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1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15화
215화. 탐(貪)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기관진식.
그 중심으로 시선을 옮기자, 작은 공간에 어떤 생명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끼손톱보다도 더 작은 그것은 딱딱한 갑각을 가지고 있는 풍뎅이 종류였는데,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부리나케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 돌아다니는 공간이란 게 너무도 협소해, 제삼자가 보면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 소년, 발아래 뭔가 적혀있어요.
놈을 관찰하던 천강의 시선이 발아래로 향했다. 그곳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
『 남의 것을 탐하고 먹어 치우며 그것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간교하고 비상하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나, 당장은 죽일 수 없어 봉인해 두었도다. - 이철괴 』
'이철괴면 팔선 중 하나로군.'
팔선(八仙).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그 한계를 벗어던지고 불로불사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쉽게 말해 신선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명망이 높은 이들을 추린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이철괴는 그 팔선 중 하나다. 다리를 절며 표주박을 보패로 들고 다니는 그는 용을 탈것으로 부린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생김새와는 다르게 매우 강력한 신선이다.
그런 그가 죽이지 못하고 봉인했다고 한다면 보통 것은 아닐 것이리라.
그래도 천강은 호기심이 생겨 그것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넌 뭐냐?"
흠칫.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벌레의 머리. 아무래도 기관진식에 갇힌 녀석에게는 이곳 외부의 오감이 왜곡되는 모양이다.
녀석이 한참을 기웃기웃하더니 조그마한 입을 움직였다.
"그럼 넌 누구?"
"음. 굳이 표현하자면 지나가던 행인?"
"행인? 사람?"
천강은 일부러 그렇다며 대답해주었다. 이곳에 쓰여 있기로 녀석에게 인간은 먹잇감이다.
그런 먹잇감이 호기심을 보인다면 녀석의 행태와 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천강이 눈에 내기를 실어, 심안(心眼)과 독목신공으로 녀석의 면면을 관찰했다. 잠깐 말을 아끼던 녀석이 꺼낸 첫마디는 이거였다.
"혹시 먹을 것 좀 있어?"
"먹을 거?"
"어. 이곳에 굶주린 채로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더니 배가 고파."
천강은 검은 안개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소년, 어떻게 하려고요. 괜히 이상한 짓을 하면…….
'이 정도는 걱정 안 해도 돼.'
무려 팔선 중 하나가 해놓은 봉인이다. 기관진식을 정확히 해독하는 건 불가능해도, 이놈 봉인이 풀리면 그 신호가 가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벌레는 다리가 여섯 개여야 하나, 놈은 앞 두 다리가 없었다. 배가 고파 자기 다리를 뜯어먹은 것이다.
저걸로 보건대 뭔가를 먹여도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막말로 일이 꼬이면 이철괴가 나타날 거고, 천강으로서는 도리어 환영인 셈!
어찌 됐든 그 보기 힘들다던 팔선을 보게 되는 거니까.
- 정말 못 말리겠네요, 소년.
천강의 생각을 들은 막야가 한숨을 탁 내쉬었다. 천강이 육포 한 조각을 녀석이 있는 곳에 떨어뜨려 주었다.
무형의 막이 잠깐 흔들리고 벌레 녀석의 앞으로 마른고기 한 조각이 떡 하니 떨어진다.
그걸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녀석.
천강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먹는 데 한참 걸리네. 그런 식으로 해서 언제 먹으려고?"
"먹을 걸 준 건 고마운데 먹는 것 가지고는 뭐라 안 했으면 좋겠다."
"궁금해서 그러지. 너 사람도 잡아먹고 짐승도 잡아먹고, 가리는 거 없이 다 먹는다며. 그런데 그 작은 입으로 태양은 어찌 삼키려 했대?"
천강의 이야기를 듣던 녀석이 잠깐 가만 있더니 다시 육포를 조금씩 뜯기 시작했다.
"그땐 덩치가 산만 했을 때 이야기고. 지금은 이렇게 조그마하니 어찌 그럴까."
"먹으면 덩치가 커지나?"
"이 조그만 것에 봉인 당한 거라 커질 수 없어."
천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과 대화를 나누며 심안(心眼)으로 그 진실 여부를 파악한 것이다.
'일단 저 조금씩 먹는 건 연기로군.'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걸 녀석은 참고 연기하고 있었다.
다만 먹을 걸 먹어도 덩치가 커지지 않는다는 건 진실이었는데, 그 내면에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게 은연중에 느껴졌다.
'간교한 녀석이라 쓰여 있었지.'
천강이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말했다.
"그럼 잘 먹고. 난 이만 간다."
"응? 간다고? 어딜?"
"어디긴. 집에 돌아가야지."
"날 도와주고 가면 안 돼? 여기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는 몰라도 답답해 죽을 것 같아. 좀 꺼내주면 안 될까?"
"미안."
"내가 불쌍하지 않아?"
천강이 어디 있는지 몰라 고개 방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말하는 녀석의 행태에 천강이 픽 웃음을 흘렸다.
"야. 벌레가 말을 하는데 불쌍하겠냐. 오히려 무섭지."
"……."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는 녀석.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더니 놈이 하는 말은 이거였다.
"인간이여. 만약 내가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주겠다."
말투가 바뀌었네.
자신의 연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녀석은 육포도 한입에 먹어 치웠다.
무려 제 몸통의 스무 배는 족히 되는 크기인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내가 널 뭘 믿고 도와줘? 나와서 날 잡아먹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나 또한 이름 있는 영물. 내가 한 약조는 반드시 지킨다."
"그래? 그럼 넌 날 뭘 도와줄 건데?"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다니며 보조해주도록 하지."
오오. 죽을 때까지 보조라?
"내 힘은 신선과도 다툴 만큼 강대하다. 내가 함께한다면, 넌 살아생전 인간계에서 옥황상제와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입에 발린 말이다. 딱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까 먹어 치우는 녀석의 식성을 봐선 놈을 풀어줬다간 인간계가 황폐해질 것이고, 그 업보의 대가를 천강 자신이 고스란히 져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죽지 않고 신선이 된다면 그럴 일이야 없지만.
하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녀석이 얼마나 강대한 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고.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이라는 팔선, 그중 이철괴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내가 널 꺼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소년!
- 위험하다. 그러면 안 되느니라!
만류하는 신병이기들을 무시하고 천강은 조그마한 벌레의 입에 집중했다.
녀석은 천강이 응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애써 그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
"지금 내 주위에 펼쳐진 기관진식이 어떻게 생겼지?"
그걸 자세히 묘사해주자, 놈이 고개를 주억인다.
"역시나. 그 기관진식은 지금 내가 있는 몸뚱어리. 이 벌레 몸에 고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날 빼내려면 물건 하나가 필요하다."
"물건?"
"그래. 기관진식을 부숴도 되지만 그리하면 이철괴 놈이 그걸 알아채겠지. 녀석 몰래 나가려면 물건 하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쪽으로 내 본체를 옮겨 탈 수 있으니까."
이야기를 가만 들어본즉, 저 벌레 녀석은 각 개체를 숙주로 삼아 옮겨 다니는 능력이 있는 모양.
놈의 숨긴 능력을 파악한 천강은 놀랍다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혹시 기관진식의 이 부분은 어떤 의미야?"
살아온 세월이 긴 탓인지, 아니면 의외로 해박한지 놈이 봉인진 하나하나를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그 설명은 친절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이곳의 기관진식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 천강.
"이제 날 꺼내줘라."
"잠깐만. 쓸 만한 물건 좀 찾고."
천강은 검은 안개에서 물건 하나를 빼 바닥에 펼쳤다. 억중에게서 받은 천잠포였다.
손끝에 다량의 피를 낸 천강이 그걸로 천잠포 위에 조심스레 새기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것이냐?
'조용히들 있어.'
서서히 완성되는 형태. 그걸 본 신병이기들이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 그것은…….
- 기관진식?
'맞아. 일종의 봉인진이지.'
피만으로는 좀 약하고 어디 보자.
고민을 하다 짐에서 검은 가루를 발견한 천강. 사신들을 죽이고 나온 가루로, 이후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흑철마괴가 챙겨준 것이었다.
'양은 많으니 조금 정돈 써도 되겠지.'
피가 굳기 전 그 위에 검은 가루를 뿌린다.
그리고는 뜨거운 양기의 내력을 힘껏 불어넣어 꽉 압착하자, 천잠포에 이곳 바닥에 새겨진 기관진식과 흡사한 봉인진이 완성되었다.
혹시나 문제가 될 경우, 이철괴를 소환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구현해낸 천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벌레 녀석에게 다가갔다.
"물건 챙겨왔는데. 넌 준비됐어?"
"그래."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못 들었네. 앞으로 동업하는 관계니 서로 통성명부터 확실히 하자고. 난 흑살마신 천강."
"나는 탐(貪)이다."
"좋아, 탐. 물건 들어간다."
천강이 녀석의 머리 위로 천잠포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돌연 벌레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우뚝 멈춰서고, 천잠포가 물속을 유영하는 물뱀마냥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핫!"
얼마나 기쁜지 해방감에 광소를 터뜨리는 녀석.
한참을 웃던 녀석이 천강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멍청한 인간이여. 네 욕심이 네게 화를 불렀구나!"
"그건 무슨 소리야?"
"흉수라 불리는 내가 너와의 약조를 지킬 것으로 보았느냐! 지금 이 자리서 네 육신을 뺏고 이철괴 놈을 죽인 뒤, 내 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러고는 천강에게 덥석 달라붙는 녀석. 그러나…….
"어어?"
탐에게서 당황한 음색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안 되지?"
"궁금해? 그럼 네 몸을 보라고."
"이게 대체……?"
천잠포에 빼곡히 새겨져 있는 시커먼 문신들.
"네가 약속을 안 지킬지도 모르니까, 미리 살짝 손 좀 봤어. 그것에 영체가 깃들면 다른 데로 못 가고 봉인되도록."
"하! 이깟 봉인 따위 힘으로 풀면 그만!"
그러나 한참을 낑낑대는 소리만 날 뿐, 변화가 없다. 도리어 녀석이 놀라 외쳤다.
"아니. 우, 운철이라니! 이 귀한 걸 어찌!"
운철? 설마 아까 뿌린 검은 가루가 운철이었던 건가?
운철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딸려 오는 금속이다.
특유한 성분이 함유된 그 금속은 내기든 영기든 차단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그 어떤 내력을 실은 공격도 무효화한다.
사신들에게 내가중수가 통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였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이익. 이이익!"
놈은 필사적으로 발악을 하나 결국 실패하고, 천강을 향해 쩌억 입을 벌렸다.
"괘씸한 인간 놈. 내 너를 먹어 그 분풀이를 하겠노라!"
그러나 덥석 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북명신공을 사용해 내기를 슥 흡수하자 놈은 흐늘거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게 대체……."
"발악은 그게 끝? 그럼 난 이만 간다."
천강이 발을 옮긴다. 탐은 바닥에서 흐느적거릴 뿐 그런 천강을 따라갈 수 없었다.
몸에 내력이 하나도 없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 남은 내력마저 사라지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강의 꾐에 당한 탐은 그 힘을 다 잃었고 그저 주인의 내기를 받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신병이기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천강이 거침없이 굴 밖으로 향하자, 탐이 소리를 높여 사정사정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나도 데려가다오!"
어딘지는 몰라도 현재 탐이 있는 곳은 땅속. 그것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의 지반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만약 이대로 이곳이 붕괴해 매몰된다면, 그는 흙 속에 파묻힌 채 천 년, 혹은 만 년. 어쩌면 평생을 그러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잠깐! 인간이여.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주겠노라!"
"너 그거 아까 네 입으로 하고 깨부순 부탁인 건 아냐?"
"이, 이번엔 진짜다. 내 진심을 믿어다오!"
심안(心眼)으로 본 녀석의 말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이전에 한 말은 거짓이었었다.
천강이 손짓하자 바닥에 깔려있던 천잠포가 휘리릭 천강의 손을 들렸다.
"너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땐 용암행이다."
"아, 알겠다."
"혹시나 네가 모를까 봐 말해주는데, 신병이기가 된 상태에 용암에 들어가면 죽어."
"신병이기?"
"지금 너 같은 상태를 신병이기라고 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하하핫. 그 말도 안 되는……!"
죽음이란 걸 생각해본 적 없는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으나, 천강이 놈을 검은 구름 안으로 밀어 넣자 금세 조용해졌다.
자기랑 똑 닮은 이들을 23개나 만났으니 당연하리라.
"저, 정말인가? 용암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게?"
- 흠흠. 그러하느니라.
- 그에 우리 신병이기들이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불. 불. 불이지!
- 앞으로 잘 부탁해요.
탐이 말이 없어졌다. 천강은 속으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용암에 천잠포가 녹으면 봉인이 풀리겠지.'
겁을 준 것은 그러한 짓을 못 하게 하기 위해서다.
아마 앞으로 다른 신병이기들처럼, 녀석은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내력을 늘 두르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설령 봉인이 풀려도 그땐 이철괴가 나타나 수습할 테고.
'근데 뭔 내력을 이렇게 많이 잡아먹어?'
그저 녀석 하나 추가되었을 뿐인데, 검은 안개를 유지하는 내력이 확 늘어났다.
탐욕과 식욕이 왕성하다더니, 대충 어림잡아도 다른 신병이기의 족히 세 곱절 이상은 처먹고 있었다.
'뭐 잘된 거려나.'
그 말인즉슨 녀석을 감당할 자가 몇 없다는 뜻이고, 놈이 천강에게서 도망치거나 떠날 수 없다는 뜻일 테니까.
"으으. 감질나서 안 되겠다!"
검은 안개 안쪽에 있던 녀석이 천강에게 날아와 착 달라붙었다.
뱀처럼 온몸을 칭칭 감아 옷가지 행세를 하고는 천강의 내기를 쪽쪽 빨아먹는 그 행태가 마치 한 마리의 거머리 같았다.
"얌마. 떨어져. 안 떨어져?"
"배, 배가 고파 그런 것이니 네가 좀 참아라, 인간!"
"뭐래."
떨어지라 해도 거부를 해대는 녀석.
앞으로 시키는 건 뭐든 따르겠다는 약조를 받고, 그렇게 탐(貪)은 천강의 겉옷(?)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