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3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32화
232화. 화산의 새 주인
'끝났네.'
한사의 마지막 검격을 본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그에게 자하신공의 실마리를 건네준 건 천강이었다.
과거 천산의 보고에 있을 시절 우연히 읽은 자하신공의 비급. 그걸 한사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미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대부분을 이해한 천강에게 그 일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솔직히 걱정은 좀 했는데 말이야.'
실마리를 너무 적게 알려준 건 아닌가 하여.
그러나 이렇게 본즉 충분해 보였다.
화산인들은 밥을 먹을 때도, 볼일을 볼 때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매화에 대해 생각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심판과 심사관들은 싸움을 끝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금방 나왔다.
진소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승자는 화산의 이대제자 한사요!"
우와아아아-
마치 화산의 부활을 축하하듯, 모인 모든 관중들이 크게 소리 높여 화산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
자욱이 내려앉은 어둠 속, 달빛이 비치는 물가를 바라보며 진소가 회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화산에 입적한 한사라 하옵니다.
- 사형. 왜 제게 갑자기 모질게 대하시는 건가요?
- 억울합니다! 제가 어찌 스승의 묘를 파헤친단 말입니까! 제가 무고하다는 거 사형께선 아시지 않소이까!
- 사형. 사형!
화산파 일대제자 진소.
한사 스승의 묘를 파헤치도록 지시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외부의 인부들에게 묘를 파헤치고 그 물건을 빼가도록 해주었고, 이후엔 그들을 죽여 은밀히 입막음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질투심에 휘둘리긴 했어도 그는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도사이자 무인이기에.
그런 그가 한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한 건, 장문인이 한사를 높이 평가한 탓이었다.
- 한사가 장문인이 되었을 때가 기대되는구나. 선인들께서 우리 화산을 불쌍히 여기시어 보내주신 인재가 틀림없다!
- 스승님. 아직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 내 어찌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 같은 경사에! 맹렬한 태풍이 몰아치고 세상이 움츠릴지라도, 자색의 불길은 꼿꼿이 서 피어오르리로다! 하하핫!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승의 만개한 웃음.
결국 그의 스승은 한사를 직계 제자로 들이려 하니, 진소는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동기들은 사제였던 한사가 장문인이 된다는 것에 말이 안 된다며 응하였고, 그 밑으로는 사형들이 무서워 따른 게 지금의 결과였다.
즉, 모든 일의 시작은 진소 그 자신이 한사를 시기해 벌어진 일.
냇가에 비친 달을 가만 바라보던 진소가 몸을 뒤로 돌렸다. 그의 앞으로는 한사가 서 있었다.
"오늘 제법이더구나."
"사형 또한 대단하였소. 쾌(快)와 환(幻)밖에 없는 우리 화산에서 강(剛)의 검을 만든 건 아마 사형이 유일할 것이외다. 아마 오늘 사람들은 우리 화산을 한층 높게 평가했을 것이오. 더는 강검에 취약하단 말도 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늘 그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화산은 죽었다 깨어나도 남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북팽가나 남궁 같은 강검에 너무도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제왕검형보다도 더 강렬한 강검조차 이겨내는 극쾌의 검을.
진소의 얼굴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허탈함이 올라왔다.
"결국 자하신공을 깨우쳤더구나. 역시 하늘이 내린 기재인가. 우리 모두가 이루지 못한 걸 홀로 이루어 내다니."
장문인을 포함해 화산인 모두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도 성공해내지 못한 일이다.
그들 세대뿐만 아니라, 무려 이백 년에 걸쳐 선인들조차 이루지 못한 것.
그걸 겨우 혼자서 해냈다.
그 사실이 대견하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으로 피어오르는 자격지심은 아직 그 자신이 수련이 덜된 것인지도 몰랐다.
'자고로 도사란 외적인 힘보다도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하거늘.'
……난 아직도 멀었구나.
그런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를 수그리는데, 그런 그에게로 한사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아니오.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외다."
"응?"
"5년 전 사형은 내게 마지막 구결을 가르쳐주었었소. 난 그때 배운 것들을 토씨 하나 잊지 않았고, 그 가르침이 뿌리를 내려 이제야 매화를 피워낸 것이오. 이것은 사형과 내가 함께 일군 것이외다."
자하신공의 그 원초적인 원리는 이십사수매화검법 전체에 녹아있다. 그 모든 원리를 이해해 심공으로 전환하는 게 바로 자하신공인 것이다.
즉 자하신공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마치 한 몸과 같은 것으로, 자하신공을 익힌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그걸 아는 화산인들은 어떻게든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이백 년간 끝없이 노력한 것이었고.
진소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사야. 넌 날 끝까지 부끄럽게 하는구나. 그거 아느냐? 네 스승의 묘는 내가 그리하라 한 것이다. 네 눈앞의 선 난 너의 원수와 다름없다."
"그런? 어째서……."
처음이 어려웠을 뿐, 한 번 입을 열자 그 이후로는 술술 막힘없이 말이 나왔다.
"난 네게 내 자리를 뺏길까 두려웠다. 나에 대한 스승님의 관심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벌인 일이다."
그러며 그날의 일을 낱낱이 설명하는 진소.
모든 진실이 다 드러났음에도 한사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쩌면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일 수도 있으리라. 문득 그런 생각이 진소의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굳게 닫혀 있던 한사의 입이 움직였다.
"왜 그러셨소. 사형이 굳이 나를 모함하지 않았더라도 장문인께선 사형을 장문인으로 뽑았을 것이오. 장문인께선 실력보다도 전통을 중시하시니 말이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장문인의 뜻을 따랐을 것이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진소 사형이 밉소……. 처음이오. 진소 사형이 이리 미운 것은……."
"정말 미안하다."
한사가 진소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소는 한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한사의 입이 움직였다.
"그래도 아직 난 사형이 좋소. 화산도 연화봉도 좋고, 사형들과 동기들, 사제들도 좋소. 그래서 사형의 사과를 받아들일까 하오."
"너……."
"내가 원하는 건 화산의 부흥이오. 내가 바라볼 건 지나간 과거가 아닌, 앞으로 우리 화산이 나아갈 길이오. 그리고 그 길은 나 혼자 가지 못하오."
한사가 슥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주시겠소, 사형?"
"난 네가 어릴 적 알던 사형이 아니다. 그때와 달리 너무 많이 변하고 말았다."
"아니, 사형은 여전히 그때의 그 사형이오. 마음이 너무 여려 인간적인 고뇌에 늘 시달리는, 스스로를 늘 자책하는 미련한 사형."
그렇기에 위패 앞에 무릎을 꿇은 장문인을 볼 때마다 더욱 스스로를 매질한 것이리라.
어린 한사를 죽여 해결할 수 있음에도, 그냥 밖으로 쫓아낸 것 또한 그러한 맥락일 것이리라.
어제 자신을 찾아와 기권을 요구한 것 또한 마찬가지. 분명 죽일 수도 있었으나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러했다.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시선이 줄곧 땅으로 향해 있는 것도.
"사형, 나 손이 무겁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진소가 한사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하나만 묻자, 한사야. 아직 내 검에는 매화의 향이 남아 있느냐?"
화산의 부흥을 꿈꾼 어리석은 사내는 외부인에게 그 조언을 구했다. 그리 만들어진 매화만리향이 오늘 시합에서 쓴 바로 그 무공이었다.
부흥을 위해 황실과 손을 잡은 진소.
추위를 이겨내고 핀 매화는 절개를 상징한다. 어쩌면 그걸 버린 자신은 이미 매화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사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사형. 아주 진하게 남아 있소. 내 가슴에, 그리고 사형의 가슴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소."
화산인들은 입문해 죽는 순간까지 매화를 떠올린다. 늘 그것을 마음에 품고 협을 행하며 산다.
한사의 확고한 대답에 진소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러느냐? 하핫. 됐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러면서 진소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진실을 말해주었다. 황실, 마교와 있었던 협업과 현 무림의 돌아가는 상황을.
한사의 눈은 크게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슨 현재 용봉지회를 개최한 무림맹은 완전 헛다리를 짚고 있단 뜻 아닌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잘 듣거라. 지금 무림은 위험하다. 황실이 무림을 불구덩이에 던지려 하고 있다. 연화봉의 매화 또한 그것에 포함된다."
진소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인물이다.
친근하게 다가왔으나 태감(太監)의 속내가 시커먼 것을 그는 곧장 알 수 있었다.
태감은 그저 진소의 의중을 띄워보려 지나가듯 한두 번 물어본 것에 불과하지만, 진소는 그 가벼운 질문 속에 진심이 숨어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한사야. 화산을 지켜다오. 내 야욕으로 탄내만이 가득한 이 화산을 다시 매화로 뒤덮어다오."
"왜 그런 소리를 하시오. 마치 떠날 사람처럼."
"네가 미덥지 못해 하는 말이다. 너는 어수룩해 겉으로 다 티 나지 않느냐."
그제야 한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꼭 명심하겠소이다."
"그래. 그럼 애들에게 가자."
진소가 모든 화산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나직이 선포했다.
"차기 장문인이자 이곳의 최고 지휘자로서 명한다. 한사의 화산귀환을 명하노라."
적막이 일었다.
그러나 찰나일 뿐, 이내 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화산인들이 한사에게 다가가 그동안의 일을 사과하고 다시 동문이 된 것을 축하했다.
***
축시(丑時). 모두가 곤히 잠드는 시간.
어둠 속을 은밀히 움직이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빠르게 발을 놀려, 이내 냇가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무리.
"오래 기다렸소이까?"
"아니올시다. 우리도 이제 막 도착했소이다."
남궁의 십검 중 하나인 남궁산이 손을 내밀었다. 진소가 그 손을 맞잡았다.
"진소. 우리의 제안에 응해준 것에 감사하오."
"별말씀을. 우리는 다 한 식구 아니오?"
"그럼 사정이 급한 관계로 우리 쪽 일부터 해결하도록 합시다."
일이란 바로 남궁선을 암살하는 작업이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자청옥검은 자신의 수족을 전부 사용해 남궁선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까 하여 같은 배신자 무리인 화산 쪽에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리해준다면 나중에 화산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약조를 하며.
"우리가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으나 지금 남궁선에겐 그림자들이 붙어 있소. 아마 전력으로 임해야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외다."
"그렇군. 그럼 앞장서시오."
남궁산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길을 인도하려는 순간, 푹. 그의 가슴팍에서 웬 날붙이가 튀어나와 붉은 액체를 허공에 흩뿌렸다.
"큿. 이런 미친…… 대체 왜?!"
의아함을 가지고 고개를 돌리는 남궁산의 눈에 곳곳에서 싸우는 두 무리가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화산이 열세이나, 전혀 예상치 못한 급습과 죽음을 불사하는 저돌적인 움직임에 남궁의 사람들은 빠르게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진소가 검을 빼, 그 목을 치고는 전장에 합류했다.
"이것은 우리 화산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
여명의 태양이 밝아온다.
하늘의 어둠이 걷히고, 처음에는 은은한 빛이 점차 불그스름해져 온 세상을 뒤덮는다.
숭산으로부터 반 시진 떨어진 냇가에도 그 따스한 기운이 닿았다.
쓰러져 미동하지 않는 이백여 무리의 사체. 그 위에 내려앉아 식은 육신을 달구는 태양의 덧없는 행동을 가만 바라보던 천강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러나 팔다리가 하나씩 없고 환부가 너무 많아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내에게 다가가 섰다.
천강의 발소리에, 그가 입으로 피를 한 움큼 흘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쿨럭쿨럭. 왔소이까. 일합무신…… 아니, 흑살마신이여."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그렇소. 배신자들 중 왜 남궁과 우리만 살려놓았는지 추론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무슨 연이 닿은 건지는 모르나, 그가 남궁선과 한사를 챙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 양측의 일이 모두 해결되면 그땐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 자신들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왜 이랬지? 이러면 내가 혹여나 너희들을 살려줄 거라 생각한 건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일종의 자기반성 같은 건가? 그동안의 일을 후회하며?"
다시금 고개를 젓는 사내. 그가 밝게 비춰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썩은 나무는 비록 단명할지라도 거름으로는 쓸 수 있소. 오늘 우리들의 죽음으로, 화산에 올곧은 매화나무가 피어나기를 소망할 뿐이오."
사내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 눈에는 어제 시합장에서 보았던 자색의 매화가 아른거렸다.
"맹렬한 태풍이 몰아치고 세상이 움츠릴지라도…… 자색의 불길은 꼿꼿이 서 피어오르리로다……."
그날 화산의 배신자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화산으로 돌아가던 장문인이 의문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소식이 전달된 건 그 직후였다.
화산이 습격을 받아 몰살당했다는 소식 또한.
짙은 애도의 물결 속에 화산인들은 한 사람을 장문인으로 추대하고, 한사는 화산을 이끌 새 장문인이 되었다.
그렇게 화산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