌 신뢰의 문제다."
"우리가 신뢰를 따지고 할 사이던가?"
천강과 투파창귀 사이로 작게 기 싸움이 일고, 교주가 자리에 착석하면서 그 싸움은 일단 끝을 맺었다.
투파창귀가 차호를 들어 올렸다.
"차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잔이 채워지자 천강이 먼저 차를 들이켰다.
녹차의 향에 깔끔하고 담백한 맛.
용정차다. 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걸 본 교주도 잔을 기울이고, 이내 검은 하늘과 그 위에 뜬 달을 바라보며 투파창귀에게 물었다.
"그래. 그래서 이젠 어찌할 생각인가."
"뭘 말입니까."
"이미 세는 우리 쪽에 기울었네. 더 버티는 건 부질없는 짓일세."
잔을 내려놓은 천마가 잔잔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만 투항하시게."
"하하핫."
투파창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 웃음을 한참을 이어가다가 나직이 말했다.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타고 돌아갈 배를 가라앉혔으니, 무얼 고민하겠습니까.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갈 뿐."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나 한이 없고, 사람의 목숨으로는 도리가 없는 법이라. 그만 시류를 따르시게."
교주의 일침에 투파창귀의 입에서 두보의 시가 흘러나왔다.
"길가의 버려진 연못을 보지 못했소. 부러져 쓰러진 오동을 보지 못했소. 백 년 된 나무는 거문고로 쓰이고, 한 홉 썩은 물에도 교룡이 숨어 있는 법이라오. 장부는 관 뚜껑이 닫힌 뒤라야 일생의 일이 평가되노니……."
싸움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법.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
즉, 투파창귀와 여울나무 세력은 절대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단 의미였다.
그때 옆에서 가만 듣던 천강이 툭 끼어들었다.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 하였고
오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하였네
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투파창귀의 볼 근육이 꿈틀거렸다.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수의 우중문 꼴 나기 싫거든 그만 해라. 솔직히 연일 대패를 거듭하는 중 아냐?"
"본디 높이 뛰기 위해서는 몸을 움츠려야 하는 법이다."
"풉. 말은 그럴싸하군. 그건 그렇고, 이 시를 알다니 제법이네?"
과거 천강은 북명신공의 비급을 찾기 위해 글이란 글은 다 독파하였다. 아마 웬만한 문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는 천강이었다.
조금 전 읊은 시 또한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다.
천강의 질문에 투파창귀가 찻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악가에 있다 보면 세상의 시와 노래는 다 배우게 된다."
"그래? 그런데 시와 노래는 배웠는데 자신의 형편을 살피는 법은 못 배웠나 보네?"
천강의 도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흉흉한 기세가 일고, 누각 위로 세찬 강풍이 몰아쳐 두 사람 사이로 모여들었다.
***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가?"
풀소리가 나직이 울리는 오목골 초입.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숨긴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여울나무 숲에서 선발된 병력들로, 흑살마신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임무에 착수된 자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암운사신의 두 제자.
수제자들을 사로잡는다면 암운사신은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호출에 응할 것이고, 자연스레 흑살마신까지 꾀어내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게 투파창귀의 계획이었다.
그것을 위해 투파창귀가 교주와 흑살마신을 불러들여 차를 마시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물론, 교주 측의 모든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최근 들어 늘 이곳에서 수면을 취하는 괴기나한이 나타나지 않는 걸로 볼 때, 그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기관진식을 살피던 마인이 나직이 대답했다.
"거의 다 됐습니다."
"후우. 역시 괴기나한은 괴기나한인가……."
무려 일곱의 전문가를 투입했는데, 푸는 데에만 반 시진이 넘게 걸리다니.
그래도 그 끝이 보였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기관진식을 파악하던 마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됐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들어가도록 한다."
1할의 병력만 남긴 그들은 모두 오목골 안으로 들어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의 환상을 지나자 곧 울창한 숲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번 임무를 맡은 마두 묵봉타귀는 인원을 셋으로 나눠 수색을 지시했다.
곧바로 숲을 가로지르는 약 삼백의 마인들.
그때 목표를 발견했다는 신호가 울려 퍼졌다.
- 남쪽이다.
- 에워싸라.
- 그쪽으로 간다.
사삿- 사사삭-
숲 내로 여러 발소리가 바삐 울렸다.
쫓고 쫓는 추격전이 벌어지기를 잠시, 쫓기던 두 인영이 웬 지반에 뚫린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마인들이 추격을 멈추고는 지휘자의 지시를 기다렸다.
"어떻게 합니까?"
"이곳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지?"
귀를 대고는 안쪽을 살피던 이가 보고했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천산의 지하수로와 연결이 되어있는 듯합니다."
"약삭빠른 쥐새끼들. 미리 도주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거군."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미리 발 빠른 이들로 선발해왔다.
추격에 소질이 있는 이들까지.
"바로 추격을 재개한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반으로 나누고, 정확히 한 시진 뒤 다시 이곳에서 만나도록 한다."
"명을 받듭니다."
"진입하라."
마인들이 하나둘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답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채 일각(一刻)이 되기 전 모두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묵봉타귀는 발걸음을 옮겨 흑살마신의 거처를 뒤졌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거라곤 텅 빈 창고뿐이었다.
'흑살마신의 명성에 걸맞게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더니…… 텅텅 비었구만. 퉤.'
힘들게 유명인의 비고를 찾아 함정까지 다 돌파했는데, 이미 누군가 털어가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묵봉타귀가 신경질적으로 창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발길을 되돌리자, 그에게 후다닥 뛰어오는 부관이 보였다.
"그래. 그년들은 잡았느냐?"
"아직입니다. 근데 이 아래 지하수로가 생각보다 넓답니다."
"넓다? 지하수로가 넓어 봤자지."
"거의 여울나무 숲의 2할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그 정도면 수로가 아니라 거의 거대한 공동 수준이 아닌가.
"발자취로 봐서는 하류로 향한 것 같은데, 하류에는 통로가 하나뿐이고 반대로 상류에는 통로가 너무 많아 문제랍니다."
"일단 하류는 아니로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몇은 그쪽으로 보내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류는……."
말을 하던 묵봉타귀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다. 그냥 우리도 내려가도록 한다. 이왕이면 직접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게 좋겠지."
풍미관의 일로 모두가 날이 곤두선 상황이다.
특히나 이번엔 투파창귀 어르신이 직접 움직였다. 적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대충했다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굉장히 눈총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번 일은 맡지 않았어야 하는데. 하필 서열이 애매하게 낮은 바람에.'
마교 서열 62위.
이런 중한 일을 서열이 낮은 이에게는 맡길 수 없고, 그렇다고 중책에 있는 이들을 움직일 수는 없던 탓에 이번 일을 맡게 된 그였다.
'납치 말고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였으면 좋으련만.'
작게 투덜거린 묵봉타귀가 구멍 앞에 섰다. 부관이 먼저 뛰어내리고, 그 또한 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때가.'
문득 그때가 그리워지는 묵봉타귀였다.
그런 그때였다.
비좁은 굴을 훅 지나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그의 입에선 나직이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그의 바로 밑으로 심연의 아귀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촤아악-
알 수 없는 액체의 분사가 이루어지고, 이내 발 디딜 곳 없는 그는 녹아드는 자신의 몸을 보며 그대로 심연의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활짝 벌어진 입이 굳게 닫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