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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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99화
199화. 아미산
아미산.
사천성의 서남쪽에 자리한 높은 산이다.
산세가 굉장히 험준한데, 태양이 떠오르기 전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기운이 호수처럼 지천을 뒤덮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늦은 밤.
사위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풀벌레 소리와는 다르게 곳곳에선 매우 은밀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음? 거기 누구…… 읏."
"큽……."
아미산은 예부터 불교의 성지, 아미파의 근거지였다.
그랬기에 늦은 시간이라도 산 곳곳에는 아미파의 일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땅에는 곧 그들이 흘린 붉은 피가 촉촉이 적셔 들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청성파의 1장로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약 사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명적풍 오셨소?"
"독수께서도 오셨군."
당가의 3장로 독수.
수명이 100세가 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
제아무리 당가라 한들 독공을 쓰는 이는 거의 없다. 보통 침이나 수리검 등 자그마한 암기에 독을 발라 사용할 뿐.
물론, 초창기 당가는 그러하지 않았다.
다만 독공을 수련하다 죽는 경우가 너무 많아 하나둘 피하기 시작했고, 이내 독공 수련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독수, 그는 당가의 마지막 남은 독공 소유자였다.
"그대는 우리의 제안에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네만."
"시류를 잘 따르는 게 오래 사는 법 아니겠소."
즉, 살기 위해 참여했단 뜻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못 보던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하나같이 실력자들. 청명적풍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시작이 좋았던 탓이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그 어떤 문파라도 막지 못하겠군.'
당가와 청성파의 고수들뿐만 아니라, 작지만 이름 있는 문파의 수뇌부들도 다소 보인다. 사파의 이름 있는 자들까지.
그때 그의 눈에 한 노인이 들어왔다.
"음? 저자는?"
"아아. 그대도 알아봤구려. 그가 맞소. 색귀요."
말 그대로 색을 너무 밝힌 나머지 붙은 별호다. 외관은 그저 늙은이에 불과하나 현경 고수.
한때는 개방의 방주까지 한 인물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여인들을 건들고 다니다 결국 덜미가 잡히고.
이내 그 더러운 민낯이 온 천하에 드러나면서 기존의 별호를 잃고 정파에서 쫓겨난 인물이기도 했다.
"아미파잖소. 어차피 죽일 거라면 자기가 데려가 가지고 놀겠다더군."
청명적풍의 미간이 구겨졌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전력 하나가 이곳 다른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엄청났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숫자가 조금 더 불어나고, 마지막으로 아미파 사람들이 합류하며 그 수는 도합 515명에 달했다.
이 중 각 문파 내에서 힘 좀 쓴다는 이가 무려 백오십 명가량 되었으니, 이는 가히 엄청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투파창귀만 오면 되는 건가?"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색귀가 벌떡 일어났다.
"끌끌. 뭘 기다리는가. 흑살마신이야 오면 그때 치우면 되는 것을. 어서 아미파를 점거하세."
"기다리시오. 투파창귀는 신병이기를 여럿 들고 있는 실력자. 그가 참여해야 우리의 전력이 그만큼 보존될 수 있소."
독수의 말에 색귀가 혀를 찼다.
"그가 없어도 아미파를 점령하는 덴 아무 문제 없네. 죽는 이들이 있다고 해봐야 이런 벌레 같은 놈들뿐. 안 그런가?"
"뭣이라?"
색귀의 지목을 받은 남자가 칼을 빼 들고는 검 끝을 겨눴다.
"어서 사과해라."
"이런. 너무 정곡을 찔렀나? 미안하이. 나이가 들면 상대 배려한다는 게 힘들어. 근데 그대는 하체가 부실한 게 힘을 잘 못 쓰겠구먼. 그래서 어디 밤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이 늙은이가 보자 보자 하니까!"
칼을 들고 덤벼드는 사내의 신형이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색귀의 손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은 그가 사내에게 자그마한 돌멩이를 날려 보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화경 초입에 든 실력자를 단 일격에…… 과연 붕천무신이로군.'
붕천무신이란 색귀의 옛 별호다.
"예끼. 건방을 떨긴. 내가 네놈보다 족히 일백 년은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말실수 한 번 했다고 칼을 빼 들어?"
그는 마치 화풀이를 하듯 시체를 발로 짓밟았다. 시체는 채 일다경도 안 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모하고 말았다.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어찌 됐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늙은이조차 보통 실력을 가진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상황에 흑살마신이 나타나 주면 딱인데.'
그러나 투파창귀도 흑살마신도 나타나지 않고, 색귀의 거듭된 요구에 그들은 아미파로 발을 옮겼다.
어둠 가운데서 그런 그들을 은밀히 관찰하던 천강의 신형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굶주린다는 건 힘든 것이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고문을 하는 방법 중 굶기는 게 있을 정도로.
그냥 굶기는 것도 아니다.
그 앞에 맛난 음식을 내려놓고 눈으로 코로 마음껏 즐기게 해준다. 때론 인심 써주는 척 맛도 살짝 보게 해주고.
그냥 참는 거면 해볼 만할지도 모르나, 그렇게까지 하면 보통 사람들은 반쯤 정신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건 비단 음식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들은 굶주렸다. 오랜 기간 자신의 조직을 먹어 치우기 위해 굶주리고 또 굶주렸다.
문파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좀 일찍 환관 쪽과 닿은 곳은 50년도 더 오랫동안 그리했을 것이다.
천강이 50년 전 그들의 야욕을 저지했었으니까.
그에 천강은 간단한 방법을 썼다.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 아주 간단한 계략을.
'굶고 굶다 음식을 입에 대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주위를 안 쳐다보는 법이지.'
아미파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순간, 천강의 신형이 검은 안개에 뒤덮이고 적진을 향해 매섭게 파고들었다.
"하핫. 어디 한 번 놀아보자꾸……."
"커헉……."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단말마. 그러나 적들은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그들은 서로가 일시적으로 맺은 동맹일 뿐, 같은 문파 내에서조차 후에 이권을 놓고 다퉈야 할 경쟁 상대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적들의 형세만 신경을 썼고, 그들의 뒤에서부터 접근하는 검은 사신은 일체 간과하고 말았다.
다만 천강 또한 살짝 계산상의 착오는 있었다.
하루 새에 두 배 이상 불어난 배신자들로 인해 아미파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뭐 그래 본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오늘 이곳에 모인 배신자들은 단 한 놈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아미파는 순식간에 점거됐다. 애초에 불교 문파인 데다가 대부분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다.
침략자들보다 적은 수로, 그것도 현경 고수가 셋이나 끼어 있는 이들을 저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2장로. 네, 네가 어찌……!"
"이 모든 게 다 사문의 발전을 위한 것. 편히 가십시오."
아미파 배신자들이 장문인을 정리하고 나오자, 다른 모든 곳은 이미 다 끝난 듯 온 산이 고요했다.
그에 하나둘 모여드나, 눈에 띄게 줄어든 숫자에 청성파의 1장로 청명적풍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잠깐. 다들 모여 보시오. 우리 측 숫자가 상당히 줄어든 것 같소이다."
"보나 마나 안 보이는 곳에서 그 짓 하느라 그런 거겠지."
혈도를 짚어 꼼짝 못 하는 아미파 일원들을 마치 쌀가마 쌓아 올리듯 올리며 색귀가 말했다.
그는 마치 보란 듯이 자신의 사냥감으로 탑을 쌓고는 낄낄거렸다.
그 행태가 마음에 안 드는 아미파 배신자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안타깝게도 그들로서는 그를 혼내줄 힘이 없었다.
괜히 잘못 나섰다가는 저 수집품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리라.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수 또한 의아함을 드러냈다.
"나 또한 청명적풍의 말씀에 동의하는 바이오. 지금 주변에 느껴지는 기운이라 봐야 백여 개에 불과하오. 그 많은 수가 이리 순식간에 사라질 순 없는 것인데."
"각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사를 치르고 있을 거라니까. 끌끌."
그러나 청성파와 당가의 두 장로는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갑작스레 참전한 색귀와는 달리, 그들은 오랜 기간 서로를 지켜봐 왔다. 그저 여자의 몸에 혹해 다음 있을 대의를 망치는 그런 짓을 할 자들이 아니었다.
- 뭔가 있소.
- 내 생각도 같소이다.
그 순간 청명적풍의 기감에 한 사람의 기운이 훅 사그라들고, 곧바로 그곳으로 튀어 나가는 그의 신형.
"……."
"무슨 일이오?"
"보시오."
그들 앞으로 한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청성파 사람이었는데, 머리와 몸통이 분리돼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화경인데 단 일격에 당했소이다. 허공에서 급습을 한 듯한데……."
시체의 뒤쪽은 가파른 절벽이었다.
두 사람은 급히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까보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쉰둘이군."
"바깥으로 느껴지는 기운은?"
"스물하나. 자, 잠깐. 방금 하나가 사라졌소. 방금 또."
독수의 말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기감을 넓게 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사방에서 기운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때는 동쪽, 그 뒤 순간적으로 서쪽. 남쪽에서 죽었다가 북쪽에서 또 죽고.
"저, 정보가 샌 것 아니오?"
무리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일리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적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아미산 사방에서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청명적풍?"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청성파의 1장로에게로 향했다. 현경의 실력자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사천의 배신자들을 규합하고 이끈 이가 바로 그였던 탓이다.
그러나 청명적풍으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
'어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이는 마치 괴력난신과 같지 아니한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아미파 여인들로 9층 탑을 두 개나 세운 색귀가 한마디 했다.
"청성파의 장로라 했나? 뭘 걱정하나. 무림에선 힘이 센 놈이 장땡인데."
"그게 무슨……."
"아무렴 자네나 나나 거 독 쓰는 이까지 하면 도합 현경이 셋인데, 무엇이 걱정이냔 말일세."
그랬다. 지금 이곳엔 현경이 셋, 화경은 무려 아홉이나 있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문파 하나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
"아무튼 어느 놈인지는 몰라도 참 똑똑한 새끼로구먼. 아마 녀석의 계획은 우리가 이곳에서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그 말씀은."
"우리가 다 같이 모여 하산을 시작하면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낼 거란 뜻이네."
독수와 청명적풍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안을 한 이가 비록 변태 노인이긴 해도 충분히 합리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에 무리를 이끌고 아미산을 내려가는데…….
스슷- 스스슷-
매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때마다 뒤쪽에 있던 자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움직임이 빠른지, 현경의 고수인 그들이 어찌 손을 써보려 해도 순식간에 낚아채 갔다.
결국 채 200보도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게 되었다.
"자, 장로님. 제발 저희 좀 지켜주십시오."
어느새 이십으로 줄어든 인원.
같은 청성파 일원들의 절박한 얼굴에 청명적풍의 수심이 깊어졌다.
독수가 그런 그에게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 이미 거사는 실패했소. 이대로라면 아미산을 벗어날 때쯤엔 우리 셋만 남을 것이오.
그 셋이란 현경급 고수들이다.
- 그 말은 저들을 버리잔 말이오?
- 우리 자신도 확신할 수 없소. 사람인지 그 외의 것인지는 모르오나, 보통 움직임이 아니오. 저들을 희생양 삼아 우리가 살 수 있다면 도리어 다행일 것이오.
청명적풍의 시선이 독수와 색귀에게 가 닿았다.
독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색귀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고민은 깊었으나 선택을 하고 나니 행동은 바로 나왔다.
"1장로님?"
"거사는 실패다. 지금부터 각자 생존하도록 한다."
"그 무슨 말이오! 우리 아미파를 이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아미파의 2장로와 일대제자 둘이 나와 항의를 했다. 그러나 이마에서 피를 쏟아 내고는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아미파의 장로.
색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추가로 수집품을 챙긴 그가 자신의 것이 떨어지지 않게 끈으로 잘 동여매며 말했다.
"뭐 불만 있으면 지금 나오시게. 내 직접 저승의 문턱으로 보내줄 터이니. 끌끌."
사람들이 주춤주춤 색귀에게서 물러난다. 노인은 스무 개로 늘어난 수집품을 잘 챙겨 들고는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어서들 가세나."
"장로님!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1장로님!"
청명적풍과 독수, 색귀 세 사람이 빠르게 밑으로 발을 놀렸다. 조금 있자 그들 귓가로 남겨진 사람들의 비명과 원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