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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7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77화

177화. 중원으로

 

 

"장군. 태감(太監)이 없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 간악한 자가 돌아오기 전에 일을 벌이는 게 어떠신지요?"

대장군의 거처.

태감이 군사들을 이끌고 천산에 간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대장군에게 청을 올렸다.

그들은 현 황제가 거병을 일으켜 황위에 오른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로, 응당 쫓겨난 건문제의 핏줄이 황실을 이어야 정통성이 산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주장에 대장군이 턱을 쓸었다.

그는 장고를 거듭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 말입니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햇볕이 따스해 열매 따기에는 좋으나, 아직 무르익을 시기가 더 남아있으니 기다리도록 하겠네."

대장군의 결정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이른 감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번과 같은 좋은 기회가 다시 올까 하여 강하게 요구하였을 뿐.

"그럼 이만 자리를 파하지. 편히들 가시게."

사람들이 대장군의 거처에서 빠져나오고, 그중 상당수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런 천운의 기회를 놓치고 말다니. 허헛."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한번 작업을 해 보는 것이 어떠오? 솔직히 우리가 일을 벌여놓으면, 대장군을 포함해 그를 따르는 자들도 참여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가능하겠는가?"

뜻이 맞는 이들이 대장군의 거처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작전을 위한 거사를 은밀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

 

흑선마희의 뒤를 따르며 천강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확실히 고수가 될수록 그 기운을 온전히 파악하기가 힘들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설마하니 그녀가 미오왕이었을 줄이야.

"왜 절 그리 은밀한 시선으로 살피시는지요. 후훗."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다섯 왕 중 하나가 이곳 마교에 몸을 숨기고 있질 않나, 지금은 한 소년의 심부름을 하다니. 묵현이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입니다."

"음. 그에 대해선 본인에게 직접 들으시지요. 아마 때가 되면 알아서 밝히겠지만요."

그녀의 거처로 나아가자, 한 소년이 서류 더미에 앉아 있었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살피는 행태가 의외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천강이었다.

'그만큼 몸에 배어있단 뜻이겠지.'

흑선마희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고, 천강이 그에게 다가갔다.

"묵현.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 천강. 아니, 흑살마신이라고 우대해 드려야 하나."

"그냥 천강이라고 불러. 새삼 이제 와서 무슨……. 그래서 뭔 일이냐."

"넌 이제 뭘 할 거지?"

묵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자리에 앉던 천강이 입을 다물었다.

무얼 할 것이냐…….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사실 이번 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기에. 앞으로 무얼 할지는 그다음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흑막이 강했고, 그로 인해 천강은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신검과 신물(神物)이 없으면 녀석을 쓰러뜨리기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날 땐 나에 대한 전략을 짜둔 뒤겠지.'

어쩌면 심검을 온전히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사라졌던 흑선마희가 다시 나타나 두 사람 앞에 차를 내어놓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향에, 천강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용정차네. 이 귀한 것을."

"후훗. 우리 아들이 워낙 잘나서 그런지, 많이 들어옵니다."

천강의 시선이 묵현을 향했다. 한 번은 들어야 하는 그의 정체.

그 의미를 알아들은 묵현이 차를 음미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나온 그의 첫 마디는 이거였다.

"태감의 목적을 아나?"

"무림을 멸망시키는 거?"

"맞아. 그는 무림의 멸을 원하지. 이곳 천산은 그 시작에 불과하고. 그래서 우린 네 도움이 필요하다."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 생사경이야. 솔직히 마음먹고 암살하고 다니면, 무림을 혼자서도 없앨 수 있는 그런 놈이란 뜻이다. 그리고 거기엔 나 또한 포함되지. 지금 이곳을 나가면 개죽음이다."

"하지만 지금 중원을 포기하면 그땐 너무 늦을 수 있어. 중원 다음엔 다시 천산이다. 준비가 덜 되었더라도 지금 나가야 해."

그럴 테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천강이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자 묵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정체가 궁금한가?"

"솔직히 궁금해. 그런데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어째서?"

"네가 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동안 지켜본 행보도 그렇고, 심안(心眼)을 통해 본 묵현은 절대 의를 저버릴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암운곡의 벗들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천강 입장에선 그거면 됐다.

물론 흥미는 일기는 하지만, 천강의 기이한 호기심은 무(武)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정보를 들어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고맙다. 솔직히 지금 네게 진실을 말하는 건 아직 망설여지는 부분이다."

"그런 것 같았어."

"너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겠지만, 내 출신 때문에 날 도와주는 이들이 꽤 된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널 도와주겠다. 그러니 나와 같이 중원으로 나가자."

중원. 중원이라…….

"태감을 어찌 암살할 생각이지?"

"아니, 태감을 직접적으로 노리진 않을 거다."

"음? 그럼 나가서 뭘 하려고?"

"이곳 천산에서 일어난 일이 재발하는 걸 막을 생각이다."

천강의 시선이 산 중턱을 향했다. 문득 사람들의 슬피 우는 소리가 귓가로 들리는 듯 했다.

적이었다 한들 한때는 동료였던 지인들.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살아보겠다고 급하게 여울나무로 전향한 이들이 많아서 더더욱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다.

중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거다. 이미 중원 무인들의 상당수가 신선환을 복용한 것으로 파악되었고, 공급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 네 말은……."

"그들 모두에게 진실을 알리고, 힘을 합치자는 것이지."

"……꿈같은 소리군."

중원에 나가면 늘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가는 곳마다 그를 못 죽여 안달인 적들. 중원 쪽에서 마교가 어떤 인식인지 알면 절대 저런 이야기를 못하리라.

"힘을 합치기는 무슨……. 칼 들고 안 덤비면 다행일걸?"

그러자 옆에서 턱을 기댄 채 이야기를 가만 듣던 흑선마희가 끼어들었다.

"후훗. 흑살마신께선 어디 산속에만 틀어박히셨나. 요새 시대가 변한 거 모르나요?"

"그게 무슨 뜻이지?"

"요새는 마교라고 막 칼부터 빼 들고 그러진 않는답니다. 현 교주도 그렇고, 투파창귀도 그렇고…… 중원과 호의적인 교류를 많이 주고받았기에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그래도 무림맹 성격상 가만 있지는 않을 텐데?"

"그 무림맹조차 여울나무 쪽에 상당히 매수되었으니까요. 지금의 우리로선 잘된 셈이지요."

투파창귀와 그 세력이 외부와 협업한다고 만들어놓은 배경이 오히려 천강 쪽엔 득이 되어 돌아온 상황이었다.

묵현이 말을 이었다.

"내 계획은 어디까지나 신선환의 진실을 알리고 그 공급을 막는 것에 있다. 진실을 알면 무림은 한 목소리를 낼 것이고, 태감은 자신의 뜻을 접겠지."

"뜻대로 안 되면 직접 움직일 텐데. 그땐 어쩌고?"

"진실이 알려지고 사태가 심각하단 걸 인식하면, 무림의 절대 고수들도 움직일 거다. 그는 그들이 상대해 줄 거다."

그렇군. 서로 경쟁하는 마교, 정파, 사파.

그리고 그 속에서 또 이권 다툼을 하는 각 세가와 문파들.

그러나 자신들의 세계를 위협하는 공동의 적이 나타난다면 똘똘 뭉칠 거다. 그걸 이용하자는 뜻이다.

"지금 중원에 나가 무림을 구하는 게 곧 이곳 마교를 살리는 길이다, 천강."

중원이니 마교니, 살리는 일 따윈 크게 관심 없지만… 신경 쓰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 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중원으로 나가겠다."

 

***

 

중원을 나가기 위한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 잡기 전,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다는 데서였다.

"모두들 들어라. 최근 천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해주겠다."

천강은 천마를 시켜 모든 신도들을 모으고, 신선환에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도록 했다.

믿음이 투철한 그들은 교주의 말이라면 끔벅 죽는 만큼 그 말을 그대로 다 믿었고, 이후엔 천강을 통해 독성을 제거 받았다.

"이쪽입니다."

"한 줄로 서세요."

암운곡 아이들의 인도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사람들.

"오오. 신교의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앗. 흑살마신님!"

내가 인기가 이리 많았었나…….

독성을 빼기 위해 손 한 번 잡았다가 이야기 나누는 게 한참이다.

그중 몇몇 여신도들은 천강을 향해 사심을 잔뜩 드러냈다.

"혹시 혼례 올리셨나요?"

"혹시 짝이 없으시면 저와……."

예나 지금이나, 신교는 여자들이 직설적이고 당돌하구만.

그로 인해 눈에 불을 켜는 이가 있었으니 초아와 연화였다. 분명 저 멀리로 보냈는데, 두 사람은 수시로 다가와 불편함을 호소했다.

"거 너무 손을 오래 잡고 있는 거 아냐, 천강?"

"맞아. 손 닳겠네."

두 사람의 살기어린 눈총 덕분에 여신도들이 화들짝 놀라 후다닥 손을 떼고 지나간다.

아마 요 둘이 없었더라면 이 일이 이틀 만에 끝날 순 없었으리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

"어. 너도 수고 많았어."

"독을 섭취했다는 데도 당황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군요."

"뭐 그렇지. 믿음이란…… 그런 거다."

그런 그렇고, 이틀간의 노력이 좀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무려 다섯 왕 중 하나인 흑선마희의 말에 따르면, 요새 신교와 중원 사이로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천강이 펼친 전략은 신선환의 진실을 이곳 천산에서부터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입소문이 중원으로까지 번질 것이고, 그게 긍정적인 효과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소문이 잘 퍼져나가면 좋겠는데.'

아무튼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는 중원으로 나가는 일 뿐.

"다들 수고했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자."

"예, 형님."

"가자! 밥 먹자!"

 

***

 

모두가 깊이 잠이 든 새벽.

큰 전투와 연이은 마을 봉사로 지친 아이들의 숨소리가 거칠게 방안을 울린다. 천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을 나섰다.

중원으로 나간다고 하면 따라 나설 이들이 많아 이렇게 급히 몸을 빼내는 천강이었다.

'돈은 이 정도면 충분하고.'

따로 챙길 짐은 없었다. 환생 전에도 중원에 나설 때면 돈 몇 푼만 들고 다녀오곤 했으니까.

천강의 신형이 스르륵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마을 어귀였다. 그곳에는 흑선마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한 분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흑선마희께서도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천강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목숨 빚진 걸 돌려드리지 못해, 잠깐 마중 나왔답니다."

그러며 그녀는 천강에게 옥으로 만든 명패를 건네주었다. 그곳엔 특이한 필체로 미오(美烏)라 쓰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중원의 청루와 홍루를 찾아가 이걸 보이세요. 거기에 제가 아끼는 아이들이 있는데, 도움을 드릴 겁니다."

청루. 홍루. 전생 시절에도 꽤 자주 들렀었다. 돈도 어마어마하게 썼던 걸로 기억한다.

이종진기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찌 됐든 정보가 필요하니까.

그런데 그곳 주인이 미오왕이었다니. 세상 참 좁구만.

"묵현은?"

"아직 교주로부터 승인이 안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아마 며칠 늦게 나설 겁니다."

차라리 잘됐다. 누군가와 동행하기보단 혼자가 늘 편한 천강이었다.

잠시 천산과 마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본 천강이 이내 그것들을 뒤로 하고는 발을 옮겼다.

환생해 쥐 굴에서 박박 긴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두 발로 중원을 향해 걸어가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중원. 중원이라…….'

천강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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