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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21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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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흑살마신 214화

214화. 설득

 

 

흑살마신.

그녀가 알던 때보다 훨씬 어려진 그 모습에, 천수향의 눈앞으로 그와의 일들이 아른거렸다.

하늘이 직접 주선해준 건 아닐까 싶은 운명적 만남. 인연의 실이 얽히고설켜 이루어진 약혼.

그러나 정작 혼례 날 나타나지 않은 남자.

그로 인해 그녀는 모든 걸 잃어야 했다. 가문도 명예도 사랑도.

아직 뭘 모르는 순수한 소녀인 홍랑은 그날 죽고, 냉소적이고 제멋대로인 천수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멍텅구리는 아직도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천강. 설마 이제 와서 모른다고 시치미 떼는 거 아니지?"

모른다고 하면 분명 화낸다. 그걸 확신했지만, 정작 중요한 건 천강은 그거에 관해 기억나는 게 없었다. 정말 하나도!

'뭐지. 대체 뭘까.'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부처와 같은 인자한 저 미소가 야차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천강이 하하 웃으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떠올리려는 그때, 갑자기 석실이 크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천장에서 크게 흙먼지가 내려앉고, 지축은 수레에 올라탄 것처럼 달달 흔들거렸다.

제갈현과 일천귀검이 감시하고 있던 사자왕(死者王)에게서 크나큰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핫.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무, 뭐야?"

"사냥개를 다 쓰면 삶아 먹는 법! 일이 다 끝났으니 이 비고와 함께 매몰시켜버리려는 것일 테지. 끌끌끌."

모두의 시선이 출구로 향했다. 이미 저 바깥에서부터 천장이 무너져 내려 나갈 길을 메우고 있었다.

일천귀검이 사자왕의 멱살을 잡고는 말했다.

"당신은 출구를 알고 있지? 그렇지?"

"포기하게나. 설령 밖으로 나간다 한들 태감(太監)을 이길 자가 누가 있겠나? 무림의 그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해. 그는 진즉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늘의 부름을 받은 몸. 그것마저 거부하고 이승에 남았는데, 그 누가 막아설까!"

사자왕이 양팔을 펼쳐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향해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다 같이 죽는 거다! 우리 모두 다!"

굴이 다 무너져 내리고, 이젠 석실마저 돌덩어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천강이 사자왕에게 다가와 혈도를 풀어주었다.

"무슨……?"

"먼 옛적 마교와 혈교는 하나라. 그 뿌리는 초대 천마인 검마에게 닿아있지."

"아아. 나도 들은 적 있다네.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무언인가. 그대와 난 한 식구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겐가?"

천강이 내기를 사방으로 발산해 무너지는 석실을 강제로 진정시켰다. 그 강대한 내력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지. 사자왕이여. 이대로 죽기엔 너무 아깝지 아니한가?"

"음?"

"그동안 그대가 혈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만든 수많은 비법들…… 이대로 사장되기엔 너무 아깝지 아니하느냔 말이다."

"끌끌. 웃기는군. 강시나 만드는 더러운 술수를 그 누가 좋아할까."

무림인에게도 일반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의 기술은 몰락한 혈교처럼 언제고 사장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천강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아까 가짜 흑살마신의 몸 상태를 본즉 대단하더군. 그 기술을 의술로써 살려봄 직하지 않나. 그리한다면 수많은 이들을 살리고, 혈교의 부흥을 다시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흥. 나보고 환자나 돌보는 침술장이나 되라는 것이냐. 에잉."

말은 그리 해도 마음이 변한 걸 느낀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확실한 것 하나만 던져주면 된다.

살고자 하는 그 욕망에 확실한 불씨 하나를.

"그렇다면 제안을 바꾸지. 사자왕이여. 혹 선계에 가보고 싶진 않은가."

"지금 날 죽이겠다는 협박을 돌려 하는 겐가?"

"죽지 않고 선계를, 유명계를 밟아 보고 싶진 않은가? 난 두 곳 다 가는 방법을 아네만."

그제야 사자왕의 눈이 부릅 뜨였다.

마교와 혈교는 본디 하나나, 혈교의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삶과 죽음을 파헤치고 연구한 자들에 기인한다.

인간은 왜 죽는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하는 것인가?

그 근원을 파헤치다 보니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피를 많이 볼 뿐만 아니라 그 신도들 또한 그런 쪽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 옛날에 사라졌을 인신공양과 제사가 그러했다.

그것은 관련 없는 이들이 보기엔 눈살을 찌푸릴 만하였고, 이내 마교와 혈교가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결국 원하는 건, 신선이 되어 선계에 올라가는 것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천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

"저, 정말인가? 참으로 선계와 명계를 오고 갈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인가?"

"그래. 만약 이곳을 무사히 나갈 방법을 알려준다면, 내 그 방법을 일러주지."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뭇 진지했다.

"흑살마신이라 했던가? 나 사자왕, 그 제안에 응하도록 하지. 단!"

"단?"

"믿을 만한 단서 일부는 말해 주게. 사람의 혀는 간사해서 살고자 거짓을 쉬이 하거든."

천강이 웃으며 그 제안에 응했다.

"천산에 선계와 명계로 통하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천산에?"

"그래. 나도 이건 선계에 사는 토끼에게 직접 들은 것이네만, 신교가 그곳에 생기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더군."

"잠깐잠깐. 신교의 배경이면…… 그래. 그런 거였어. 그래서 신검이 천산을 벗어나지 못한 거로군. 역대 교주들 또한 그래서 본거지를 바꾸지 않은 거고."

"그래. 일종의 맹약이지."

그 놀라운 이야기에 일천귀검과 제갈현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인즉슨 굳이 생사경이나 자연경에 도달하지 않고도, 능히 선계에 갈 수 있단 의미였으니까.

"그 입구가 어디인지는 사자왕 네놈 하는 거 봐서 말해 주지."

"자, 잠깐. 하는 거 봐서? 밖으로 인도해주면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다르지 않은가!"

"어. 솔직히 내가 던져준 정보의 가치만으로도 이미 대가로는 차고 넘치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노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들 날 따라오시게."

그러면서 석실 옆 벽을 부숴 구멍을 만드는 노인.

천수향이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길 정말 안전해? 바깥에 지존(地尊) 녀석이 죽치고 있다며."

"끌끌. 걱정 말게. 내 혹시 몰라 비밀리에 뒷길을 만들어 두었으니."

엉큼한 노인네. 그러면서 다 같이 죽자고 소리치고.

"빨리 가세나. 이 이상 지체하면 위험하니."

노인이 앞장서고 일천귀검, 제갈현이 그 뒤를 따랐다. 천수향이 덥석 천강의 손을 붙잡았다.

"천강 너, 이번엔 혼자 도망갈 생각하지 마. 앞으로는 죽으나 사나 우린 하나니까."

"……이 중원에서 내가 어디로 도망가겠냐."

그러며 팔을 흔들어도 꿋꿋이 손을 놓지 않는 여인.

천강이 눈물을 머금고는 질질 끌려가는 그때, 문득 거미줄 형태로 쩍쩍 갈라진 바닥 틈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기분 탓인가 했는데, 자세히 본즉 야광석이었다.

'아니, 야광석이 왜 저기에? 야. 너희들 보여? 저거?'

- 음? 진짜 야광석이구먼?

- 왜 야광석이 바닥 반대편에 붙어있는 건가요?

- 혹시 그거 아닌가? 진짜 비고.

'진짜 비고?'

- 그래. 한때 나도 이런 석실로 된 공동 아래 파묻혀 있었던 적이 있다네. 보통 진짜 귀한 건, 저런 식으로 밑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숨겨두곤 하는 법이지.

- 자네도 그러했나? 나도 그랬네만.

신병이기들의 옛 경험담을 들은 천강이 내기를 쏘아 보내 봤다. 그러자 과연 석실 바닥 아래로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게 느껴졌다.

천강이 천수향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천수향이 깜짝 놀라 볼을 붉힌 채 홱 천강을 돌아봤다.

"홍랑아."

"으응? 뭐 할 말 있어?"

"나 이곳에 온 이유가 있거든. 잠깐 그것 좀 확인하고 갈까 하는데, 너 먼저 밖으로 나가 있어라."

"에? 싫어. 같이 가!"

죽어도 함께! 두 눈을 부리부리 뜨는 그 행태에 천강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말 안 들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에 천수향의 손을 강제로 푼 천강이 팡! 내력을 발산해 일행들 쪽으로 그녀를 날려 보냈다.

천수향이 일천귀검을 깔고 앉으며 검지를 치켜들었다.

"야, 너 이 시발 새……!"

50년 새에 욕이 입에 붙었는지 바로 튀어나오는 욕설.

그러나 말을 하다 도로 주워 담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뛰어오려는 순간, 천장이 무너져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천강의 지시를 받은 공포가 천장을 무너뜨린 것이다.

쿵. 쿵. 쿠구구구.

벽 너머로 힘껏 발길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소용없다. 천수향에겐 위력적인 기술이 없다는 건,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며 아주 잘 파악했기에.

네 사람의 기척이 서서히 멀어지는 걸 확인한 천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흑색 절굿공이를 빼 들었다.

- 그냥 함께하면 되지. 따로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요, 소년?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땡추, 주태, 나. 우리 셋이 모이면 항상 일이 커지거든? 홍랑이랑 다니면 그거에 배는 더 커져. 절대 안 돼.'

함께 하면 될 일도 망하게 되고 만다.

- 그런 걸로 치면, 결국 모든 문제는 네게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 아니느뇨?

'앙? 천산의 보고에 도로 갇히고 싶다고, 공포?'

공포가 입을 꾹 다문다. 하여튼 매를 벌어요.

- 그건 그렇고, 나갈 방도는 있는 거죠?

'어어. 비고를 드나들면서 대충 이곳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거든.'

흑색 절굿공이를 양손으로 들고 지천뇌공을 쓴다면…… 흙에 파묻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뭐 그때쯤엔 태감(太監) 녀석도 돌아간 뒤일 거고.

천강이 몽둥이로 바닥을 내려치자,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 안으로 쏙 뛰어내리자 곧 기다랗게 이어진 석굴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보았던 야광석은 그 천장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천강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양옆 벽으로, 각종 음각과 양각으로 새겨진 정교한 무늬들과 그림들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간간히 땅이 크게 흔들거리고 그에 따라 천장에서 부스스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천강은 여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나갔다.

그것은 어떤 존재에 관한 걸 나타내고 있었다.

각 벽화에는 공통적으로 용머리를 한 네발 달린 짐승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뭔가를 먹어 치우려 하는 중이었고.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이 있다면 바로 태양을 집어삼키려 하는 모습이었다.

문득 한 번 본 적 있는 글귀에 천강의 호기심이 부풀어 올랐다.

 

『 ……구오산이란 산이 있으니, 그곳에 포효(狍鴞)라는 짐승이 살더라. 몸은 양과 비슷하나 사람의 얼굴을 하고…… ……아기 울음소리를 내 사람을 잡아먹고는 하였다. 도철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욕심이 많아 다 먹지 못하더라도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곤 하였으니……. 』

『 ……사람들은 놈을 천하의 삼흉(三凶) 중 하나인 도철에 견주어 부른 것이었더라. 』

 

"산해경(山海經)이로군."

- 산해경이요? 그게 뭔가요?

"어. 일종의 신화서에 가까운 것인데, 기괴하고 다양한 존재들이 기술되어 있는 책이야. 봉황이나 구미호, 난조 등도 그곳에 기술되어 있지."

- 그럼 지금 이 안에 그것과 관련된 것이 있단 뜻인가요?

굴 안쪽으로는 야광석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칠흑 같은 어둠뿐.

천강이 횃불에 불을 붙여 높이 들어 올리자 일렁이는 붉고 노란 불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기관진식이었다.

결계에 꽤 조예가 있다 자부하는 천강조차도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식이 겹겹이 겹친.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봉인진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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