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0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05화
205화. 묘안
뜨거운 여름 날씨에 녹음이 우거진다.
곳곳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창공의 하늘을 잠자리 떼가 날아다닌다.
그러한 시기에 사천의 북쪽. 험준한 산맥을 마치 산보하듯 올라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강과 서희였다.
물론 두 사람의 행태를 자세히 보자면, 걷는다고 하기보단 나는 것에 가까웠지만.
하북팽가의 안주인 서희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왜 이리 서두르시는 건가요? 저야 마치 새라도 된 것처럼 날아서 좋긴 한데요. 호호호."
"아아. 별거 아냐."
무림인들의 저돌성과 행동력은 마치 멧돼지와 같아서, 앞뒤 안 재고 들이받고 보는데…… 그래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피해도 크지만 빠르게 결과가 나오곤 했다.
그에 급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른 이가 비고를 먼저 다 털어가기 전에 말이다.
"남편 만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그때 들어."
"그냥 지금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남편하고 수다 떨 거리 하나라도 더 있어야지?"
"후훗. 그러고 보니 그래야겠네요."
그렇게 이런저런 담소를 떨며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산맥의 뒤편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
높다란 나무 위에 서서 고개를 든다.
탁 트인 넓은 평야가 보이고. 왼편으로는 서안의 땅이, 오른편으로는 강과 그 너머 자리한 산서의 땅이 내다보인다.
"무림맹이 보이네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오늘 안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천강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쏘아져 나갔다.
***
거대한 공간에 기다란 상이 자리하고, 그 좌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소 굳은 얼굴로 회의를 나누고 있는 그들은 바로 무림의 핵심. 각 세가와 이름 있는 문파들의 장문인 혹은 대표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발단은 곤륜이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공습을 가한 이들이란 바로 마교.
마교는 예부터 중원을 호시탐탐 노려온 새외세력이다. 그때마다 무림맹을 필두로 중원은 그 공습을 수차례 막아왔고 이번에도 그걸 답습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대응책이 마련되기도 전, 이들은 큰 풍파를 만나고 말았다.
중원 내에서 돌연 무영신투의 비고가 나타나고 만 것이다.
"큰일이오. 마교의 습격이 있는 이 순간에 무영신투의 비고라니. 이는 자칫 우리끼리 피를 볼지도 모를 일 아니오이까."
"어허. 그러게 말이오. 이를 어찌해야 할지."
"듣기로는 말을 해도 통제를 따르는 이가 없다고 하지요?"
"그렇소. 통제를 위해 보낸 이들조차 감당 못할 만큼의 수와 실력자들이 나타나, 사실상 흐름을 막는 건 불가능하게 됐소이다."
"얼마나 모였길래 그러오?"
하북팽가의 가주 팽도휘의 물음에, 무당파의 장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고가 올라온 게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소. 다시 사람을 보내 알아볼 생각이오."
"대체 몇이나 모였기에?"
말을 안 하는 무당파 장문인을 대신해 제갈세가의 가주가 대신 답했다.
"이천 명이오."
"무, 무슨……. 이천 명?"
"그것도 어제저녁 기준일 뿐, 실시간으로 불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보고자의 말에 따르면, 각 문파의 사람들뿐 아니라 일개 무사……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모조리 모이고 있다는군요."
"그게 말이 되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다시 사람을 보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게 주류였다.
그때 당가의 임시 가주 당묘오가 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왜 못 믿으시는 거지요? 여러분도 어릴 적부터 한 번쯤은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무영신투의 비고를 발견하는 자! 천하에 둘도 없는 부호가 될 것이요, 천하를 호령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닌가요?"
고개를 주억이는 사람들.
"탐욕이란 무섭죠. 분수에 넘치는 재물을 눈에 아른거리게 하고 결국엔 죽음으로 이끄니까요. 제가 볼 때 지금 모인 숫자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나 제갈전현 또한 공감하는 바입니다. 아마 이대로 소문이 계속 번져나간다면, 족히 1만 이상은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제갈전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의 9할 이상은 죽을 거라는 것이지요."
"크흠. 그거야말로 정말 큰일 아닙니까? 마교와 싸우기도 전에 그 정도의 전력 손실이 발생하다니."
"어쩌면 그걸 노리고 마교에서 수를 쓴 것일지도 모르지. 교활한 놈들이니."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마교의 곤륜 습격 이후, 바로 무영신투의 비고라니.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제 전달받은 아미파 사건 또한 혹여나 마교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곤륜 다음으로 마교에서 가까운 지역 중 하나가 사천이고, 사실상 사천만 장악을 마쳐도 무림의 4할 가까이를 집어삼켰다고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사천엔 수많은 무림인들과 문파가 모여 있었는데, 그곳의 한 문파가 멸문지화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으니…….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듭니다. 느낌이 안 좋아요."
화산파 장문인의 말에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근데 그 비고가 진짜긴 한답니까? 그냥 적당히 물건 하나를 끼워 넣어 가짜로 몰면 될 것인데."
상석에 가만 자리하고 있던 무림맹 맹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서 발견된 물건이 진짜이긴 한 모양이오. 원(元) 때의 황실 물건이 나왔다더군."
"원 때의?"
"현장에서 바로 황실 사람이 와, 금원보 한 보따리를 값으로 치르고 가져갔소. 다수의 목격자가 있으니 거짓은 아닐 게요."
그걸 본 이들이 있기에 더욱 소문이 신빙성을 얻고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실제로 비고에서 물건 하나를 가지고 나와 일확천금한 사례가 발생해버린 탓에.
"골치가 아프외다. 관군에 도움을 요청해도, 아직 위에서 답을 주지 않아 기다리고만 있는 실정이고 말이오."
고민에 잠긴 사람들.
그러나 별다른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고. 저녁 회의도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을 내야 하나 하는 순간,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묘안을 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년에 있을 용봉지회를 1년 앞당기는 겁니다. 상금도 이전보다 더 크게 걸고, 많은 이들이 받을 수 있게 말입니다."
"옳거니! 그럼 비고에 몰려드는 수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겠군!"
물론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어리지만 실력 있는 무림인들을 제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로 칼을 들고 경쟁이 일어날 때 결국 살아남는 건 소수의 실력자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무영신투의 비고라는 파도로 인해 재능 있는 어린 무림인들을 잃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의견이 나와 회의실의 분위기는 확 풀어지고, 무림맹 맹주인 남궁태우가 손을 치켜들었다.
"일단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파하겠소. 내일 진시(辰時)에 모여 자세한 사항을 논의하도록 하겠소이다. 다들 수고하셨소."
회의가 파하고, 각 장문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긴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하북팽가의 가주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청성검귀와 함께 한잔할까 하는데, 어떻소? 함께 하시겠소이까?"
팽도휘가 고개를 들자 청성파의 장문인이 두 손을 모아 가볍게 예를 차렸다. 이런 자리를 거절하지 않는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게 좋은 게 있으니 오늘은 내 대접하리다!"
그러고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따라온 수행원 중 하나였다.
"헉. 허억. 가주님."
"무슨 일인데 내기까지 끌어 올려 그리 뛰어오는 것이냐."
"가주님. 가주님……!"
"말하거라. 내 어디 안 간다."
팽도휘가 팔짱을 끼고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이어 나오는 수행원의 말에, 그는 팔짱을 풀고 손을 잘게 떨었다.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가문의 안주인께서 돌아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쾅.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공기파가 터져나가고, 바닥은 산산조각이 나 허공에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함께 있던 두 문파의 장문인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크게 웃었다.
"허헛. 이거 오늘은 얻어먹는 보람이 있는 날이겠구료."
"그러게 말이외다."
팽도휘의 신형이 무림맹의 정문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태풍 그 자체였다.
어찌나 빠르게 나아가던지, 그가 지나간 곳 근처의 지붕과 기와가 흔들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문에 다다른 순간, 그러니까 한 여인의 앞에 도착한 순간엔 강풍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미풍만이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그 부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개방에 찾아가 사정을 하고, 하오문에 큰 거금을 들이고.
그럼에도 끝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어떤 흔적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다시 눈앞에 나타나다니.
"부인. 부인 맞소?"
"가가. 그간 강녕하셨나요?"
"부인……!"
곰처럼 덩치 큰 사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그 부인을 끌어안았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치는지, 거리의 모든 시선이 다 모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천강의 신병이기들이 흐뭇하다는 듯 말했다.
- 보기 좋군요.
- 간만에 좋은 일 한 것 같구나.
- 너도 어서 장가를 가는 게 어떠하느냐.
'언젠가는 가게 되겠지.'
- 지금부터 찾아봐야 늦지 않느니라.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천강은 딱히 여자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뭐라고 할까. 중원에 있을 적엔 밥걱정에 이성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고, 쥐 굴과 암운곡 생활할 땐 여자란 맨 치고받고 싸우는 경쟁 상대였다.
그러고 밖으로 나와 만난 중원여자가 홍랑이었으니…….
'쯧쯧. 글렀어. 내 머릿속에 여자라는 생물은 어느 쪽이든 문제투성이야.'
- 소년. 너무 확정 짓지 마세요. 인연이란 게 있으니까요. 아직 못 만난 거겠죠.
음. 그럴 수도.
혹시 아는가.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을 만나 생각이 좀 바뀔지.
"천 대협!"
천강이 잡생각을 하는 사이, 1차 해후는 대략 끝났는지 서희가 그에게 손짓했다.
몇 차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좋은 시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빨리 비켜주도록 하자.
"자초지종은 간단히 들었소이다. 선인께서 우리 부인을 구해주셨다고 말이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저 지나가다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한 것일 뿐."
"하하핫. 그래도 선인께서는 나와 부인의 은인이외다. 혹여 우리 팽가의 도움이 언제든 필요해진다면 말씀하시오. 나와 내 가문이 전력으로 도와드릴 터이니."
그러고 그는 천강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무림맹 안쪽으로 팔을 펼쳤다.
실종되었던 부인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은인과 사람들을 모아 잔칫상을 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강은 깔끔하게 거절하고는 마주 보며 예를 갖추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를. 지금은 은인보단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게 맞는 것 같으니. 대접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받도록 하지요."
"그래도……."
팽도휘가 재차 요구를 하려 하나,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포장했다고 판단한 천강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천강 입장에서는 은원관계만 확실히 다지고 얼른 무영신투의 비고로 가야 했기에.
그로 인해 남은 두 사람에게는 도리어 묘한 아쉬움과 여운이 남게 되었다.
"하하핫. 정말 멋진 분이시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사라지시다니. 저런 사내를 내 이제껏 중원에서 본 적이 없소."
"호호호. 그러니까요."
볼 수 있을 리 없죠. 마교 사람이니.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아 그 사실을 조용히 함구하고, 두 사람은 잠시 천강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무림맹 안으로 발을 옮겼다.
***
짙은 어둠. 달빛과 횃불의 노란 빛을 피해 은밀히 만남을 가지는 이들이 있다.
한 명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남자, 다른 한 명은 모용세가의 가주다.
그는 오늘 회의에서 용봉지회를 1년 앞당기자는 묘안을 낸 인물이기도 했다.
듣는 이가 없나 주위를 한 차례 살핀 그는 내기 한 줌 안 느껴지는 복면인을 향해 조용히 이야기했다.
"태감(太監)께 전해라.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