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8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83화
183화. 남궁적
창을 열어 떨어지는 빗줄기를 가만 바라본다.
장마가 내리는 곤륜과 사천 사이의 평원은 때아닌 쏟아지는 물줄기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탁 트인 공간에 사정없이 쏟아붓는 장대비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장맛비 속 빈 숲에 연기 피어오르고
명아주 나물 기장밥을 동쪽 밭으로 내어가네
드넓은 논에는 백로가 나니
여름 나무 그늘엔 꾀꼬리가 지저귀누나
- 왕유의 시로군요. 장마철 망천 별장에서 맞죠? 저도 막 그 시가 떠올랐는데 말이지요.
"그래? 그것참 우연이네."
그랬다. 장마철이라 떠올릴 법한 시였다. 지극히 우연히.
딱히 할 일도 없고…… 정확히 말하면 할 일이야 많지만. 당장에 생사경을 위한 수련만 해도 빠듯하지 않던가?
하지만 주변에 따라 할 동물이 없어, 별수 없이 비 구경을 하며 왕유의 시를 읊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천강은 무언가를 느꼈다.
돌연 막야가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다른 생물을 이해한다는 것에 신병이기도 포함되는 것인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
신병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통은 공명이 필수적이다. 기본적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의 생각과 기운을 공유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의미다.
그런 신병이기들을 이해한다는 건 매우 쉬운 일.
'아, 내가 왜 진즉에 이 생각을 못 했지?'
아무튼 좋네. 덕분에 23번의 횟수를 손쉽게 채우게 생겼다.
천강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막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크게 효과가 없는 것 같아, 검을 들고 직접 휘두르며 잡담을 나눠보았다.
그러자 빠르게 올라가는 이해도.
'좋았어. 이 기세면 하루 이틀 안에 막야는 끝낼 수 있겠어!'
모처럼 보이는 진전에 천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좁은 공간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때였다.
콰앙.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을 휘두르던 천강은 그 자세 그대로 뭔가 하여 입구를 돌아보았다.
웬 사각턱 사내가 천강을 향해 턱을 치켜들고 외쳤다.
"네놈이냐. 우리 대 남궁의 사람을 해한 것이!"
***
일각(一刻) 전.
한사는 느긋하게 상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늘 연화봉에서 지냈던 그는 다른 지역에서 맞이하는 장마가 굉장히 새로웠다. 어떻게 같은 비인데 이리 달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에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음미하며 세상을 적시는 물줄기를 가만 바라보는 그때였다.
쾅. 문이 벌컥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섰다. 그중 한 사람이 한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위치를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걸어오는 사람들.
그중 두 명은 보통 기운이 아니었다. 한 명은 화경. 다른 한 명은 화경은 화경인데 뭔가 질적으로 달랐다.
"그대가 알지도 모른다더군. 우리 남궁의 피를 흘리게 한 자를 말이다."
"그를 왜 찾는 건지 물어도 되겠소?"
"은원관계다. 좋은 말로 할 때 아는 걸 모조리 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싫다면?"
남궁적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그와 막역한 사이인가?"
"음. 만난 지는 며칠 안 됐소만."
"그럼 조용히 아는 걸 불고 이 일에 끼어들지 마라."
"못 들은 것이면 모를까, 몇 끼니 얻어먹은 게 있으니 그럴 순 없지."
남궁적의 검이 움직였다. 중검임에도 매우 빠른 움직임.
한사의 몸이 지(之) 자로 물 흐르듯이 이동해 그걸 피해내고는 이내 검을 출수, 검 끝이 가볍게 흔들리며 환검을 만들어냈다.
매화접무(梅花蝶舞).
"핫. 제법이구나!"
화산파의 묘리는 환(幻), 변(變), 쾌(快).
화려하며 나부끼며 눈을 사로잡는 일격에, 남궁적 양옆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거리를 확 벌렸다.
매우 가벼워 보이는 검임에도 그 끝에 검강이 어려 있었던 것이다.
"화경 고수!"
그러나 남궁적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그래 봤자 애들 장난식의 검술. 제아무리 바람이 빠르다 한들 태산을 넘어뜨릴 순 없는 법이다.
그것이 무공의 상성.
남궁적의 중검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거대한 기운이 밀려들어 한사를 뒤덮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하나 한사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같은 화경이라 하나, 남궁적은 이미 현경에 한 발 들여놓은 실력자.
화경의 꽃을 피운 지 채 1년밖에 안 된 그로서는 그의 일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쿠구구구구.
땅이 작게 흔들렸다.
남궁적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제법이군. 화산에 자네 같은 인재가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쿨럭."
한사의 입가에서 후두둑 핏줄기가 쏟아졌다.
경험도 경험이지만, 아직 중검을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그는 남궁적의 일격을 막기 위해 급히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단단한 검집에 넣어 그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그게 이제 막 무림 초출을 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물론, 그로 인한 내상은 피할 수 없었지만.
'순발력이 좋은 놈이로군.'
남궁적이 미약하게 감탄하며 한사를 짓누르는 기운을 거둬들였다.
만약 그가 맨 칼로 자신의 검을 받아냈다면 그 검과 함께 그대로 반 토막이 났을 것이리라.
"자, 죽고 싶지 않다면 말하거라."
자신의 목에 들어온 칼을 본 한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면 밥값은 충분했지만, 의와 협을 추구하는 자로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을 생각이었다.
'쳇. 고집불통이로군.'
마음 같아선 죽여 버리고 싶으나, 실력이 고강한 걸 보니 필히 화산파에서 아끼는 인재일 터.
분란의 씨앗을 차마 만들 수 없던 그는 살짝 다르게 생각했다.
'이놈이 이리 버티는 걸 보면 멀리 있지 않은 게다. 필시 요 근처에 있겠지.'
남궁적이 남궁호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묵을 곳은 이곳 한 곳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그럼 뒤져라. 애들을 불러내 숙소 하나하나 다 뒤져라."
남궁 사람들이 모두 나와 시끄럽게 움직이자, 주인장이 후다닥 나와 허리를 숙였다.
"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요?"
"혹시 이 자와 같이 식사하던 자가 어디 묵었는지 아는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주인은 천강이 묵은 곳을 바로 가르쳐 주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지극히 미약한 기운.
일반인으로 오해할 만한 수준에, 상대가 보통이 아닌 걸 직감한 남궁적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오고.
그는 곧바로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네놈이냐. 우리 대 남궁의 사람을 해한 것이!"
"……넌 또 뭔데? 뒈지기 싫으면 조용히 문 닫고 나가라."
막 깨달음을 얻어 한창 수련의 맛을 즐기고 있는 천강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고로 무인들은 깨달음을 얻어 정진하고 있는 순간에 방해하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 시간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은원관계가 성립할 정도로.
그래도 나름 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성질을 죽이고 손을 휘휘 저으나,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도리어 칼을 위협적으로 내밀며 호통을 치나.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당장 밖으로 따라 나오……."
말을 잇던 남궁적의 신형이 건물 외벽을 뚫고 날아갔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는 건물을 연달아 다섯 개를 관통한 뒤에야 마을 어귀 자리한 한 바위에 처박히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
남궁십검. 남궁을 수호하는 열 명의 고수.
한 명 한 명이 장로와 비등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굳이 장로들과 차이가 있다면 가문 내 정치적 입김이 약하다는 것 정도.
그 외에 또 한 가지 차이점을 들자면 그 대부분이 방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리라.
오로지 실력으로 오르는 남궁십검의 자리는 그렇기에 방계들에게는 출세의 통로요, 명예로운 자리였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수좌의 자리는 늘 직계가 차지해왔다.
방계는 응당 통솔을 받아야만 하는 것임을 인지시켜 주기 위함도 있지만, 실력으로 따져보아도 상승무공을 제대로 익힌 직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즉 남궁십검의 수좌에 올랐단 뜻은, 가주와 장로를 제외하고 능히 제일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남궁적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 일격에 이 내가 나가떨어졌다고? 이리 꼴사납게?'
몸을 일으킨다.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일격에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장법에 맞은 것 같았다.
아닌가? 발차기였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그 앞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호통을 쳤던 그 사내가.
"지금이라도 이마를 땅에 박고 사죄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대 남궁의 십검! 그것도 수장인 내게 그따위 말을 지껄이느냐!"
"오오. 십검?"
"오늘 내가 네 앞에 무릎 꿇을 일은 천지가 쪼개져도 없을 것이거니와, 대 남궁을 욕보인 넌 산 채로 사지를 잘라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일……."
그러나 남궁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복부에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오더니 말이 나오질 않은 것이다.
격한 통증이 자라나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건 조금 지나서였다.
"컥. 커헉……."
배를 부여잡고는 그대로 고꾸라지는 남궁적.
"얼레. 천지가 쪼개져도 무릎 꿇을 일은 없다더니, 꿇었네?"
"컥. 컥컥."
"입으로 싸우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켜. 그냥 참고 뒈지면 되지."
그제야 상대가 어느 정도 고수인지를 직감한 남궁적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빗물 때문인지, 아니면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대적으로 머리가 차갑게 식은 그의 기감에 비로소 천강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어찌 이런 괴물이 중원에 있음을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그는 남궁의 십검이다. 그 덕분에 남궁의 이름 있는 실력자는 다 만나볼 수 있었다.
가문을 지탱하는 장로들부터 해서 남궁의 최강자이자 무림맹주인 장문인까지도.
그러나 그런 가주조차도 눈앞의 사내에게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를 굳이 표현하자면, 지금 사방을 뒤덮고 있는 대자연 그 자체.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산 하나도 지도에서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남궁적이었다.
"왜 갑자기 말이 없을까? 응?"
"사, 살려주시오."
"왜. 이제야 좀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조금 전만 해도 이승에 불만이 많아, 얼른 저승에 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더니."
"그, 그게……."
"보내줄게. 지금 바로. 저승."
남궁적이 곧바로 머리를 땅에 박았다.
주변에 그를 보는 수많은 눈들이 있음에도 그는 자존심이나 명예를 버리고 생명을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대인!"
남궁적을 따라 이곳에 온 수많은 남궁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게, 남궁적 하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오만하고 자존심으로 똘똘 뭉치기로 가문 내에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머리를 땅에 박고 살려 달라 구걸하니 어찌 아니 놀랄까?
그러나 바닥에 엎드린 남궁적의 몸이 돌연 미친 듯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인즉슨…….
"이런. 이마가 땅에 안 닿았네?"
"대, 대인 제발……."
"그러게 빨리빨리 좀 움직이지 그랬어. 내가 말했을 때 바로 넙죽 엎드렸으면 바닥에 닿았을 거 아냐."
남궁적이 고개를 들고는 그 옆으로 이마를 도로 박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마를 막아서는 천강의 발등.
'익. 이익. 이익!'
수십 번을 전력으로 시도해도 번번이 막힌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듯, 천강의 발은 그가 나아갈 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자, 그럼 기회는 이쯤이면 충분하지?"
"대인. 제발 자비를……."
"먼저 간 애들은 이런 것도 없었어. 네가 아쉬워하면 안 되지."
천강의 팔이 잔상을 일으켰다.
남궁십검의 대장직을 맡은 남궁적의 최후는 그렇게 수차례 머리를 조아리다 그 끝을 고했다.
마을 사람은 물론 그 가문 사람들이 지켜본 만큼, 정말이지 꼴사납고 수치스러운 말로가 아닐 수 없었다.
"자, 또 내게 볼 일이 있는 사람?"
천강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있으면 지금 오라고. 이따 찾아오면 진짜 화낼 테니까."
"어, 없습니다!"
"도망가!"
쯧쯧. 의리도 없는 것들.
천강은 남궁적의 머리통과 몸을 들고는 저 멀리 객점으로 도망가는 이들을 향해 내던졌다.
그것들은 날아가 정확히 그들 코앞에 똑 떨어졌다.
허겁지겁 시체를 회수하는 남궁 사람들. 그들은 천강이 객점에 도착할 즈음엔 출발 준비를 마치고 나가고 있었다.
"여어. 다음에는 마주치지 말자고."
가볍게 눈웃음 지어주며 한마디 더 한다.
"그땐 나도 살려줄지 장담 못 하니까."
"히끅."
남궁세가 사람들이 후다닥 줄행랑을 친다. 천강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작게 코웃음 쳤다.
- 하여튼 짓궂네요, 소년.
짓궂긴. 반쯤은 진심인걸.
"저어……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천강이 문에서 비켜서자, 두 사람이 나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 명은 호위. 다른 한 명은 딱 봐도 자태가 범상치 않은 게, 한사가 말한 귀한 분이란 요 꼬맹이를 말하는 듯했다.
도망친 남궁 사람들을 뒤따라가는 두 사람.
"저런 것들도 호위라고……."
- 그러게 말이다.
- 끌끌.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가문이구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옷을 턴다. 젖은 옷은 내력 한 번에 바싹 마르고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발을 옮기다 잠깐 다시 바깥을 바라보며 천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저건 여자야, 남자야?'
- 소년. 아까 하던 거 마저 할 건가요?
'그러자고. 그전에…….'
천강은 객점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사를 주워들었다.
아까 건물을 뚫고 날아간 남궁적을 쫓기 전, 그 잔당들로부터 대략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탓이다.
뺨을 몇 번 후려치며 왈.
"야. 넌 목숨이 혹시 여러 개라도 되냐?"
"으, 으으……."
"엄살은. 누가 보면 아주 죽기 직전인 줄 알겠네."
천강은 한사를 침대에 누이고 가볍게 혈을 짚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투파창귀의 악기들을 올려놓았다.
신병이기들은 닿아 있기만 해도 기운을 원활히 해주는바, 대략 반나절만 저리 해둬도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
"자, 그럼 우리도 하던 거 마저 하자고."
막야와 함께 시를 읊으며 그녀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천강은 막야라는 검이 빠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