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2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25화
225화. 떡밥
예선전을 통과 확정받고 나가는데 한 목소리가 천강을 불러 세웠다. 당묘오였다.
"천 대협?"
"무슨 일입니까?"
"예선전도 일찍 끝났고 하니, 저희랑 같이 식사 어떠신가요?"
"미안합니다. 선약이 있어서."
물론 거짓말이다. 왠지 이 집안 여인들하고는 엮이기 싫어 댄 핑계였다.
그 대답에 당소여가 입을 삐죽 내밀고 당묘오가 흐응 콧소리를 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몸을 돌리는데, 아이 씨 깜짝이야.
"언제 왔어?"
"아까."
천수향이 천강 뒤에 서 있었다. 그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올라와 있는 걸 보니, 천강이 선약 있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근데 미안하지만 그 선약이 널 지칭하는 것도 아니거든?
"들었지? 나랑 선약이 있어서 안 돼."
"그러지 말고 언니까지 껴서 다 같이 하자. 모처럼 가족끼리."
가족이라는 말에 살짝 흔들렸으나 천수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길을 가는데 당묘오가 그 딸을 데리고 옆으로 바짝 붙으며 말했다.
"근데 언니. 천 대협 말이야."
"우리 이이가 왜?"
"형부로 들이기엔 너무 젊은 거 아냐? 어때. 조카에게 양보하는 건?"
"……뒈질래?"
"어멋. 그건 긍정의 의미?"
천수향이 독침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제 딸을 데리고 후다닥 다른 길로 피신했다.
"정말이지…… 이놈의 집안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게.
"근데 갑자기 뭔 일이야?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내가 바로 돌아갈 텐데."
천수향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천강에게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 아까 내가 하오문에서 소식 하나를 접했는데.
- 소식?
- 모용세가와 황보세가의 본가가 의문의 습격을 받았고, 그곳에 남아있던 모두가 전멸했대.
"뭐?"
그저 그런 작은 문파도 아니고, 무려 세가인 모용과 황보가?
-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말을 하는 천수향의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나 그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 그날 우연히 밤길을 걷다 황보세가로 들어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봤는데, 하나같이 내기가 전혀 안 느껴졌다는 거야. 마치 죽은 자들처럼. 그런데 웃긴 건 모두 검강을 사용할 줄 알았다는 거지.
검강은 화경을 상징하는 기술이다.
그 이야기는 마교에서 설치던 사신들이 이젠 화경이 되어 중원을 누비고 있단 뜻이었다.
태감(太監) 녀석, 결국 노리는 게 이거였나?
"천강. 어떻게 할 거야?"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생각."
"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오히려 가만 기다려야 한다. 각 문파 전체가 궁지에 몰려 하나로 똘똘 뭉칠 때까지.
가만 지켜보면 아직까지 서로 간의 알력 싸움이 알게 모르게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 예선전 때 소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은연중에 제갈세가 쪽을 건들고, 사천당가를 건들고.
'그런 식의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태감 쪽을 이길 수 없지.'
아주 조급해야 한다. 진짜로 생사가 걸릴 정도로.
그러자 걱정을 드러내는 천수향.
"너무 늦으면 싸울 인력조차 없을지도 몰라."
"걱정 마. 아미산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도록 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하오문이라고?"
천수향이 하오문 문주 모가지를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암룡을 통해 전달받았던 천강은 그녀에게 솔직히 이야기했다.
현재 중원 돌아가는 상황을.
"그러니까 개방은 황실에 홀라당 넘어갔고, 정보 조직 중 쓸 만한 곳은 하오문밖에 없다는 거야?"
"맞아. 그래서 그런데, 하오문에서 신선환 제조소를 좀 찾아 달라 하면 안 되나? 아무래도 마교 쪽 인력으로는 턱도 없어 보이더라고."
안 그래도 중원 쪽엔 정보원이 부족한 마교인데, 여울나무 사건 이후로 그 수마저 9할 이상이 증발해 버렸다.
사실상 현재 마교로서는 신선환 제조소는커녕 지역 재장악부터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후훗. 알았어. 누구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그럼 난 바로 하오문 쪽에 들렀다가 올게. 천강 넌 애들한테 가 있어."
역시 행동력 하나는 칼 같은 홍랑이다.
그녀가 바람같이 사라지고, 천강도 잠깐 생각을 하다 마교 지부로 향했다. 그리고는 서신을 하나 작성해 소운에게 건넸다.
"이거. 마교에 있는 무영삼귀 중 일귀에게 보내면 돼."
"급한 거야?"
"급한 건 아니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그럼 씨는 충분히 뿌리고 다녔으니, 어디 그 결과를 좀 볼까?
***
달이 중천에 떠오르는 늦은 밤.
용봉지회가 열리는 도시마다 저잣거리에선 야시장과 축제가 열렸다.
거리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음악 소리가 하늘 위로 퍼지고. 여자들은 간식거리를 먹으며 담소를, 남자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올해 용봉의 칭호를 받는 이가 누구일지 각자 주장을 펼쳤다.
"아무렴 올해는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존이 가장 먼저 용을 차지하지 않겠나?"
"아아. 나도 들었네. 가주와 그 뒤를 이을 후계만 배운다던 제왕검형을 벌써 거의 다 익혔다지?"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은 일반인들조차 알 만큼 유명한 무공이다. 그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그 상대를 찾기가 매우 힘들 것이리라.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데도 피하지를 못한다고 들었소."
"그뿐인가? 막기는 더 어렵다네."
그때 한 사내가 이야기한다.
"이번에 화산파의 진소라는 인물도 꽤 뛰어나다던데."
"아아. 그 과거의 명예를 되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근데 거긴 자하신공이 실전된 지 오래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십사수매화검법만으로는 힘들다 봐야겠지."
오래전 마교의 침공이 있었다. 제7차 정마대전이라 불리는 그 싸움은 중원 무림의 7할이 명을 달리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당시 무림을 이끄는 건 화산이었는데, 그래서일까. 그들은 마교를 막아내는 데 성공은 하였으나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이라고는 고작 일대제자 하나와 삼대제자 둘뿐.
그들은 그 싸움에서 자하신공의 비급을 잃어버렸고, 그나마 무공을 다 익힌 일대제자 하나가 있어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화산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화산은 아직까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그 소식 들었는가? 오늘 예선전?"
예선전 이야기가 나오자 남자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모두가 들은 것이다. 예선전에 신예가 나타났는데 보통 괴물이 아니라고.
"일단 봉(鳳)은 사천당가의 당소여가 첫 번째로 확실하고, 어쩌면 용(龍)조차도 예선에서 1등 한 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더군."
"소림사를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 일각(一刻)도 안 걸렸다지?"
"너무도 믿을 수 없는 기록에 소림 쪽에서 한참을 소리를 높였다고 들었네."
"크으. 올해 용봉지회가 너무 기대되는군!"
술을 기울이는 곳마다 모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행태에 거리를 거니는 천강은 머리를 덮은 쓰개를 더욱 여몄다.
- 음? 소년이 부끄러움 타는 건 처음 보네요.
'그런 거 아냐. 일에 방해될까 봐 그런 거지.'
야시장을 지나 도시 밖 빛이 안 닿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물가 근처에 다다르자, 기척을 죽이고 따라오던 수십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 천강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빼 들고는 천강에게 찬찬히 다가왔다.
"아무리 이곳에 큰 행사가 있다손 쳐도, 혼자 밤길을 돌아다니면 안 되지?"
"아이야. 촌에서 온 모양인가 본데 다음부터는 꼭 사람들과 함께 다녀라. 아니면 어느 객지에서 칼 맞아 죽을지 모른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천강의 물음에 그들이 낄낄거리며 달려들었다.
"도적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네 목숨 빼고 전부지!"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일개 도적 수준이 아니었다. 무기에 검기와 검강이 어려 천강을 향해 매섭게 짓쳐들어왔다.
"화경급 도적이라.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해야지."
"죽어랏!"
천강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간다. 흑색 절굿공이를 빼 들고, 세 명의 검을 흘린 천강이 이내 몽둥이를 휘둘렀다.
훙. 몽둥이질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십여 명의 적들. 그로 인해 복면이 찢겨 날아가며 그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중들 중엔 물욕에 정신이 나가 땡중이 된 이들도 있다더니, 이젠 소림의 중들께서 도적질을 다 하시네."
그때 천강의 사각지대에서 쏜살같이 나아와 권(拳)을 지르는 적. 천강이 그 손을 맞잡고는 미소 지었다.
"황보세가의 고수도 계시고. 이 정도면 장로는 되겠는데."
팟. 남자가 천강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벗어난다. 쓰러졌던 적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오. 합공을 해야 할 듯싶소."
"그럼 힘을 합쳐 놈을 죽인 뒤,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가만 보니 내기도 별로 안 느껴지고 내공도 안 쓰는 걸로 보면 외공 고수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중수 위주로 노려야겠군."
에워싼 무리의 분위기가 날 선 검과 같다.
천강이 보통이 아니란 걸 확인한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진지한 자세로 싸움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길 잠시, 신병이기들 왈.
- 외곽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다 처리했느니라.
- 남쪽도 다 처리했습니다.
- 동쪽도요.
달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밤하늘. 사방에 흩어져 목격자들을 다 처리한 신병이기들의 보고가 이어지고, 이내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좋아. 그럼 이제 제대로 싸워볼까."
천강이 말을 뱉자마자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들었다. 천강의 신형이 검은 도포 자락으로 뒤덮이고, 어둠에 완전히 동화돼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 어디로 갔지?"
"이런. 내기를 사용 못 하는 게 아니었나?!"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러나 곧 엄청난 폭음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이쪽이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머리가 산산이 으깨진 하나의 시체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쿠구구구.
땅이 작게 흔들린다. 그것은 쉼 없이 사방에서 연이어 이루어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무리가 정신을 차리고는 서로 등을 맞댈 즈음에는 그 수가 채 열이 되지 않았다.
"우, 우리가 잘못 생각했소. 아무래도 야차를 건든 모양이외다."
"이런 우라질!"
"젠장. 욕심에 눈이 멀어……."
"네놈 정체가 뭐냐!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귀신같은 몸놀림을 부릴 수 있는 것이냐!"
"궁금해?"
그 목소리는 그들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서로 등을 대고 빙 두르느라 한가운데 생긴 빈 공간에서.
"어, 어느 틈에?!"
재빨리 몸을 돌리나 천강의 몽둥이가 더 빨랐고, 직감적으로 허리를 숙인 소림사 한 명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꽤 낯이 익은 이였다.
"여어. 이게 누구야. 오늘 아침에 나한테 빽빽 소리를 질러댄 분 아니신가?"
그랬다. 머리가 터지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는, 아침에 예선전을 주관했던 소림사의 2장로였다.
"네, 네놈……."
"정체가 뭐냐고 물어도 안 가르쳐 줄 거야. 왜? 저승 가서도 궁금해 뒈지라고."
"흥. 멍청한 놈. 나는 이렇게 죽지만 네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명문 정파의 인원들을 이리 무참히 죽이다니!"
소림 장로는 확신했다.
화산파 사건을 통해 이미 천강이 몽둥이를 주력으로 쓰는 걸 도시 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시체가 이리 많이 만들어졌으니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천강의 생각은 달랐다.
"미안한데 일부러 그런 거야."
"뭐?"
"일부러 나인 게 티 나게끔 이리 싸운 거라고."
의아해하는 방장에게 천강의 몽둥이가 내려앉았다.
퍽 소리와 함께 소림 장로의 머리가 사라지고, 다른 이들처럼 몸뚱어리만 남아 파들파들 떨어댔다.
"그럼 일도 다 끝났으니 돌아가 볼까?"
도시로 들어설 즈음, 절굿공이의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막야가 궁금하다는 듯 천강에게 물었다.
- 소년, 왜 갑자기 적들이 쳐들어오는 거죠?
최근에 딱히 천강이 뭘 잘못한 적은 없었다. 화산파 사람들이 찾아왔다면 다소 이해가 되지만, 이번 습격에 화산파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별거 아냐.'
천강이 노상에서 꼬치 하나를 사 슥 어깻죽지에 내밀었다. 그러자 탐(貪)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순간적으로 그걸 먹어 치웠다.
꼬챙이까지 남기지 않고 한 번에.
'일일이 잡으러 다니기 귀찮아서 오늘 아침에 떡밥 좀 뿌려놨거든.'
아침에 천강은 일부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잠보의를 들어 보이며 신병이기라 크게 말했었다.
그러면 욕심 많은 이들이 찾아올 것이고, 그 중엔 배신자 무리도 상당수 섞여 있을 거라 확신한 것이다.
'얼마나 좋아.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지들이 알아서 찾아와 줘. 죽일 명분도 줘.'
- 근데 흥미로운 게, 대부분이 배신자 무리네요.
'욕심 때문에 마교와 결탁했을 정도니, 체면이든 치레든 이젠 거침이 없는 것이겠지.'
이후로도 천잠보의를 노리는 이들은 계속 찾아왔다. 딱히 잠을 잘 필요가 없는 천강은 개구리 하나를 잡아 놓고 생사경 훈련을 하며 그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천강은 하룻밤 새에 의심받을 일 하나 없이 합법적으로 배신자 92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