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1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12화
212화. 흑살마신 사칭범
사자왕(死者王).
무림의 다섯 왕 중 하나.
존자들과는 다르게, 살아온 수명이 기본 일이백 년씩은 넘어가는 그들은 모든 게 장막에 가려져 있다.
생김새며, 기거하는 곳이며, 그 하는 일들이.
그래도 가끔씩 드러나는 그들의 행보는 하나같이 뚜렷한데, 그들 모두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미오왕의 경우엔 자신 가문의 부흥을 꿈꾸었고, 사자왕은 혈교의 부활을 염원했다.
"사자왕이라고, 혈교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생각하면 돼."
"혈교의 마지막 생존자……."
"예전에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사상이나 생각이 좀 이상해. 그냥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걸?"
아무튼 저자가 혈교 출신이라면 이번 소동에 강시들이 득실거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예부터 혈교의 주 전력은 소수정예와 강시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마교와는 달리 그들의 사상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가 바로 저것이었다.
"아무튼 이곳에 있는 녀석이라고는 저놈 하나니, 저 새끼를 쥐어패면 여기 있던 보물들을 얻을 수 있겠지."
목을 좌우로, 팔을 뱅글뱅글 돌리며 몸을 푸는 천수향. 보아하니 한판 할 기세다.
그에 천강 또한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또 다른 이가 석실로 들어섰다.
"어? 저 사람은?"
"사람들이 흑살마신이라 부르는 놈이로군. 서로 같이 움직이는 거였나."
대체 무슨 대화를 하나 몰래 엿들어 보려는 순간, 돌연 지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천수향이 다짜고짜 벽을 부수고는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흑살마신!"
***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 않았나?'
- 분명 그러했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 음존의 기세는 은공을 갚을 요량으로 보이진 않았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듯한 모습? 아니 그와는 좀 다른가?
아무튼 갑작스레 천수향이 뛰어내리기에 별수 없이 천강 또한 밑으로 내려가 합류했다.
- 너희 둘은 내려오지 말고 거기 있어.
천강의 지시에 일천귀검과 제갈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천강의 무위를 본 만큼 자신들이 짐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아는 것이다.
천수향이 가짜 흑살마신 앞에 선 틈에 천강은 사자왕 앞에 섰다. 천강을 마주한 사자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네놈은?! 분명 흙에 매몰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아아. 너였냐. 다짜고짜 굴을 무너뜨린 게."
"이익! 네놈 정체는 무엇이냐. 대체 무엇이기에 혈강시 삼백을 상대하고도 상처 하나 없을 수 있는 것이냐!"
"내가 누구냐라……. 태감(太監)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었나 봐?"
천강이 진한 미소를 드러내 보이며 한발 한발 다가간다.
사자왕이 천강을 검지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 막아랏! 놈을 죽여랏!"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헤매던 천여 마리의 강시의 시선이 일제히 천강에게 향했다. 그것들은 이내 이를 드러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아무리 내기가 넘치는 현경 고수라 한들,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 이 많은 수를 상대로 버티진 못할 것이다.'
솔직히 강시들로 천강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놈들을 상대하다 내기가 떨어지면 그때 직접 나서서 천강을 처리하려는 속셈인 사자왕이었다.
그런 사자왕의 눈은 야욕을 품은 채 번뜩였다.
'아까 봤던 그 전율스러운 능력! 무위……! 네놈의 몸뚱어리를 사용해, 내 인생 최고의 명작을 만들어 내리라!'
그러나…….
"어어?"
단 일격. 검은 안개에서 신병이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에 강기를 쏟아붓자, 그 많던 강시들 중 움직이는 건 고작 사십여 마리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신병이기들이 훑고 지나가자 마치 파도에 휩쓸려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한낱 고깃덩이로 화해 바닥에 내리깔렸다.
일을 다 마치고 검은 안개로 돌아가는 신병이기들.
"이게 대체……."
"미안. 내가 웬만하면, 만드는데 공들였을 널 위해서라도 이리 무자비하게 행동하진 않는데 말이야. 저쪽이 조금 신경이 쓰여서."
신경이 쓰인다는 건, 천수향과 가짜 흑살마신이다.
둘은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물론 싸운다고 하기보단…… 음. 저걸 뭐라고 해야 해.
천수향은 뭐라 막 소리치고, 상대는 대꾸 한마디 없이 묵묵히 공격하고.
왠지 가만 놔뒀다가 음존이 성질이 뻗쳐 놈을 죽여 버릴 것 같아, 빨리 이쪽 일을 마무리하고 가볼 생각이었다.
대체 왜 사칭하고 다녔는지, 그 이름의 주인으로서 자초지종은 들어야 하니.
"자, 그럼 네놈이 준비한 건 이게 끝이야? 뭐 더 없어?"
"이, 있다!"
"뭔데? 빨리 꺼내. 쌈박하게 끝내자고. 너도나도, 우리 둘 다 바쁘니."
그러자 검지를 뻗어 한쪽을 가리키는 녀석. 그 손끝은 정확히 흑살마신 사칭범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저것도 강시였어?"
"그, 그렇다."
"그거 외엔 없고?"
"그렇……다만?"
"그냥 죽어라."
물론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두 다리를 아작내고 이후 혈을 짚어주었을 뿐. 덕분에 녀석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 중간에 무슨 발악을 하려던 것 같긴 한데, 절굿공이로 발등을 한 번씩 후려쳐주자 녀석은 눈이 뒤집힌 채 부르르 떨었다.
"어이. 너희 둘."
"예, 옙!"
"이 녀석 망 잘 보고 있어. 알겠어?"
"알겠습니다!"
대체 이런 놈이 무슨 왕……. 천강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거대한 석실에서 두 존재, 천수향과 흑살마신 사칭범이 싸우고 있다. 가짜 흑살마신은 어떻게든 공격을, 천수향은 반대로 방어를.
천강은 잠시 팔짱을 끼고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
"정신 차려, 흑살마신! 나야. 나라고!"
그러나 복면을 쓴 상대는 마치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묵묵히 매서운 공격을 날려댔다.
화경치고는 매우 재빠른 공격.
그러나 흑살마신의 진짜 무서운 점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흡공이다.
손에 닿는 모든 걸 흡수해내는 흡성대법은 바로 떼어내지 않을 경우,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괴사하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천수향의 무공 특성인 유(柔)는 분명 중(重)과 강(剛)을 가진 흑살마신을 압도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닿는 순간 흘리기가 불가능해지는 흡공의 기술에 그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젠장. 좆같은 금나수!'
어떻게든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내력으로 그 신체를 붙들어도 흡공으로 가볍게 풀어버리고, 결국 성질이 뻗친 천수향의 신형이 잔상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흑살마신 뒤편에 나타나 발로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아, 쫌 내 말을 들어보라고오오오!"
사천당문 팔괘동작 제3식, 등짝 내려찍기.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일격이었다. 석실 바닥이 깊게 파이고 곳곳으로 땅이 갈라지며 거미줄을 쳤다.
천수향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후우. 꼭 맞아야 말을 들어요."
어디 보자. 일단 적당히 마비 독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게 좋겠지?
그에 독침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발목을 누군가 움켜잡았다. 그녀의 발밑에 깔려있던 흑살마신이었다.
우드득.
내기가 빨려들어 감과 동시에 으스러지는 발목.
"큿. 어떻게?"
분명 방금 일격에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을 터인데?
일단 중요한 건 어떻게든 흑살마신의 손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에 곧바로 내기를 실어 걷어차도 소용이 없었다. 어찌나 꽉 붙들었는지, 흑살마신의 팔을 잘라내지 않는 한은 방도가 안 보였다.
'하, 하지만…….'
잠깐 망설이는 사이 내기의 반이 빠져나갔다. 발목 또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점차 부서져 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는 그때, 그 일을 대신해 주는 이가 나타났다.
"너 뭐하냐?"
"어……?"
천강이 나타나 녀석의 손목을 싹둑 잘라냈다.
천수향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너어어어!!"
이유는 몰라도 직감적으로 맞을 걸 예상한 천강이 사칭범을 발로 걷어차고 본인 또한 후다닥 천수향으로부터 물러났다.
천강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이 시발 새끼!"
"야야. 잠만. 지금 나보고 욕한 거야?"
"그래. 너 이 씨……."
천수향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도로 자빠진다. 발목 한쪽이 위태로운 순간까지 간 탓이다.
그녀의 발은 거무튀튀하게 손바닥 모양으로 피부가 죽어 있었다.
"야. 위험할 것 같아서 도와주니까 왜 성질이야."
"누가 도와달래! 엉!"
뭐지 이년은…….
'미친년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자의 마음이란. 지는 금방 거의 죽일 각오로 내리찍어 놓고서 내가 손목 하나 잘랐다고 왜 지랄발광인지.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천 대협! 조심하십시오!"
어느 틈에 뒤로 바짝 다가온 사칭범의 모습에 일천귀검이 소리치고, 천강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내력발산으로 놈을 도로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사자왕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내력만으로! 상대의 내기 따윈 다 흡수하기 때문에 내력발산으로는 튕기는 게 불가능할 텐데!"
"흡수 못 할 정도로 들이부으면 돼."
천강의 대답에 사자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로지 내력이 차고 넘치는, 인간의 한계를 넘은 천강만이 가능한 방법.
천강의 시선이 다시 천수향에게 향했다. 그녀는 끙끙대며 다리 하나로 잘도 일어서고 있었다.
"너 뭐야. 왜 끼어들어!"
"야. 네가 잘 싸웠으면 나도 안 끼어들었거든?"
"당장 꺼져. 네깟 놈이 낄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딱 봐도 본인 말만 하는 게 더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고. 천강은 그녀를 무시하고는 흑살마신 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의외로 멀쩡한 상태였다.
쫑알쫑알 뒤에선 여전히 음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개 잡놈이…… 당장 안 꺼져! 이건 저놈이랑 나 둘이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저놈이랑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순서상으로 치면 내가 우선이야. 오히려 네가 빠질 일이라고."
"뭔 개 소리야! 녀석과 난……."
"이건 사칭의 문제거든."
"……뭐?"
소리를 치던 천수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멎었다.
천강은 자신에게 찬찬히 다가오는 사칭범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이곳에 오니 누가 내 이름을 사칭하고 다니더라고. 그게 줄곧 누군가 궁금했는데, 그게 너였냐?"
천강의 말에 녀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 이미 죽은 자가 무엇을 말할까.
"아무튼 거 음존과는 어떤 은원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순서로 따지면 응당 사칭 피해를 입은 내가 먼저라 이 말씀. 그러니 이번엔 양보하라고."
천수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천강의 뒷모습을 본즉, 문득 아미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된 시절. 그녀는 아미산의 언니들을 만나러 가다가 질 나쁜 무림인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병적으로 낯가림이 심했던 그녀는 그들을 향해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줬었다.
그게 흑살마신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
'당시 그의 모습도 딱 저러했는데…….'
든든한 뒷모습.
자신감이 내포된 양어깨.
적을 앞에 두고도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을 거는 여유까지.
'그러고 내게 하는 말이 이러했지.'
- 야. 걸리적거리니까 저만치 좀 떨어져 있어 봐.
"야. 걸리적거리니까 저만치 좀 떨어져 있어 봐."
두근.
"야. 내 말 안 들려?"
멍하니 서 있는 천수향을 천강이 일천귀검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목을 좌우로 풀며 사칭범을 향해 진한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자, 그럼 어디 가짜 낯짝 좀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