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9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98화
198화. 와전
온통 붉고 노란 등이 그득한 거리.
코끝으로는 꽃향기가, 귓가로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맴도는 곳.
사천의 유곽 거리를 찬찬히 걷는 천수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이네. 이곳도."
한때는 늘 이곳을 오고 갔었는데 말이야.
흑살마신이 이곳에 오랜 기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1년에 한두 번 발길이 닿을 때만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장에, 남자들을 상대하던 여인들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황금빛 머리에 푸른 눈.
이곳을 드나드는 색목인 여인이란 오로지 그녀뿐이란 걸 잘 알기에.
"안녕하세요, 천수향님."
"그간 강녕하셨나요?"
원래 사천의 유곽은 기녀들에게 있어서 제일 끔찍한 곳 중 하나였다.
험한 산지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름난 유명 문파들이 여럿 자리한 탓에 무인들이 많아서인지 손님들이 하나같이 험악했다.
심할 때는 남자 손님 열 명을 받기도 전, 맞아서 죽어 나가는 여인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수향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게 된 이후로는 무림인들이 이곳에서 함부로 설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녀는 남자 무인이 힘 좀 있다고 여자를 막 다루는 꼴을 조금도 보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가가 사천에서 권력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이곳 유곽 거리에서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부분도 다소 있었다.
천수향이 유곽의 중심 홍루의 문지방을 넘어 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인지 루주와 여인들이 후다닥 그녀에게 나아와 예를 차렸다.
"홍랑님. 어서 오세요. 간만에 오셨네요."
"다들 오랜만. 미오왕은?"
"요새 일로 바쁘신가 봐요."
"그래? 아쉽네. 같이 차라도 한잔하나 했는데."
"제가 따라 드릴까요?"
천수향이 손을 저었다.
"아냐, 됐어. 그보다…… 혹시 흑살마신 이곳에 안 왔어?"
"아……."
오랜 기간 천수향은 이곳에 나타날 때마다 흑살마신에 대해 묻곤 했다.
루주인 소선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랬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미오왕의 아이들은 흑살마신에 대해 말로만 전해 들었던 터라, 하루 내내 같이 있고도 동일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루주가 고개를 저었다.
"예. 저번에 마교에서 흑살마신을 죽일 자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긴 했었는데…… 이미 그 소식은 들으셨겠죠?"
"어. 바로 뛰어갔는데,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네."
"죄송합니다. 그 이후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루주의 행태에 천수향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번에도 한발 늦었나.'
과거에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잠적하는 덴 탁월했던 인간이다.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빠르고.
무진 일행의 두 여인을 떠올린 그녀는 천강이 충분히 잠적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해 이미 놓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동안은 그 꼬맹이들을 따라다니는 수밖에.
"아냐. 네가 죄송할 이유는 없지. 만약 비슷한 인간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바로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천수향이 손을 한 번 들어 올리고는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지 약 일각(一刻) 정도 지났을까. 천강이 옷을 털며 누각 1층에 들어섰다.
"어멋. 우리 영웅호걸님 어디 다녀오세요?"
"잠깐 볼일 좀 보고 왔어. 별일 없었지?"
"예. 뭐 사해단이 그 꼴이 났으니 다들 조용히 술 먹고 있는 중이지요. 호호호."
"잘됐네. 그럼 난 이만 쉬러 간다."
천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쩐지 그 행태가 조금 전 천수향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
루주가 한 차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약속을 지켜주셨으니, 응당 저도 그 보답을 해드려야겠지요."
"오. 역시 계산은 확실하네. 근데 돈은 받겠지?"
"가게 운영은 해야 하니까요. 공짜로 운영했다간 언제 망해 사라질지 저도 모른답니다."
하여튼 사람 하나는 진짜 잘 세웠네.
한 차례 작게 웃은 천강이 금원보 하나를 던져 주었다. 여인이 그걸 받아 능숙하게 품에 넣었다.
"정보료가 부족해지면 바로 말하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후훗.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소선이 천강의 팔짱을 끼고는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문단속을 단단히 한 그녀는 천강에게 차를 내주며 여러 정보들을 일러주었다. 그중엔 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것도 있었다.
바로 이런 것.
"뭐? 마교의 습격?"
"예. 마교의 대대적인 습격이 시작됐고, 그로 인해 모든 문파의 장문인들이 다 무림맹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출발하고 있어요."
이건 뭔 뜬금없는 소리야.
"확실해?"
그러나 루주의 다음 말을 들은 천강은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9할 이상 되는 신뢰도예요. 현재 무림맹에 있는 자가 직접 건네준 정보니까요. 듣기로는 마교가 곤륜을 습격해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내 얘긴가?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곤 곤륜의 장문인과 막 입적한 다섯 제자뿐이라고."
내 얘기네.
참네. 그게 이런 식으로 와전이 됐을 줄이야.
과거처럼 시끄럽게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그때,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잠깐. 그러면 오히려 잘 됐군. 배신자 녀석들이 아주 신이 났겠는데?'
사실 천강이 투파창귀의 이름을 팔아 아미산에 모이라 제안했지만, 분명 안 나타날 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면 일이 달라진다.
'장문인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어. 이건 누가 봐도 기회란 말이지. 막말로 흑살마신만 잡으면 세 개의 거대 문파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런 좋은 때에 과연 참가를 안 하려 할까? 거사를 성공하고 나면, 두고두고 그날의 일을 이유로 수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그리고 그런 천강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사천의 배신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 모여 현 상황을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들었나? 마교의 습격이라더군."
"아아. 나도 막 전달받았네. 각 문파 수장들이 급히 다 자리를 비웠다지?"
"아무래도 투파창귀가 머리를 쓴 모양이야. 성동격서인 셈이지."
그들은 투파창귀가 곤륜 쪽과 짜고 쳐 그곳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무림맹에 서신을 보낸 거라 판단했다.
그러면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급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무림맹에 모일 것이고, 사천의 문파들은 빈집과 같아 그들이 힘을 합치면 먹어 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마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박질만 한다더니……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이야."
"아무튼 기회군. 흑살마신만 잡으면 아주 손쉬워지겠어."
심지어 사해단의 전멸 소식을 통해 흑살마신의 창끝이 성큼 다가온 걸 느낀 그들은 더더욱 모여야 할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흑살마신이 사해단을 궤멸시켰다는군."
"빨리 처리를 해야겠어. 그날 한 명도 빠짐없이 다들 모이라 하게."
"알겠소."
그렇게 거사 일은 성큼 코앞으로 다가왔고, 사천 내로 의미심장한 기운이 넘실댔다.
***
"자, 가자. 애들아!"
초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사천제일미를 박차고 나갔다.
그 뒤를 세 아이가 따라나서고, 천수향은 가만 그들을 바라보다 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미 홍루에 말을 해놓았으니 흑살마신이 나타나면 연락이 올 것이요, 설령 홍루에서 놓쳐도 저들이 발견한다면 응당 이곳으로 돌아올 터이기 때문이다.
무진 일행은 짐을 이곳에 다 풀어놓고 나간 터였다.
'그럼 난 간만에 조카 얼굴이나 보러 갈까.'
천수향의 신형이 당가 쪽으로 사라졌다.
무진 일행은 사람들에게 물어 홍루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걷던 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유곽 거리 앞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윽. 원래 중원의 여자들은 다 저리 예쁜 거야?"
"아줌마보다 가슴도 큰데……?"
뿐만 아니라 입술은 붉고 피부는 새하얗다.
초아와 연화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도 신선환을 먹고 화경에 도달해 피부색이 좋긴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돌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두 사람.
그 행태에 무진이 볼을 긁적이며 작게 웃는다. 청청이 옆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언니, 저건 화장해서 그런 거예요."
"화장?"
"얼굴을 예쁘장하게 꾸미는 일이요. 중원 쪽 여인들…… 특히,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늘 저런 걸 하고 다닌다고 보면 돼요. 언니랑 연화도 하면 충분히 예뻐지니 기죽지 마세요."
"뭐야. 그런 거야?"
그제야 초아와 연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다시 홍루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무진을 발견하고는 접근하려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환하게 웃으며 살기를 뿜어내는 청청의 기세에 여인들은 화들짝 놀라 도로 도망갔다.
그렇게 도착한 홍루 내부.
앞의 호수에선 뱃놀이가 이루어지고, 그 뒤 누각에서는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 개에 해당하는 오색 빛깔의 등불은 덤.
그 화려함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이런 데서 상주하고 있단 말이지? 멀쩡한 지부의 공짜 방은 놔두고, 사비까지 써가며?"
초아가 분노해 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 옆에서 연화는 이미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의 멱을 잡아 올리고는 낮게 윽박질렀다.
"너 천강 알아?"
"예, 예?"
"천강 아냐고!"
"모, 모릅니다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셔……."
초아가 연화를 보고 질세라 합류한다. 곧 홍루는 상의가 찢어진 남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청청이 그런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느 세월에 찾으시려고요. 이러다 해 뜨겠어요."
"오. 청청. 뭔가 좋은 방법이 있는 거야?"
"정말? 어서 말해줘, 청청! 우리 친구잖아!"
초아와 연화가 달라붙자 청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전에…… 이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혹시 천강님이 두 분 좋아하시나요?"
"당연하지. 나랑 수차례 약조했는걸?"
"응. 시집 못 가면 데려가 준다고 했어."
"그럼 그냥 크게 소리치세요. 우리가 왔다 하고요. 두 분이 여기 계신 걸 알면 천강님께서도 기쁘게 나타나실 겁니다."
초아와 연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천강! 어디 있어어어어어!"
"나 왔다아아아아!"
어찌나 큰지 음악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와 닿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고, 그로 인해 경비들이 달려와 막는데도 소용없었다.
내력까지 실어 내지르는 일격에 그들은 도리어 귀를 막고는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그 모습에 무진이 청청의 팔을 툭 건드렸다.
"왜 그런 거야?"
"후훗. 재미있잖아."
"……."
초아와 연화는 무려 일각(一刻)가량을 소리를 질러댔고, 홍루의 루주인 소선이 나선 뒤에야 사태가 수습될 수 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아니라 그 옆으로 함께 나타난 암룡을 보고 행동을 멈춘 거지만.
"어? 언니?"
[ 초아, 오랜만. ]
암룡이 반갑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작은 움직임이 일고, 이내 빛 한 자락이 암실로 침범했다.
그곳 중앙엔 기다란 선반과 함께 금침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와 주변엔 피로 얼룩진 면포가 그득했다.
흑귀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다 끝났습니다, 태감(太監). 기분이 어떠신지요?"
"……묘하군. 지금 내 신체는 어느 정도지?"
"상승무공에 해당하는 내가중수에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고, 외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신교의 신검에 베인다 한들, 잔 상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태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수고했다, 흑귀."
"예. 그럼 저는 이제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돌아가 좀 쉬고, 화경급 사신들을 양산하는 데 집중해라. 중원의 협력자들이 원하면 언제든 적극적으로 지원을 보내고."
흑귀가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환관 마섬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별일은 없었느냐?"
"예. 아, 태감께서 여기 계시는 동안 사자왕(死者王)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 하더냐."
"준비가 다 끝났고, 소문도 충분히 흘렸답니다. 늦어도 십일 이내에는 중원 전체에 퍼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태감이 문 쪽을 고갯짓했다.
"지금 당장 흑귀에게 가서 전해라. 그쪽에 사신을 다수 보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