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0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00화
200화. 독수
"확실히 우리 셋이 움직이니 빠르구먼."
색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로 인해 득을 본 자는 오로지 그 한 명뿐이었다.
가지고 논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는 알지 못하나, 옴짝달싹 못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니 그 말로를 추측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아미산을 빠르게 내려가는 세 사람.
얼마나 움직였을까. 돌연 귓가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했으나, 자연적으로 이는 소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분에 청명적풍이 급히 몸을 돌려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무언가 날아와 그의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큿.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묵직한 공격에 손목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흔들거린다.
그러나 이쪽은 현경이 셋. 제아무리 실력 있는 자라도, 설령 신수가 나타난다고 한들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청명적풍이 내기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투지를 불태우는 그 의지를 받들어 그의 검이 작게 검명을 울렸다.
"내가 적의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볼 터이니, 그 틈에 두 분이서 일격을 먹이시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당혹감에 뒤를 돌아본다. 색귀와 독수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도망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생각을 잘못해도 아주 단단히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하. 하하핫."
그들은 사천의 장문인들이 자리를 비우고 형세가 이쪽으로 기울자 오늘 막 참전한 이들이었다.
전우애나 동질감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청명적풍. 그러니까 오랜 기간 사천의 배신자들을 규합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정작 그가 버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망연자실하게 검을 늘어뜨린 채 산 아래쪽을 바라보는 그의 앞으로 검은 안개가 내려섰다.
그 모습은 마치 유명계에서 형벌 집행을 위해 올라온 사신과 같았다.
"……댁은 누구시오?"
"그대들에게 안식을 내려줄 사람."
"마지막으로 죽기 전 선인의 존함을 알고 싶소이다."
"투파창귀에게 내 이야기 못 들었나?"
투파창귀라니. 설마…….
"흑살마신?"
남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청명적풍은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당소여 암살에 실패하고, 사해단이 사라지고, 이곳에 모인 것까지 모두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었다는 걸.
"곤륜도 그대의 짓이오이까?"
"뭐 그렇지?"
"하하핫."
자조적인 웃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것이 멈출 즈음 흑살마신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없나?"
"없소. 그저 이전 날의 내 행동들을 후회할 뿐."
여러 후회가 들었다.
청성파에 어릴 적 들어와 동기들과 열심히 수련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즐거웠다. 하지만 전란의 불씨는 모든 걸 집어삼켰고, 청성 또한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크게 기운 청성을 사천 제일가는 문파로 만들겠다고 죽어가는 동기들에게 약속했다. 그에 어떻게든 노력했으나…… 슬프게도 현실이 뒷받침되어 주지 못했다.
장문인은 우유부단하고, 다른 장로들은 고작 자리에 연연한 탓이다.
결국 한솥밥을 먹은 이들의 피를 묻혀 가며 만들어온 기회였다. 오로지 청성파의 발전을 위해.
그러나 죽을 때가 된즉 그 모든 일이 후회스러웠다.
그중 가장 후회스러운 걸 꼽자면, 조금 전 혼자 살겠다고 부하들을 버린 것이었다.
'욕망의 끝이란 참으로 비참하구나.'
현경에 오르고도 못 깨닫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깨우치다니.
"뭐해. 검 안 들고?"
"더는 살고자 검을 휘두르고 싶지 않소. 내 사욕에 휘둘려 비참해지는 건 이만 끝내고 싶소."
"그래."
청명적풍의 목을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툭 떨어진 청성파 1장로의 머리를 본 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이런 정신머리로 어찌 배신을 한 것인지……. 그냥 문파 내에서 조용히 후학 양성을 하는 게 딱 어울렸을 인간이구만."
혀를 작게 찬 천강의 신형이 스르륵 연기처럼 사라졌다.
***
"청명적풍의 기운이 끊겼소."
"과연 보통 놈은 아니란 게로군. 끌끌."
"이대로는 우리 둘도 잡힐 것이오."
독수의 말에 색귀가 생각에 잠겼다. 그가 경공에 조예가 깊다고 하나, 무려 스무 개의 수집품을 들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다음 희생양은 그가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에 그는 머리를 썼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우리 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가는 걸세."
"그 무슨……."
"내가 남쪽으로 가겠네. 그대가 북쪽으로 가세."
색귀에게 항의하려던 독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현재 아미산을 기준으로 북쪽이 도시와 더 가까웠다. 또한 가문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가야 했다.
그의 입장에선 가문으로만 들어간다면 그를 보호해줄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다만, 그 제안을 한 게 색귀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 늙은이가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독수가 대답하지 않자 색귀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그게 싫다면 내가 북쪽으로 가겠네. 그대가 남쪽……."
"아니. 내가 북쪽으로 가지."
"끌끌. 그러세. 그럼 무운을 빌겠네."
색귀와 독수가 갈라섰다. 색귀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걸렸다.
'상대는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그런 면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가 두 번째 희생양이 된다. 왜냐? 인가로 파고들면 제아무리 내기를 잘 느끼는 자라도 찾기가 요원하기 때문이다.
남쪽 인가까지의 거리는 한참이니 놈은 필히 북쪽으로 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색귀 자신은 인질을 스무 명이나 들고 있으니, 그 점을 감안해도 일단은 몸이 가벼운 독수를 노릴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대로 내 비밀 거처까지만 가면, 녀석은 절대 날 찾지 못한다.'
색귀의 비밀 거처는 지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색귀의 그런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독수가 사천의 도시 코앞까지 다다른 순간, 웬 검은 안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이다.
두 손을 모으며 독수가 예를 갖추었다.
"난 사천당문의 3장로 독수라 하오. 한 수 잘 부탁드리오."
"아미산에서 상당히 악행을 저지르던데, 그리 순순히 이름을 밝혀도 되나?"
"아아. 그대나 나나 오늘 이 자리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소. 그렇기에 말한 것이외다."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긴. 전생에도 강해지고 생존하는 데에 꽤 진지했던 인간이었지.'
당가 중 유일한 독공의 소유자. 1장로를 제외한 당가의 최고령자. 실력으로 치면 장문인 다음이었으니, 사실상 현 당가의 일인자와 다름없으리라.
천강의 검은 옷자락이 스르륵 사라졌다.
"난 흑살마신."
"흑살마신……?"
"오고 가며 한두 번 마주친 적은 있지?"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랑이 어릴 적, 집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를 데리러 그가 종종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이거 오늘 죽을 각오로 임해야겠군."
"그런 것치고는 입가에 미소가 그려져 있는데?"
"아아. 그대와는 한 번은 싸워보길 원했거든. 가주를 일격에 제압했다니, 그 실력이 어찌 안 궁금할까."
천강과 독수가 자세를 잡았다. 독수의 얼굴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흑살마신은 흡공이 주 능력이다.'
그러나 그는 흡공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왜? 내 내공은 독 그 자체이기에.
100년 넘게 품고 강하게 응축시킨 독이다. 흡수하기만 해도 온 내장이 녹아내릴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마 속도전으로 싸움을 걸겠지.'
아미산에서 보여준 그 놀라운 움직임을 떠올린 그는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공격이 들어온 순간, 금나수로 독을 심기 위해서다.
아주 간단한 공격법이지만,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그의 몸속에 있는 맹독이 그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독과 함께 금나수만 100년 넘게 단련한 그의 입가엔 자신의 무공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강하게 함축돼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천강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과연 그의 독은 내게 통할 것인가, 통하지 않을 것인가.'
천강의 신형이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독수에게 접근한 천강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우드득.
컥……. 내기를 둘러 방어했음에도 부러지는 갈비뼈들. 그 고통을 악착같이 참아낸 독수의 반격이 펼쳐졌다.
타격을 먹이고 옆으로 지나가는 천강의 팔을 움켜쥔다. 그리고는 도망 못 가게 단단히 붙들며 몸속에 자리한 독을 최대한 밀어 넣는다.
치이익-
워낙 급속도로 밀어 넣는 탓인지, 검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독한 악취를 뿜어냈다.
그러나 독수는 더욱 악착같이 독을 밀어 넣었다.
'이 한 방에 못 끝내면 끝이다. 어떻게든 날 떨쳐내기 전에 최대한 많이 독을 집어넣어야 해!'
그의 의지를 받아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는 다량의 독.
그러나 곧 그는 의아함이 들었다.
'왜지. 내가 너무 집중하고 있는 탓인가? 왜 움직임이 없지?'
독수가 고개를 들어 천강을 바라보았다. 천강은 가만히 서서 독이 스며들고 있는 자신의 팔을 보고 있었다.
"……어?"
"독이 강하긴 한데, 치명적이진 않네."
"그게 무슨 소리냐!"
독수는 천강이 여유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100년 넘게 독성을 올린 독을 반 가까이 들이부었다.
이 정도면 그 어떤 현경이라도 독을 빼내기 전 사망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천강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확실히 체내에 품고 다니는 독이라 그런가? 약해. 일각산독보다도."
"뭐? 일각산독?"
"그래. 너희 장문인이 만든 거. 이제는 고인이 됐다지? 그 독도 내게 소용이 없었는데, 이 정도 독은 가뿐하지."
천강이 툭 독수를 밀쳐냈다. 사천성의 어스름한 노란 불빛을 통해 보이는 천강의 팔은 독에 당하면 생기는 수포 등의 현상이 전혀 없었다.
"이게 대체…… 이건 불가능해!"
"왜 불가능한데?"
"무려 100년을 갈고 닦은 독이다! 일평생을! 그런데 어찌 독이 통하지 않는 거지?!"
"아아. 그동안 몸에 해로운 걸 하도 많이 처먹고 다녔더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더라고."
"……뭐?"
왠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 천강이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해주었다.
"천 년 묵은 백사, 천 년 묵은 흑사,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천령초. 뭐 그런 거?"
"이, 인정할 수 없다!"
그깟 짐승이 모은 독보다 내 독이 못하다니!
일평생 익혀온 무공을 부정당한 기분에 독수가 온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지천이 작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내가 일평생 갈고 닦아온 독이……!'
그는 어릴 적 독을 지닌 영물들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독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그만큼 더욱 독해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 왔다.
동료를 방패 삼아, 혹은 다른 이를 희생양 삼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한다면 언젠가는 무적에 가까운 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란 꿈을 가지고.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몸속에 지닌 독이라면 능히 존자들 뿐 아니라 왕들과도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내 독이 일각산독보다도 못하다고? 고작 영물이나 풀떼기보다도?'
독수가 자신의 왼팔을 뜯어냈다. 그곳에서 나온 핏방울들이 하늘 높이 떠올라, 천강을 향해 매섭게 쏟아져 내렸다.
만천화우.
흙먼지가 크게 일고 사천 성벽 위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독수의 시선은 줄곧 흙먼지 속 사내에게로 고정돼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독수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일격에도 상대는 그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은 탓이다.
심지어 일격을 퍼붓는 순간까지도 흑살마신은 내기조차 끌어올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모든 공격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단 뜻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흑살마신의 옷은 하의를 제외하고는 다 사라져 있었다.
"하핫. 하하핫."
허탈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는 사내.
"더 보여줄 재주가 있는가?"
천강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내 모든 걸 쏟아 부었으니, 그저 후련할 뿐이오."
"근데 당신이 배신할 줄은 몰랐는데."
독수가 작게 웃었다.
"이제껏 이리 살아왔네. 내가 깨달은 원칙이 맞을까 그걸 몸소 증명하고 싶어서. 싸움터에선 동료를 방패 삼아, 죽음의 위기엔 벗을 희생양 삼아……. 이번에도 살아남고자 그런 것이지."
"그렇군."
천강이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가 천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 마지막 일격은 어땠나?"
한 명의 무인으로서 궁금할 것이다. 아니,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일평생을 바쳐 갈고닦은 자신의 기술이 어떠했는지.
천강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자신의 피와 독으로 이루어진 만천화우라…… 내가 본 기술들 중 가히 최고였다."
독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천강이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그는 자신의 피 대부분을 쏟아부은 탓에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건가?'
천강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