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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20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201화

201화. 무릉원

 

 

미풍이 일고 연못 위 물결을 만들어 낸다. 노란 달빛이 그에 따라 제 모습을 찾고자 작게 일렁인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천수향에게 당소여가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가문엔 다시 안 돌아와요?"

"글쎄."

"할아버지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셔도 될 것 같은데."

"내가 돌아오면 너 이 방 빼야 할걸?"

"아, 맞다. 이 방 이모 거였지."

당소여가 작게 웃는다. 천수향이 차를 한 입 머금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왜 이 방에 자리를 잡은 거야? 많고 많은 곳 중에."

그도 그럴 게, 중원 최악의 악녀라 낙인찍힌 뒤로는 그 누구도 이곳을 탐내지 않았다. 혹여나 더러운 재수가 옮겨붙을까 봐.

그런데 아홉 살 되던 해에 떡 하니 차지한 것이다. 눈앞의 조카가.

"여기서 볼 때 연못 경치가 가장 아름답더라고요. 그거 보고 선택했어요."

"풉. 나랑 같은 이유네."

너무도 오래전 이야기.

천수향의 어린 시절 성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에 그녀는 조용하고 과묵했으며, 멍하니 자연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한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좋아하면 닮아간다 했던가. 그녀는 그의 모든 걸 닮아가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함이나 자신감, 여유로움. 싸가지 없는 말투 하며 어떻게 보면 오만하기까지 보이는 행태까지.

잠시 과거의 회상을 하던 천수향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이놈의 잡스러운 감정은 순간순간 튀어나와 마음을 어지럽힌다.

"근데 네 나이가 올해로 몇이지?"

"열여섯. 어떻게 자기 조카 나이도 모를 수 있어요?"

"내가 내 나이도 모르는데, 다른 이 나이는 어찌 알까."

천수향의 한마디에 당소여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자신의 나이도 모르는 인간이 있다니.

"그럼 슬슬 남자를 들여야겠네?"

"뭐 그렇긴 한데요."

"어디 괜찮은 사내는 있고?"

매해 묻는 질문. 작년에도 물었고, 재작년에도 똑같이 물은 질문이다.

이모로서 나눌 대화가 마땅치 않은 터였다.

'이런. 나도 모르게 또…….'

이 질문을 하면 조카는 화를 낸다. 시집은 자기가 가고 싶을 때 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며.

그런데 올해는 평소와는 달랐다. 아무런 반응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응? 천수향이 의아함을 가지고 쳐다보자, 당소여는 입술을 비틀며 뭔가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괜찮은 남자를 찾은 거니?"

"아. 네, 뭐……."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천수향의 질문에, 당소여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손을 잡고는 물었다.

"이모."

"응?"

"원래 남자들은 홍루 같은 데 가고 그러나요?"

"홍루?"

잠깐 생각을 정리한 천수향이 고개를 주억였다.

"뭐 그렇지? 결혼한 후에도 부인 몰래 가는 경우가 있으니, 결혼 전에는 당연히 가지 않을까?"

"……그래요?"

"근데 너랑 결혼하면 갈 리가 없지. 너 정도 외모면 나라도 다른 여자는 성에 안 차겠다."

그러자 당소여의 눈에 어떤 결심이 올라왔다. 천수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후훗. 나도 네 나이 때쯤 괜찮은 남자를 찾았다 생각했지.'

실상은 아니었지만.

순간 착 가라앉는 기분을 이리저리 털어낸 천수향이 조카 당소여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축하해. 그렇다고 남자에게 너무 푹 빠지진 말고. 남자란 너무 다가가면 도망가는 생물이니까."

"알았어요, 이모."

"그런데 궁금하네. 우리 조카가 푹 빠진 남자가 대체 누구일까."

"다른 사람에겐 절대 비밀이에요. 그게 누구냐면……."

그런 그때,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던 천수향의 얼굴이 싸악 돌변했다. 그녀의 시선이 홱 남쪽을 향했다.

"이모?"

"잠깐. 조금 있다 마저 이야기하자."

천수향의 신형이 번개같이 허공을 갈랐다.

조금 전 그녀가 느낀 기운은 분명 현경의 실력자. 이곳 사천에 현경 실력자라고는 소수에 불과하다.

청성파의 1장로와 당가의 3장로뿐.

웅성거리는 성벽의 병사들이 보이고, 이내 그녀는 아미산으로 오르는 산자락에서 왼팔이 뜯긴 채 죽어있는 시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문 사람이었다. 어릴 적 그녀의 호위가 되어주었던.

"……독수."

슬픔도 잠시, 천수향이 기감을 넓게 펼쳤다. 아미산의 일대를 다 뒤덮을 만치 넓게.

곧 감겨있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이고, 그 신형이 바람 같이 사라졌다.

 

***

 

아미산 남쪽 산등성이를 쭉 타고 내려가면, 산으로 둥글게 싸여 있는 널따란 평지가 나타난다.

그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습한 기운과 수많은 무덤들이 한데 어우러져 음기가 충만한 곳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천도 있건만, 희한하게도 사시사철 안개가 끼는 특이한 곳이었다.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낮에도 그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고, 종종 그곳에서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터라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곳에 한 노인이 발을 들이고 있었다.

"끌끌끌. 성공이군. 성공이구먼!"

그는 바로 붕천무신. 한때는 개방의 방주까지 지냈으나, 여러 큰 사고를 쳐 색귀로 불리게 된 노인이었다.

우웁. 우우웁.

그에게 사로잡힌 아미파의 여인들이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그러나 현경의 고수에게 제압당한 혈도는 풀기도 요원한 일이요, 푼 뒤에도 문제였다.

결국 도망을 가기 위해서는 그를 제압해야 했기에.

"끌끌. 다 왔으니 가만 있거라, 아가들아."

노인의 신형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안개 그득한 무덤가의 형상이 사라지고, 잘 개간된 평지가 나타났다.

사람의 손을 잘 탄 듯 무르익은 곡식들은 여기가 과연 무덤가였는지 의문이 들게 했다.

그곳엔 커다란 건물 세 채가 지어져 있었는데, 색귀가 크게 호통을 치자 그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고개를 숙였다.

"이놈들! 주인이 왔는데 마중 나오지 않는 게냐!"

족히 삼십은 되어 보이는 여인들.

그녀들을 보는 순간, 아미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는 몸을 떨었다.

그곳의 여인들 중 반수 가량은 무인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아무런 내기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자, 그럼 위에서부터 하나씩 작업을 해볼까?"

색귀를 마중 나온 여인들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색귀가 가장 마지막에 잡아들인 아미파의 배신자 둘을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하복부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끄으으윽……."

오징어마냥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이내 입에 거품을 무는 여인. 단전을 파괴당한 고통에 기절한 것이다.

서 있던 여인 둘이 다가와 그녀를 끌고 한쪽으로 사라졌다. 노인의 고개가 다른 한 명에게로 가 닿았다.

"으으으. 으읏……."

여인이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좌우로 흔든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는 노란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가차 없이 발로 내려치는 노인. 그런데 이번엔 힘이 과했던 걸까?

"응? 에잉. 뒈져버렸네. 간만에 했더니 잘 안되는구먼."

입으로 피거품을 쏟아낸 시체를 보고는 노인이 고갯짓을 했다.

"저쪽 땅에다가 묻어라. 나중에 거름으로 쓰게."

그의 지시에 여인 넷이 다가와 그것을 치웠다. 그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본 아미파 사람들은 공포에 덜덜 몸을 떨어댔다.

그 행태를 보고는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들 말거라. 그래도 열에 여덟은 성공하니까. 물론, 나머지 실패 한 번이 자신이 되면 꽤 슬플 테지만 말이야. 끌끌."

도살당하기 직전의 가축 심정이 이와 같을까.

하룻밤 새에 펼쳐진 가혹한 현실에, 아미파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는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도살자는 성큼 다가오고. 그가 그들 중 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순간, 그의 뒤쪽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 명이 너일 가능성은?"

색귀가 화들짝 놀라 팔꿈치를 힘껏 뒤로 휘둘렀다.

걸리는 건 없었다. 그저 허공만을 가를 뿐.

다만 곧 볼 수 있었다. 여인들 사이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한 사내를.

"네, 네놈이 여긴 어떻게?"

"글쎄."

이곳 주변엔 거대한 기관진식이 펼쳐져 있다. 제갈세가의 현 가주가 와도 반 시진 안엔 못 뚫을 기묘한 진식이.

"설마 그 새끼가 이곳 비밀을 분 것이냐!"

노인이 지칭하는 새끼란 바로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

색귀의 비밀 거처인 이곳 무릉원은 아직 그의 민낯이 드러나지 않았을 적 제갈세가에 도움을 주고 받아낸 보상이다.

마을 하나 정도는 자리를 잡아도 됨 직한 크기의 땅에 일정한 간격으로 빙 둘러 기둥을 세우고, 함부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결계를 만들었다.

안에서는 마치 무형의 막에 막힌 듯 튕겨 나가고, 밖에서는 이곳이 무덤가로 보여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출입구를 통해 드나드는 게 가능한데, 그조차도 반드시 밟아야 하는 곳을 순서대로 스물두 번을 밟아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진법에 능한 제갈 출신이라도 가히 이것을 풀려면 한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당사자로부터 확언까지 받은 터였다.

"그런데 어찌 네놈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냐!"

"아아. 꼬리를 붙였거든."

"뭐? 말도 안 돼.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했거늘!"

현경인 자신의 눈을 속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약 이각(二刻) 전. 색귀와 독수가 양방향으로 갈라선 걸 본 천강은 막야로 하여금 색귀의 뒤를 추격하게 하였다.

물론 그냥 추격할 경우 들킬 수 있으니, 막야와 그녀에게 가는 내기의 통로를 암운신공으로 감싼 것.

'처음엔 가능할까 싶었는데, 여차저차 되더란 말이지.'

평범한 무인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방법. 아니, 그 어떤 현경조차도 꿈꾸지 못할 방법.

오로지 내기가 차고 넘치는 천강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막야는 색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고, 이후 그가 통과하는 그 모습까지 고스란히 기억했다.

'방법을 알고 나면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지.'

천강이 떡하니 뒷짐을 지고 색귀는 반대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누가 봐도 명백히 보이는 고저.

'건방진 놈. 속도엔 자신이 있다 이거냐?'

안타깝게도 색귀 그는 담 넘고 도망가는 재주는 좋아도, 신법엔 영 소질이 없었다.

상대가 속도전으로 싸움을 걸어오면 그로서는 답이 없었다.

"에잇!"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색귀가 묶여 있는 아미파 여인들을 천강에게 내던졌다. 잠깐 도망가면서 생각을 할 요량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여인 아홉.

'……재수 없으면 죽겠는데?'

몸이 서로 묶여 있고 혈도까지 짚인 탓에, 자칫 땅에 머리부터 떨어지면 목이 부러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천강이 그녀들을 잡는 순간, 색귀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네놈! 그 자리에 딱 멈춰 서라."

여인들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본즉, 색귀가 그새 다른 여인 하나를 인질로 잡고는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왼손엔 여인의 목이, 오른손엔 기이한 물건이 움켜쥐어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면 기다란 몽둥이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마치 봉 같기도 했다.

- 소년. 저거 신병이기에요.

- 아무래도 개방의 타구봉인 듯하다.

'쌈박질 방식이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개방 출신이었나?'

그런데 왜 개방 방주의 물건이 저기에 있지? 설마 저게 개방 방주는 아니겠지?

천강이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갸웃대는 사이, 그가 몽둥이를 치켜들고는 소리쳤다.

"이년이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꼼짝 마! 내기 운행도 하지 마!"

그러고는 찬찬히 다가오는 색귀.

왠지 익숙한 상황에 천강이 짧게 콧김을 뿜었다.

실제로 그 뒤 일어난 일도 아주 흡사했다. 색귀가 몽둥이를 하늘 높이 치켜든 것이다.

- 소년. 그냥 공격하세요. 신병이기를 그냥 맞아주면 위험합니…….

그러나 말을 끝맺기 전, 색귀의 몽둥이가 천강의 왼쪽 어깨를 후려쳤다. 굉음과 함께 강한 공기파가 그곳에서 터져 나왔다.

색귀의 눈이 빠질 만치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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