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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5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9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57화

157화. 빚을 갚다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밤.

끝없이 펼쳐진 수풀 속으로 한 인영이 숨을 죽이고 사위를 살폈다.

'이 주변엔 없어. 지금이 기회야.'

그는 몸을 슥 일으켜 천산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같이 온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흑살마신이라는 괴물의 신위를 본 순간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빠르게 발을 놀렸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50년 전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한 인물인 그가 과연 경공조차 평범할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는 재빨리 숨을 곳을 찾았다. 그리고는 한 수렁에 몸을 숨겼다.

그 생각은 현명했다. 천산 방향으로 뛰던 이들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후욱. 후욱.

'침착해. 이제 거의 다 왔어.'

천산의 초입. 오르막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오기까지 무려 두 시진이 넘게 걸렸다. 언제 어디서 흑살마신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그런데 그 고난의 길도 이제 어느덧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천산 안으로만 들어가면 다 끝날 거라 확신하며.

'난 살았어. 하핫. 난 살았다고!'

천산 안으로 들어선 그는 쉬지 않고 발을 놀렸다. 그런 뒤에야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공포와 경악, 그로 인한 떨림.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떨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잠시 천산 안쪽과 바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데 이대로 천산 안으로 들어가 여울나무로 복귀한들, 뭐가 달라질까?'

결국은 그 괴물과 언젠가는 조우하게 된다는 뜻 아닌가.

적이니까 언제든 다시 마주칠 것이었다. 전장에서든 혹은 정찰 중에든.

'그리고 죽겠지. 조금 전 동료들처럼.'

도망가려면 오직 지금뿐이었다.

그래, 도망치자. 그리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을 돌린 순간, 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날아왔다.

"어디 가냐?"

"어……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이를 환히 드러내며 웃는 그는 흑살마신이었다.

"다, 당신이 어째서……. 아니, 살려주십시오!"

"걱정 마. 오늘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말을 안 들으면 죽겠지만."

"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시키는 건 다 하겠습니다!"

"말귀를 빨리 알아들어서 좋네."

천강의 신형이 공중에서 떨어져 마인 앞에 착지했다. 마인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흑살마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서 투파창귀에게 전해라. 허튼짓하지 말고 가만히 목 씻고 기다리라고. 그럼 알아서 순서가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예, 예. 알겠습니다! 꼭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

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울나무 숲 방향으로 내달렸다. 천강은 발길을 되돌려 풍미관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마주 앉게 된 천강과 추밀.

추밀이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며 천강이 당당히 요구했다.

"의뢰를 완수했으니 이제 대가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래. 의뢰를 잘 완수하긴 했더군. 덕분에 초가삼간도 같이 홀라당 타버렸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간을 좁힌 천강에게 추밀이 별거 아니라며 말했다.

"풍미관 인력들을 다 죽이지 않았나?"

"그럼 배신자들을 다 놔둡니까?"

이번 일을 통해 배신자의 뿌리를 아주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런 천강에게 추밀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장 농사지을 인력이 없으니 하는 말 아니겠는가. 배신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다 신교의 사람이거늘. 일 처리가 실망스럽군."

"묵범귀영님."

"자네도 알지 않은가. 어차피 사상과 목표는 우두머리에 한하네. 그 밑에 사람들은 따른 죄밖에 없지. 머리가 사라지면 모든 게 자연스레 해결될 일. 인간사란 그런 것일세."

결국 이대로는 보상을 못 주겠단 소리였다. 천강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와 말싸움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의 능력이 향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 문제, 바로 해결해 드리지요. 대신 제가 부탁한 것은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밭을 일굴 일꾼들을 보내주면 그리하도록 하지."

천강은 곧바로 천산으로 귀환해 일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사람 하나를 데려오도록 했다.

"가면서 이귀와 삼귀에게 들러 오목골 창고를 비우라고도 지시하고."

"오목골 말입니까?"

"어. 그 안에 있는 물건들 암운곡 흑학대신의 창고로 잠시 옮겨두라고 해."

"알겠습니다."

천강의 시선이 산 아래를 향했다.

"뭐……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르지."

한편 그 시각. 여울나무 숲 회의실.

풍미관에서의 결과를 기다리던 모든 마두들의 시선이 문 앞에 엎드린 마인에게 향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살얼음 걷듯 했다.

한 마두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회의실 내에 낮게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뭐라고?"

"그, 그게 풍미관에 들어선 모두가 죽었고, 흑살마신은 절 살려 보내며 투파창귀 어르신에게 이리 전하라 했습니다. 허튼짓하지 말고 가만히 목 씻고 기다리라고. 그럼 알아서 순서가 돌아올 거라고……."

"이 노오오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자 살아 돌아왔단 말이더냐!"

제일 가까이 있던 마두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남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혼자만 살겠다 도망친 좀스러운 이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단번에 칼을 내려치려는 그때, 가만 지켜보던 투파창귀가 그를 제지했다.

"한번 이야기해 보거라. 그의 무위는 어느 정도더냐."

"그, 그게……."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말하면 된다."

마인의 머리가 더욱 땅에 가까이 붙었다.

"마, 마혈비검이 단 한 합에 사망하였습니다."

"마혈비검이?"

"한 합에?!"

무리 사이로 술렁임이 일었다.

마혈비검이 누구인가. 화경에 들어선 이로, 명색이 마교에서 서열 79위에 해당하는 고수가 아닌가?

그런데 단 한 합에 죽임을 당하다니.

"다들 조용. 그것이 확실한 것이냐?"

"예, 예! 어느 안전이라도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눈 깜짝할 새에 목을 움켜쥐고는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그대로 부러뜨렸습니다."

마두들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저 교주 측이 흑살마신의 이름을 팔아먹은 거라 여겼는데, 이로써 그가 진짜임이 밝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게 동요하는 사람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적삼혈마가 투파창귀를 돌아보았다.

"어르신. 뭔가 방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한마디에 마치 구원의 동아줄을 보듯 모든 마두의 시선이 상석으로 향했다.

그게 잘못된 행동인 건 알지만, 동요가 일어나서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적삼혈마였다.

그 의미를 아는 투파창귀 또한 그를 탓하지 않았다. 적삼혈마는 그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흑살마신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군. 병력을 준비시켜라."

"어르신. 설마 전면전을……?"

투파창귀가 고개를 저었다.

"흑살마신의 약점을 공략한다. 병력을 끌어모아라."

"명을 받듭니다."

투파창귀의 지시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발 빠른 자들을 모으는 마두들. 한밤중인데도 여울나무 숲은 꽤 소란스러웠다.

여울나무 숲 진영 북쪽 외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마인이 말했다.

"무견님.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뭔가 분주하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뭐 우리랑은 별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무견의 한마디에, 함께 있던 오십여 명의 사내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때는 여울나무에서 큰 힘을 발휘하던 그들이었으나 머리를 잃은 그들은 목표도 뜻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그런 그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들 한가운데로 웬 수리검 하나가 떨어져 박혔다.

그것에는 서신 하나가 묶여 있었다.

그것을 풀어 내용을 확인하는 한 사람.

"이것은……!"

"왜 그러는가?"

서신을 든 이가 곧바로 무견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무견의 눈동자가 이내 크게 흔들렸다.

 

***

 

"주군. 일단 불러내고자 하였으나 솔직히 응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전시다. 자칫 함정일 수도 있는 상황에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천강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일귀. 만약 네 두 형제 중 하나가 실종되었고, 반년 후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이가 나타난다면 어쩌겠느냐."

"그건……."

"알고도 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람인 것이다."

짙은 증기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험난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천강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 한 사내가 그들에게로 나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로 흑도마황의 정예 중 정예. 흑도마황이 키운 심복인 무견이었다.

일귀가 천강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내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고는 물었다.

"그대인가? 이 서신을 보낸 이가?"

"그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군."

"그럴 수밖에. 실종된 주군의 행방을 알고 있는 이가 나타났는데 어찌 아니 그럴까."

"그리 궁금하면 진즉에 찾아오지 그랬나?"

무견이 고개를 저었다.

응당 흑도마황이라면 그 심복에게는 상세히 알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궁금한가. 그대 주군의 마지막이 어찌 끝났는지."

"그래. 비록 적이라 하나 상세히 말을 해준다면, 나와 내 형제들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작게 숨을 내쉰 천강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무저갱으로 향하게 된 일.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흑도마황의 유언까지도.

그 모든 것을 전해 들은 무견은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다.

"흑도마황에게 부탁을 받았다. 가족같이 지낸 이들이 있다고 선처를 바라더군. 그에 너희들에게 제안을 하겠다. 투항해라."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우리는 투파창귀와 싸울 것이다."

"개죽음이 될 것이다."

"설령 개죽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무림인. 무림인에게서 은원관계를 빼면 시체와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흑살마신이여."

그랬다. 무림인에게 은원관계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심장과 같은 것.

"흑도마황의 부탁이었다. 투항해 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수는 했다고 생각한다."

흑도마황의 유언이라는 말에 무견의 입이 다물어졌다.

잠시 장고를 거듭한 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형제들과 한번 생각해보지."

그러고 다음 날. 무견과 오십여 명의 사람들은 여울나무를 떠났다.

그들은 교주 측에 투항하였고, 이후엔 풍미관으로 배속되었다. 하산해 내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천마가 물었다.

"흑살마신. 왜 저들을 풍미관으로 보냈는가? 다들 싸우고 싶어 하던데."

"믿을 수 없으니까."

투항을 했다 하나 어찌 됐든 적.

"믿을 수 없으니까 전선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거다."

"그렇군. 근데 의외로군."

"뭐가?"

"응당 자네라면 다 죽일 줄 알았는데 풍미관으로 보내다니."

아, 그거?

"별 이유 아냐. 그냥 고생 좀 해보라고."

"음?"

배신자면 어떻냐느니 하는 묵범귀영을 보니 왠지 모르게 배알이 꼴려서 그런 것이었다.

'뭐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천강이 고개를 들어 무저갱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주자 뿌연 연기와 증기가 올라오는 모습에 미약하게나마 보였다.

'이것으로 그때 받은 대답에 대한 빚은 갚은 거다, 흑도마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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