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9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90화
190화. 당소여
가게 계단 위로 한 사내가 떡 하니 쓰러져 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젠장. 오늘 일진 사납구만."
갑자기 재료공급에 차질이 생기질 않나, 지부장은 급한 일 있다고 자릴 비우질 않나.
거기다가 가게에 손님이라고 들어온 이들은 칼부림.
방중은 슥 고개를 들어 몸 상태를 살펴봤다. 곳곳에 상처가 자리하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로 옷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제아무리 마교에서 구르고 구른 그이지만 3대1의 싸움은 절대 쉽지 않았다.
그저 계단의 협소함을 이용해 방어하는 데 급급했을 뿐.
'천강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명을 달리했겠지.'
상대가 고수라 한들 같은 사람.
천강에게 배운 봉법, 즉 고간 사이 중요 부위만을 집요하게 공격해대니 상대들이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다.
솔직히 정파인들 입장에서 중요 부위를 공격하는 건 조금 금기시하는 그런 게 있었다.
일종의 암묵적으로 피하는 일이라고 할까.
그런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렸으니, 상대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요. 그 덕에 무려 화경 고수 셋을 상대로 버텨낼 수 있었던 방중이었다.
물론, 방중 또한 신선환 덕택에 같은 화경에 도달한 상태긴 했지만.
"후우. 이제 일어나봐야겠지."
우리 선녀님이 천강에게 깨지는 꼴 안 보려면…….
그런 그때, 그의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여어. 선배. 실력 많이 늘었네? 무려 화경 셋을 상대로 안 밀리고 말이야."
"응? 천강? 우리 선녀님은!"
돌연 멱살을 잡으며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방중에게 천강의 딱밤이 내려앉았다.
"정신 차려, 선배. 아직 이승이야."
"아으읏. 선녀님……."
"음? 아직 정신이 덜 돌아왔나?"
천강이 손을 다시 들어 올리자, 방중이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어휴. 근데 천강. 너 위층에 있는 거 아녔어?"
"나 잠시 바깥 좀 돌아다니느라. 이 안에 들어온 세 명이 전부가 아니었거든."
"그래? 그럼 지금 위에서 싸우는 건 대체……."
천강과 방중의 시선이 위쪽에 가 닿는다.
꽤 바삐 놀고 있는 모양인지, 쿵쿵 발을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큼지막했다.
"선배는 좀 쉬고 있어. 내가 뭔 일인가 확인 좀 하고 올게."
"야. 우리 선녀님 너무 때리지 말고."
"응? 선녀님?"
"꼭 좀 부탁한다!"
천강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용히 가게 최상층으로 스며들었다.
***
한쪽에 상을 넘어뜨려 그 뒤에 자리를 잡은 남궁선은 두 사람의 싸움을 가만 지켜보았다.
널찍한 공간에서 한 여인은 독수를 던지고, 다른 한 남자는 검을 휘둘러 그걸 막아내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화산에는 머저리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입이 험하군. 슬슬 항복하는 게 어떻소. 이제 그 침들도 슬슬 다 끝나갈 듯한데."
"걱정하지 마. 우리 당가 사람은 수중에 침을 늘 천 개 이상씩은 들고 다니니까."
열 개의 침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이내 한사를 향해 짓쳐 든다. 한사의 검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움직였다.
매화만개(梅花滿開).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암기들.
당소여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상대는 변(變), 환(幻), 쾌(快).'
그녀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상황.
경지도 똑같이 화경이고. 그저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투척을, 상대는 검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뿐.
'내력 소모가 내가 더 커.'
투척 무기. 그중 침은 본디 무인들에게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생소한 무기로, 보통은 그것을 상대할 줄 몰라 적응하기 전 당하기 일쑤였다.
대신 단점이 있다면 방금 말한 것처럼 내력 소모가 크다는 것. 그리고 공격 방법이 단조롭다는 것.
그에 어떻게든 초반에 승기를 잡았어야 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암기를 다 막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째서.'
4년 전 용봉지회에 참여해, 실력을 인정받아 봉(鳳) 중 하나로 봉해진 그녀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 내가 밀린다고?'
그러나 그것엔 이유가 있었으니, 한사는 스승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늘 혼자 수련하곤 했다.
어떻게든 대련도 하고 깨달음을 주고받고 싶어도 늘 그를 도외시하는 동문들.
그런 그는 떨어지는 이파리나 매화 잎사귀를 벗 삼아 검을 휘둘렀고, 종종 그것만으로도 심심할 때면 벌집 통을 건드려 벌들과 싸우곤 했다.
그런 그에게 당가의 투척술은 그가 늘 하던 수련의 일환에 불과했던 것.
'이대로는 안 돼.'
당소여의 팔이 활짝 펼쳐졌다. 그녀에게서 백여 개의 암기가 쏟아져 나와, 한사를 사방에서 에워쌌다.
그러나 그것을 마주하는 한사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할 뿐이다.
한사의 검이 미풍을 따라 움직였다.
매화인동(梅花忍冬).
검이 크게 회전하며 강기의 막을 두르고.
매화점개(梅花漸開).
다시 한번 원을 그리는 검이 잔상을 만들어낸다.
매화점점(梅花漸漸).
그것은 십여 개의 검으로 갈라져 수십 수백으로 화하니.
매화난만(梅花爛漫).
주변에서 날아드는 모든 암기를 쳐낸 한사의 검들이 당소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당소여로서는 막을 수 없는 수백의 환검.
승부는 갈렸다.
한사는 그렇게 생각해 힘을 거두었다. 그에 따라 환검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내 그녀의 코앞엔 검 하나만 남게 되었다.
"나의 승리요."
스치기도 해도 중독이 되는 수백의 독침을 상대하고도 넘치는 여유로움.
'과연 화산의 검이구나.'
싸움의 결과를 지켜본 남궁선이 감탄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했을 거라 판단한 한사는 검을 거두었다. 여인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사사삭-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당소여의 독침들.
"큭. 이 무슨 짓이오!"
"지금 네놈과 난 생사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다 이겼다고 생각해 검을 거두다니, 나를 물로 보는 것이냐!"
몸에 독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 한사의 몸이 비틀거리는 걸 본 남궁선이 빠르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이미 승패는 분명히 갈린 상황!"
"제삼자는 빠져라!"
남궁선에게 독침 십여 개가 날아들었다. 남궁선이 검을 빼 휘둘렀다.
'그깟 느려터진 검으로 내 독침들을 막을 성싶으냐!'
지극히 느릿한 검. 독침이 이마에 박히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은데도 남궁선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느릿하기만 한 검에 돌연 암기들이 모두 힘을 잃고 흩뜨려졌다.
"무슨?!"
재차 던지나 번번이 막힌다. 얼마를 던지건 남궁선의 검풍에 그것들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마냥 날아들던 반대로 튕겨 나갔다.
제왕검형은 중(重), 강(剛)의 검.
상성상 남궁선의 검은 당소여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정의 실력으로 화경의 벽을 허물기에는 내력 차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한발 한발 다가가며 암기들을 제압해 나가던 남궁선 또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내력이 바닥이 나고 만 것이다.
그 앞에서 당소여는 이마에 촉촉이 맺힌 땀을 닦으며 애써 의연한 척 입을 열었다.
"흥. 나름 용을 썼네. 그래도 딱 거기까지지만. 그럼 너도 잘 가라고."
그렇게 당소여가 침 하나를 집어 들어, 그것을 남궁선의 이마에 박아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싸아아-
한 차례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그 시원한 한 줄기 바람에, 마지막 일격을 먹이려던 당소여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네, 네놈은 누구냐!"
"아, 이런. 한바탕 뛰고 온 터라 차로 목 좀 축인다는 게, 걸리고 말았네."
"너……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어. 누구야?"
"나?"
난간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던 남자가 폴짝 뛰어 바닥에 내려섰다.
잔을 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그는 당소여의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음. 굳이 표현하자면, 지금 너와 싸운 얘들의 대장이라고 할까?"
그러며 천강은 고개를 돌려 한사를 바라보았다.
약 이각(二刻)에 걸쳐 벌어진 싸움.
천강은 이들의 싸움이 막 끝나갈 무렵 올라왔다. 한사가 검을 거두다가 독을 맞는 순간부터.
'곧바로 쓰러진 걸로 보아 아마 극독이겠군.'
독이 온몸에 퍼지기 전에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좋겠지.
'그래도 제법이네.'
독을 지닌 당문 사람은 보통 한 경지 위로 친다.
즉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화경이니, 어떤 독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능히 현경과 도 비벼볼 수 있단 의미기도 했다.
그런 여인과 대등하게 싸우다니.
'요새 중원에서 화산이 잘 나가나?'
무공의 완성도나 성취만 놓고 본다면, 한사의 검은 50년 전으로 칠 때 능히 화산파의 장로들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약간의 흥미와 호기심을 갖게 된 천강이 당소여에게 손을 슥 내밀었다.
"해독제 좀 내놔 봐."
"흥. 내가 왜?"
"안 그럼 넌 여기서 죽어."
"하!"
당소여의 입가에 웃음이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사내에게선 아주 미약한 기운밖에 안 느껴졌던 탓이다.
그래도 옆에 쓰러져 있는 계집은 절정이라도 됐지,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끽해야 삼류 정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 어쩌면 너무 미미한 내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치 뭔가 있는 듯 굴다니.
이런 허세를 그녀는 정말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
"어디 해보시던지!"
당소여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잔상을 일으켰다. 그녀는 소매에 숨겨둔 독침들을 끄집어내, 눈앞의 사내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하나만 맞아도 곧바로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이후 반 시진이면 사망하는 극독.
그것을 여덟 개나 맞은즉 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당소여가 여유로운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그녀는 천강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자들의 허세란…… 꼭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다 뒈진다니까. 꼴불견이지. 어떻게 생각해?"
"뭐 그럴 수 있겠군. 그럼 나도 역으로 뭐 하나만 물어보지."
당소여가 말해 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뭔가 위화감을 느껴졌다.
"너희 당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독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더군."
"……뭐?"
"마치 자신이 만든 독이라면 상대를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어, 어?"
당소여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분명 맞는 즉시 온몸이 경직되어야 하는데…… 눈앞의 사내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 혓바닥이 굳어 발음이라도 꼬여야 하는데?
- 훌륭하다. 내 독과 비견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구나!
문득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극찬하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가고, 그녀의 귓가로 남자의 목소리가 와 닿았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방금 네가 쓴 독은 내게 효과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당소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미친."
천강이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당가의 여인. 입이 걸걸한 것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탓이다.
'이런 얠 왜 선녀라 부르는지 모르겠군.'
제발 선녀님을 용서해 달라며 떼를 쓰던 방중을 떠올린 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