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8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85화
185화. 신검합일(身劍合一)
사건이 일어나기 약 일각(一刻) 전.
비좁은 공간에서, 천강은 막야를 들고 한창 검무를 추고 있었다.
시 구절을 읊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탓이다.
그것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는 다른 신병이기들.
- 우리와도 놀아 달라!
- 왜 우리와는 안 어울려 주는 것이냐!
'어이. 시끄러워. 집중이 안 되잖아?'
그러나 끝끝내 떠들고 방해한다. 그에 한 소리 하려는 순간, 뇌명이 천강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저어.
'왜. 너도 같이 놀아주기를 바라?'
- 그게 아니고 아까 그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
'아, 남궁 녀석들? 게네들이 왜?'
- 왜 살려 보내신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최대한 사고 안 치고 다니려고 그런 것뿐.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뇌명이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 아까 그자들 말입니다. 처리해야 할 이들입니다.
"처리? 무슨 처리?"
- 뿌리를 뽑기로 한 배신자들이요. 예전에 여울나무 총책임자 사무실에서 본 기록에 따르면, 남궁세가 가주의 둘째 부인 쪽은 모두 처리해야 합니다.
아, 맞다. 그랬었지.
깨달음에 정신이 팔려 순간 중원에 나온 이유를 그새 까먹고 있었다.
'근데 걔들이 둘째 부인 쪽인 건 어떻게 알아?'
- 그들 대화를 엿들어본즉, 소가주를 암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소가주는 첫째 부인의 소생이니까, 응당 소가주를 없애려 한다면 그건 둘째 부인의 소행. 그녀에게 속한 무리들.
그에 허겁지겁 뛰어온 천강이었다.
찾으러 다니는 건 설렁설렁해도, 코앞에 온 먹이를 가만둘 이유는 없었기에.
"이것은 우리 일가의 일이오! 제삼자는 빠지시오!"
"아아. 걱정 마. 너희 일가의 일은 관심도 없거니와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남궁호를 비롯한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소가주를 암살하려던 일격은 천강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막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검강까지 두른 남궁호의 일격은 상대의 몸에 닿고도 조금도 베지 못했다.
그것에 위기감을 느낀 남궁호와 그 패거리는 검을 회수하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내뺐다.
그러나 그 순간, 쏟아지는 비와 함께 하늘에서 그들을 향해 날아드는 날붙이들.
"컥."
"커헉……."
채 세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들은 모두 꼬챙이가 되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천강이 찰팍찰팍 진흙탕의 지면을 걸어 남궁호 앞에 섰다.
그는 고통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었다.
"쯧쯧. 멍청한 놈. 그러게 한 번에 골로 보내줄 때 네 동료들 따라가지, 뭐 얼마나 더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냐. 살지도 못할 것을."
"제, 제발 목숨만은……."
"너무 섭섭해하지 마. 너뿐만 아니라 남궁의 반 이상이 다 그 뒤를 따를 테니까. 그리고……."
천강이 왼팔로 자신의 오른쪽 팔을 툭툭 쳤다.
"죽일 각오로 살초까지 날려놓고 이제 와 살길 바란 건 아니지?"
"그, 그건 당신을 노린 게 아닌……."
"그럼 잘 가라고."
"아, 안 돼."
툭. 남궁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본즉 더는 살아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천강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남궁선에게로 향했다.
움찔.
'얜 어때?'
- 이 아이는 아닙니다. 서류에 쓰여 있기로 첫째 부인의 소생인 장자는 무고하고, 둘째 부인 쪽이 배신자 측입니다.
'그래? 그럼 이것으로 이곳에서의 일은 끝이구만.'
천강이 뒷짐을 지자, 사람들의 목을 가르고 땅에 박혔던 검들이 도로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돌아가려는데 그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뭐냐?"
남궁선이 천강 앞에 넙죽 엎드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은혜를 갚을까 하는데, 제가 당장 갚을 길이 없어 그러하오니…… 함께 남궁세가로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녀석, 머리 쓰는 거 보게.
"아니 되시겠다."
그러자 남궁 소가주의 얼굴이 바로 울상이 된다.
천강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응?"
천강과 남궁선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약하긴 해도, 어미가 없는 살벌한 남궁에서 눈칫밥으로 살아남은 그였다.
아버지와 남궁진언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그의 편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에서 십 년을 살아남은 그는 천강의 눈을 보자마자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산다.'
사실대로 말해야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해야만 지금 그의 앞길을 막아선 무례함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남궁선이 이마를 바닥에 바짝 대고는 솔직하게 이실직고하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절 가문까지 데려다주실 수 없으실는지요. 구해주신 은혜와 인도해 주신 덕은 반드시 갚겠나이다."
그제야 기분이 풀린 천강.
"정말이냐?"
"예. 그 어떤 부탁이라도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남궁선. 무림의 오대세가 중 제일이라는 남궁세가의 장자. 소가주.
그 말인즉슨, 천강이 배신자들을 다 처리하고 나면 장문인이 될 자란 뜻이기도 하다.
'미리 빚을 져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무림에서는 은원관계가 절대적이다.
그에 보통 고수들은 미리 될 싹에게 빚을 져 두고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이 소년이 나중에는 커서 가주도 되고, 무림맹주도 되고, 존자나 왕의 칭호를 받게 될지 모른다.
천강으로서는 지금 약간의 수고만 하면 큰 열매를 얻게 되는 셈.
'뭐 어차피 남궁세가에 볼 일도 있었고.'
천강이 손을 내밀었다.
"좋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난 천이라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궁선입니다."
***
"……뭐 암튼 그런 연유로 함께하게 됐다."
객점 창가 가까이 자리한 상 위로 세 개의 찻잔이 놓여있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각기 허공에서 흩어진다.
천강의 설명이 끝나자 남궁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사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한사 또한 일어나 응대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남궁선입니다."
"나도 잘 부탁하오. 한사라 하오."
대충 둘러댄 천강의 이야기를 들은 한사와 남궁선이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 그렇게 세 사람은 남궁세가까지 함께 다니기로 했다.
근데 자리에 앉은 한사가 남궁선을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그건 아니오. 그저…… 흠흠. 실례지만 뭐 하나 여쭈어봐도 되겠소?"
"예."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레 입을 여는 한사.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이거였다.
"혹시 성별이 어찌 되시오?"
착 가라앉는 남궁선의 눈동자.
"……보면 모릅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이네만."
가만 놔뒀다가는 일행이 결성된 지 일각(一刻)도 안 되어 붕괴될 위기다.
천강이 둘 사이에 손을 뻗어 휘휘 휘저었다.
"그만. 얘 남자 맞아."
"정말이오?"
"그래. 근데 남자보고 계집이냐고 물으면 기분이 상당히 안 좋겠지?"
"흠흠. 미안하외다. 내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소."
한사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그의 행태에 남궁선 또한 그 사과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인간…… 눈치는 없어도 사람 됨됨이가 참 좋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다는 게 참 쉽지 않은 것인데.
그렇게 작은 사달이 일단락되자, 점소이가 다가와 다 먹은 음식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들고 주방으로 나아가는 그에게 주인장이 나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야. 이번 장마도 만만치 않게 내리는데."
"아까 문부네 어르신 말로는 벌써 수위가 위까지 다 차올랐다고 하더라고요."
"킁. 올해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모양이구먼."
"손님들에게 미리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건 그렇긴 한데."
혹여나 방을 뺄까 염려가 되는 객점의 주인장.
이미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은 한사가 뭔 이야기인가 하여 주인장에게 다가가고, 주인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한사가 되돌아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풀었다.
"들어본즉 해마다 홍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오."
"어느 정도인데 그래?"
"음. 보이시오? 물이 최대로 차오르면, 이 일대는 여기 허리 부근까지 다 덮는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를 들은 남궁선이 천강에게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말을 구해서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물이 넘치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이곳에 강제 체류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강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가만히 있자고."
"예?"
"매해 물이 차오르고도 마을이 건재하다면 건물이 떠내려가는 정도는 아니라는 거잖아? 비가 그치면 금세 물이 다 빠져나갈 테니까, 우린 그때 움직인다."
사실 당장 움직여도 되지만, 지금 천강은 그 무엇보다 급한 게 있었다.
바로 신병이기들을 이해하는 것.
모처럼 생사경으로 향하는 수련에 진척이 보이기 시작한 만큼, 장마 기간 동안 그 성과를 좀 뽑아낼 생각이었다.
"근데 참 안타깝지 않소?"
"뭐가?"
"매해 일어나는 이놈의 장마만 아니었으면, 이곳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한사의 말에 천강이 작게 미소 지었다.
"왜 웃으시오?"
"아냐. 아무것도."
천강이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기울였다. 빗방울은 어제보다 더욱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 이따 점심 먹을 때 보자고."
"예? 벌써 올라가십니까?"
"그렇소. 좀 더 이야기라도 나누고……."
그러나 천강은 지체 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잠깐 서로를 쳐다본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바깥 전경에 눈을 돌렸다.
천강이 의외로 말 걸기 쉬운 호감상이라 그렇지, 아직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부족한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한참을 말없이 바깥 풍경을 보며, 자신의 찻잔만 기울였다.
***
천강이 방으로 올라가 막야를 뽑아 들었다.
어느덧 그녀와의 공명은 마지막 끝을 향하고 있었다.
'여긴 안 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
주인장에게 말해 제일 큰 공간을 받았는데도 부족했다. 마지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한 천강은 폭풍우가 쏟아지는 건물 위 지붕에 올라 눈을 감았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몸에 세차게 부딪혀 온다.
그 속에서 천강과 그 손에 쥐어진 막야가 함께 움직였다.
『 해는 서산에 기대어 사라지고, 황하는 바다를 향해 흘러가네. 』
검을 휘두르는 천강의 마음은 무심(無心) 그 자체.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 한 가지 바람이 깔려 있었다.
무(武)를 익힌 자들이라면 마땅히 바라는 소망.
무극에 다다라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
『 멀리 천 리 바깥을 보고 싶어, 누각 한 층을 다시 오르노라. 』
천강이 시를 통해 막야를 이해하려 하듯, 막야 또한 천강의 그러한 속마음을 읽어냈다.
그녀는 그 마음을 시로 표현했고 천강은 행동으로 그것을 그려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회전.
이후엔 하늘 높이.
쏴아아-
천강의 손에 쥐어져 있던 막야의 검 끝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 호선이 그려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 오오오. 축하한다!
-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룬 것을 축하하노라, 소년!
원래 목표는 생사경으로의 한 발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신검합일의 경지까지 들어서게 된 천강이었다.
'검을 늦게 든 탓에 조금 늦었지만…….'
이로써 천강은 처음으로 하나의 무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천강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