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7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9화
179화. 곤륜
풍미관을 벗어난 천강의 발걸음은 천산에서 제일 가까운 곤륜으로 향하였다.
수많은 산이 마치 사막의 모래 언덕처럼 자리한 곤륜산맥.
이곳은 초행인 사람은 절대 드나들지 말기를 강권하고 있으나, 뭐 그래 봤자 산이니까 라는 마음을 가진 천강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산맥 초입에 들어서고 얼마나 안 있자 짙은 안개가 자욱이 끼며 스산한 기운이 사방에 넘실댔다.
천강의 시선이 주변을 슥 훑었다.
'곳곳에 기관진식이 자리하고 있군.'
이제부터는 생각 없이 노닐었다간 자칫 함정에 빠져 곤란해질 수 있으리라.
물론, 일반인이 빠진다면 곤륜 쪽 사람이 와서 구해줄 것이나 현재 천강은 마교 사람. 운이 없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꾸불꾸불 뱀의 형상과 같은 소로를 따라 산을 올라가며 천강은 가만 생각에 잠겼다.
'흠. 곤륜파라…….'
곤륜산맥에 자리한 곤륜파.
중원과는 꽤 거리가 있지만, 구파일방 중 하나를 차지하는 이름 있는 문파다.
신선과 같은 도술을 쓴다고도 알려져 있고, 검과 보법에 조예가 있다고도 들었다.
과연 주변을 살펴본즉, 천산만큼이나 영기가 충만한 게 도가 쪽과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천강이었다.
'안개에까지 영기가 스며들 정도면 심법 훈련하기에 나쁘지 않겠군.'
이런 곳에는 사람이 모인다. 물론, 그 외에 잡것도 모이지만.
'그건 그렇고 문제는 문제네.'
과거 환생 전에 중원 곳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 곤륜은 천강으로서도 처음.
이쪽엔 북명신공 비급과 연결고리가 전혀 없었기에 늘 그냥 지나쳤던 탓이다.
'어디 행인이라도 없나?'
기감을 넓게 펼쳐 나아가던 도중, 돌연 길이 끊겼다. 천강은 직감적으로 길을 잃었음을 자각했다.
"음. 기관진식에 걸려든 건 아닌데……."
대체 왜 길이 끊어졌을까.
가만 살펴봐도 일단 길 자체엔 문제가 없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천강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경공에 능통한 이들이라 했지.'
경공에 능통하다는 건 그만큼 흔적이 없다는 뜻.
처음부터 그들의 거처까지 길이 닦여 있을 거라 생각한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쪽은 오히려 잘못된 길이었군.'
그에 다시 되돌아가려 했으나 어디서부터가 올바른 길인지 찾는 게 쉽지 않고, 결국 가만 지켜보던 신병이기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 우리도 찾아볼까요, 소년?
- 다 같이 찾아봄세.
'그래. 바닥에 사람들이 밟고 다닌 흔적이 있나 좀 찾아봐.'
제아무리 경공에 능통하다 한들 그들도 사람이다. 어딘가엔 미약한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한 시진 정도 헤맨 끝에 천강은 길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흔적을 쭉 따라가는 천강. 대략 산을 다섯 개 정도 지날 무렵 공포(公布)가 물었다.
- 중원의 배신자들을 다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글쎄. 그곳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 그게 무슨 소리더냐?
- 그냥 이동하는 시간만 계산하면 되지 않은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반문하는 신병이기들에게 천강이 길을 나아가며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이동하는 게 오래 걸리긴 하지만 그것도 마음잡고 하면 얼마 안 걸려. 제일 중요한 건, 내가 그쪽 지역에 갔을 때 목표물들이 어디 안 가고 한 자리에 다 모여 있느냐다.'
운 좋아서 한데 뭉쳐있으면 처리가 편하지만, 혹여나 다른 곳에 잠시 임무 차 나가 있다면 곤란했다.
'없으면 기다려야 하니까, 그게 문제인 거지.'
그때 천강이 고개를 들었다. 흔적을 쭉 따라가던 도중 그걸 만든 이와 조우하고 만 것이다.
경공을 이용해 사람이 만든 흔적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흥미롭게도 멧돼지였다.
물론 평범한 돼지는 아니었다.
쿠르륵.
'영물인가?'
천강을 보자마자 투기를 불태우는 녀석.
일반 멧돼지보다 족히 서너 곱절은 큰 그것은 천강에게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영물이라 한들 천강에겐 그저 돼지에 불과했으니, 녀석은 가볍게 딱밤 한 대를 맞고는 그대로 기절했다.
- 내단 안 챙기느냐?
'어. 이제는 필요 없어서.'
천강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뿌연 안개가 태양의 밝은 빛조차 가리고 있었다.
"귀찮네. 그냥 하늘에서 찾아볼까."
- 안 그래도 하늘 쪽을 찾아보았는데 기관진식이 더럽게 펼쳐져 있어요, 소년.
하…… 이런 호랑말코 같은 놈들.
대체 어디서부터 길을 찾아야 하는 거야?
괜히 아미파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게 아닌 것 같다. 아주 외부와 척지고 살 생각인가 보다.
그로 인한 답답함에 가볍게 몸이나 풀어볼까 하는 그 순간, 천강의 감지에 무언가가 걸렸다.
놓칠세라 쏜살같이 그곳으로 이동한 천강은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행색이나 기운을 보아하니 곤륜 쪽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이곳을 드나드는 행상인인가?'
약관(弱冠) 즈음 되어 보이는 그들은 네 갈래 갈림길 앞에서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신병이기들과 내기를 완전히 숨긴 천강이 그들에게 나아가며 물었다.
"저…… 지나가는 행인이 길을 좀 묻겠습니다."
천강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다섯 남자들. 이내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묻는다.
"말씀하시게."
"혹시 곤륜을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곤륜엔 어인 일로 가나?"
천강은 미리 준비한 변명을 자연스레 읊었다.
"제가 무(武)에 관심이 좀 있어서, 입적을 하려 합니다."
"아아. 그렇구만. 그럼 이쪽 길을 쭉 따라가게."
사내는 네 갈래 길 중 제일 좌편을 가리켰다. 스윽 그 경로를 가만 쳐다본즉, 산맥의 절벽 길로 이어져 있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쭉 따라가면 몇몇 산맥을 지나칠 것인데, 그 모두를 지나치면 비로소 곤륜의 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천강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 그 절벽 길 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섯 사람은 이내 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제 지학(志學) 정도 되어 보이는데, 곤륜에 입적이라니. 요새 무인 지망이 많다더니 빈말이 아니구만."
"그러게 말이야. 얼마나 자리가 없으면 이 먼 산골짜기까지 무(武)를 익힌다고 찾아올까."
"아마 좀 가다가 지쳐서 도로 하산하겠지."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짐을 챙겨 네 갈래 중 가장 우측으로 향하였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 무술을 익히겠다고 사람이 나타난 게 거의 석 달만인가?"
"석 달은 무슨. 반년도 넘었을걸?"
"킁. 그럼 그냥 제대로 가르쳐줄 걸 그랬나. 우리 밑으로 들어와야 우리도 빨래 같은 잡일을 그만하고 제대로 무술을 배울 텐데 말이야."
"아서라. 맹한 녀석이 밑으로 들어오면 우리가 더 고생한다."
"그 말도 맞네."
다섯 사람이 한 줄로 서 벼랑과 같은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이 지나가는 길이나 저쪽 길이나 모두 곤륜으로 향하는 길이다.
다만 천강에게 가르쳐준 길은 지금 그들이 가는 길에 족히 스무 배는 더 이동해야 했다. 이산 저산을 뱅뱅 돌다가 도착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생할지를 떠올린 무오는 작게 미소 짓다가, 절벽 중간에 난 평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말했다.
"근데 범천. 요새 장로들이 이상하지 않나?"
"장로들뿐만이 아니야. 대체 중원의 일에 왜 그리 끼어들자는 것인지. 도인이면 도입답게 그저 주민들 돕고 도를 깨우치면 그만인 것을."
그랬다. 요 근래 곤륜에는 기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장로들을 주축으로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제 곤륜 또한 산에서 내려가, 적극적으로 인재들을 받고 상인들의 지원도 받으면서 부흥해야 한다고.
무당과 화산의 선례를 들고 나선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나, 이제 곤륜에 입적한 지 만 2년 된 그들이 보기에도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장문인을 따르는 자들이 모두 명을 달리한 것도 그렇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후우. 그러게 말이야. 이를 어찌해야 할지."
가장 늦게 들어와 최하단의 항렬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력은 없어도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한 포부가 있었기에 이 먼 곳까지 와서 입적을 하였고.
그들은 현 곤륜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 현재의 곤륜은 폭발 직전의 화약. 사실 천강에게 잘못된 길을 가르쳐준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괜스레 일이 커지면 제일 먼저 죽는 건 늘 힘없는 자들부터니까.
"아무튼 다들 조심하자고. 뭔 일 있으면 바로 정보 공유하고."
"알겠네."
식료품이 담긴 봇짐을 단단히 동여매고는 그들이 다시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진 즈음 올랐을까. 그들은 곧 곤륜의 앞마당에 올라설 수 있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소매로 몇 차례 훔친 그들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는 곤륜의 거대한 문으로 향하였다.
"얼른 들어가서 짐 내려놓고 씻으러 내려갔다 오자고."
끈적이는 땀을 시원한 계곡물에 씻을 생각을 하니 힘이 나는 사람들. 그런 그때, 그들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여어. 아까 제게 길을 가르쳐 주신 분들 아니십니까?"
"어어?"
"아니, 어떻게?"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에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분명 눈앞의 사내가 나아간 길은 계산상으로 빨라야 5일 후 도착 예정이었다.
그런데 벌써 여기에 와 있다고?
***
한 시진 전.
절벽 길을 슥슥 오르던 천강.
- 소년. 이 길이 맞을까요?
- 난 아까 그자들이 의심스럽네만.
그러나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적어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어.'
심안(心眼)이 있는 천강은 그들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들 말마따나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곤륜파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천강이 뒷짐을 지고는 찬찬히 올라간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자, 천산보다도 평탄한 곤륜산맥은 산보를 걷는 것보다도 쉬웠다.
'그럼 슬슬 속도를 내볼까.'
천강이 전력으로 절벽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암운행보와 백호의 가호까지 있는 천강의 신형은 말 그대로 빛 그 자체였다.
뭐 중간에 잡스러운 것들이 시비를 걸어와 좀 늦긴 했지만, 어찌 됐든 길을 알려준 5명과 동일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었던 천강이었다.
"말도 안 돼. 그 거린 산을 오르내리는 약초꾼이라도 능히 3일은 걸릴 거리인데!"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 천강이 뒤적뒤적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걸 가만 살피며 혼자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장문인과 막 입적한 다섯 떨거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여울나무와 연관된 자라……."
흑철마괴로부터 받은 서류는 역시나 주태와 천강이 작성한 정보가 그대로 기입돼 있었다.
천강의 시선이 다섯 사내를 향했다.
"음. 다섯 떨거지는 지금 이자들을 이야기하는 건가?"
"뭐라고?"
"네, 네놈 방금 우리보고 떨거지라 했느냐!"
화를 버럭 내는 사람들.
그러거나 말거나 천강은 그들을 무시하고는 몸을 홱 돌렸다.
'최대한 조용히 일 처리를 하자고. 과거처럼 요란하게 하지 않고.'
천강이 뒷짐을 지고는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발로 걷어차며 외쳤다.
"이리 오너라!"
콰아앙.
"헛."
"저, 저런?!"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가는 문짝.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이내 장로들의 집무실 건물에 떨어져 그 지붕을 뚫고 안으로 처박혔다.
- ……많이 해본 솜씨네요, 소년.
- 허허헛.
'그러게. 아직 내 실력 죽진 않았네.'
5년 만에 차보는 거라 잘 될까 싶었는데, 제법 잘 날아가 박힌다.
"웬 놈이냐!"
천강이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곤륜파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천강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천강이 목을 좌우로 풀고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자자. 그럼 쌈박하게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