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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21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218화

218화. 용봉지회

 

 

딱한 사연에 천강의 말문이 막혔다.

50년이란 세월을 따라다닌 그 이면엔 단순히 집착 그 이상의 것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세 사람 사이를 무거운 분위기가 짓누르고, 그걸 환기하고자 천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너 왜 이름을 천수향으로 바꾼 거야?"

"아, 그거? 그냥 천강 너하고 성까지 닮으면 좋겠다 싶어서?"

"하아?"

물론 농담이다.

실상은 천수향 그녀가 가문에서 쫓겨날 당시, 노상에서 유명한 도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옛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기를 원했던 그녀는 그에게서 천강과 어울리는 이름을 추천해 달라 하였고, 그렇게 받은 이름이 천수향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천강은 설마하니 천수향이 홍랑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으니까.

알았으면 대화 한마디 해볼 틈도 없이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것이다.

'그럼 이제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풀렸고.'

진짜 궁금한 게 남은 천강의 시선이 자연스레 1장로에게 향했다.

아까부터 이것을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단 말이지.

"근데 약혼은 대체 뭔 소리야?"

"음. 믿으실지 모르겠사오나, 약혼의 사연은 저도 잘 모릅니다."

모른다? 천강이 천수향을 돌아봤다.

아까 반응으로 봐서는 그녀는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버럭 천강에게 화를 내는 여인.

"천강.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우리 일생에 딱 한 번 치른 약혼식인데!"

"아니, 그……."

그러게. 왜 기억이 안 날까.

혹한의 만년설과 같은 한기 서린 눈길에 천강의 벌어진 입은 자동으로 다물어졌다.

사실 천강 입장에서는 기억이 안 날만 했다.

50년 전,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그 당시 천강은 홍루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는 지인을 만나 모처럼 술을 마시게 됐는데, 그걸 목격한 천수향은 지금이 쭉 노려오던 기회라 판단했다.

그에 술에 약을 탔으니…… 전생의 천강은 만독불침이 아니었던 터라 독에 무지 약했고, 약을 들이켜자 이내 헤롱헤롱 거리며 사람들에게 술도 사고 음식도 사고…… 말 그대로 의식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 틈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조촐하게 약혼식을 치른 두 사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천수향도 홧김에 벌인 일에 불과했는데, 그 아비가 대필한 서신 몇 장에 혼례에까지 열을 올리게 된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천강으로서는 그냥 본인이 까먹은 건가 보다 하고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하핫. 미안.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네."

"나중에 홍루 가면 그림 보여줄게. 그때 우리 약혼식에 참여해 그림 그려준 사람이 있거든."

윽. 그림까지 있다니 더 할 말이 없구만.

아무튼 그렇게 1장로와의 대담은 끝이 났다. 오해도 거의 다 풀렸고.

1장로의 인사를 받고 조용히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사이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왠지 복도 양측으로 빤한 시선이 느껴지는 건 마냥 기분 탓은 아니리라.

'그건 그렇고, 마음이 좀 그러네.'

사연을 알고 나면 쉽게 내칠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이곳으로 따라왔는데.

천수향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뭐랄까. 딱한 감정에 마음이 더 약해졌다고 할까.

결론부터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은 1장로 말대로 전대 가주 때문이었지만, 어찌 됐든 천강이 그 아비를 쥐어팬 까닭에 그녀의 인생이 망가진 걸로 볼 수도 있었으니까.

- 자신이 벌인 일은 스스로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 무림인이다.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오른 천강.

'후우. 그래. 내가 벌인 일이니 누구 탓을 하겠어. 이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면, 아미산에서 애초에 얠 도와주지 말았어야지.'

객점에서 만두 접시 빼앗아 간 것도 한 번쯤은 참아보고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열 받는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참상에…… 천강은 복도를 걸으며 천수향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의미도 아닌 그저 동정의 마음.

그런데 웬걸. 그걸 오해한 천수향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품 안으로 안겨왔다.

'엥? 아니 왜?'

그저 불쌍해서 쓰다듬어 준건데?

- 소년,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요.

- 흠. 흠흠!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가 오히려 불을 지핀 천강이 천수향을 강제로 떨어뜨리려는 찰나, 복도 반대편에서 또각또각 누군가 나아왔다.

쌍꺼풀 진 눈과 그 옆의 조그마한 점.

요염하기 그지없는 얼굴과 몸매.

당가 특유의 독 냄새가 나는 그녀는 현 당가의 임시가주, 천수향의 배다른 동생 당묘오였다.

"어멋. 언니, 이번엔 꽤 일찍 돌아왔네?"

"어.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그녀의 등장에 천강에게 찰싹 붙어 있던 천수향이 성큼성큼 걸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두 사람 사이로 싸한 분위기가 흘렀다.

"1장로에게 들었어. 50년 전 일. 그때 네가 내 이야기 저잣거리에 다 뿌리고 다녔다더라?"

"어머멋. 내가 언니 욕 뿌리고 다닌 게 그게 처음도 아니잖아?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해서 손에 꼽기도 힘든데,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랬지. 근데 대체 왜 그런 거야? 그건 가문에도 해가 되는 일인데."

당묘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호호 웃는다.

"언니는 늘 가주 자리가 싫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욕심 좀 냈어. 혹시 화 많이 났어? 그랬다면 미안."

"어휴. 참 잘하는 짓이다, 쌍년."

당묘오가 웃고 천수향이 혀를 끌끌 찬다. 잠깐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던 천수향이 손을 홱 저으며 발을 옮겼다.

"나 이만 간다. 뭔 일 있으면 홍루로 사람 보내."

"음? 내게는 새 형부 소개 안 시켜줘?"

"네가 알아서 알아봐."

그러고는 서로를 지나치는 두 사람. 당가 밖으로 나온 천강으로서는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1장로의 말을 막 듣고 나온 만큼 한바탕 독부림이라도 일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기에.

"저러고 끝이야?"

"뭐…… 쥐어패도 되긴 하는데 어찌 됐든 이젠 이곳 장문인이잖아. 장문인이 피떡이 된 채 아랫것들에게 발견되면 어떡하겠어?"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지?"

천수향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 쟤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혼례식에 참석한 이들로 인해 도리어 더 괴상한 소문이 퍼졌을 거야."

즉, 동생이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며 사태 수습을 했단 이야기다. 그 와중에 자신의 것은 확실히 챙겼고.

"……너희 가문 사람들은 잘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치? 나도 그래서 빠져나온 거야. 더 있다간 정상인인 나까지 이상해질까 봐."

너도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도로 집어삼켰다.

어찌 됐든 오늘 그녀는 꽤 피로할 테니까.

자신의 인생을 망친 이가 아비라는 사실은, 비록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상당히 충격이 됐을 터였다.

"힘내."

"응."

그렇게 당가에서 50년간의 일을 청산한 두 사람은 홍루로 향했다.

 

***

 

"잘 지냈냐? 아주 살이 포동포동 찐 것 같다, 한사?"

"하핫. 다 천 형 덕분이오. 내 요새 아주 무릉도원에 사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래도 훈련은 게을리하면 안 된다?"

"물론이외다. 무림인이란 늘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정갈하게 가꿔야 하는 것 아니겠소."

도사 놈 아니랄까 봐 말 하나는 기가 막히네. 대체 이놈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해?

천강이 남궁선을 돌아보자, 남궁선이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아침부터 해가 떠 있는 낮 동안, 서로 대련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 말해주니 믿음이 가네."

"그런데 천 형, 그것 들으셨소?"

천강이 의아함을 표하자, 한사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내용을 읽은즉 이러했다.

 

『 최근 마교의 습격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로 밝혀졌다. 하여 무림맹에서는 내년에 있을 용봉지회를 1년 앞당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단순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가 아니요, 마교의 토벌대를 결성하는 자리임을 밝히는 바이다……. 』

 

"내년에 있을 용봉지회를 올해, 한 달 후로 앞당긴다고 공문이 떴소."

흥미롭네. 용봉지회를 앞당겨 인재들을 발견하고 토벌대 또한 덩달아 결성하겠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물론 대다수의 고수들은 명문 정파에서 배출이 되지만, 그 외에 사파와 일인전승 혹은 은둔 고수의 장난질로 탄생해 용봉지회 같은 행사로 발견되는 고수도 상당했다.

그 비율을 따지자면 1-2할 정도에 해당할 정도로.

그에 보통 이런 행사를 열어 인재들을 발견하고, 각 명문정파는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각 인재들은 그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자리가 될 수 있는 데다가 일반인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 장사꾼들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장.

즉, 용봉지회는 중원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다. 그걸 이용해 마교 쪽에 대응하겠다는 건 꽤 현명하다 할 수 있는 전략.

"방금 다른 이들에게 물어본즉 이번 용봉지회는 어마어마하게 열린다 하오. 아니 글쎄 마교가 곤륜을 습격해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하는 것 아니겠소?"

"그걸 막기 위해 실력 있는 무인들을 대거 모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천 형! 천 형도 참여하는 게 어떠시오?"

한사와 남궁선이 눈을 반짝이며 천강을 쳐다본다. 행태를 보아하니 둘은 참여할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귀찮은데.'

솔직히 가봐야 애들 투덕거리는 수준에 하품만 나올 것 같고.

가장 싫은 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는 것이다. 천강은 조용한 게 좋았다.

그런데 그때 한사와 남궁선이 나누는 이야기에 천강의 귓가가 솔깃했다.

"아무튼 이번 용봉지회는 그 목적성이 확고한 만큼, 모든 세가와 문파에서 다 참여하기로 했다고 하오. 창설된 이래 역대급이라 할 수 있지."

"그런 곳에서 빛을 발한다면 분명 영광일 테죠."

"남궁선, 내 말이 딱 그 말이오!"

잠깐. 다 모인다고?

천강이 중원에 나온 이유는 둘.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신선환 문제를 막는 것.

'그런데 모든 세가와 문파 사람들이 다 모인다면…….'

일일이 찾아갈 필요도 없이, 제거할 인력들도 알아서 다 모이는 거 아냐?

심지어 사람이 그리 몰린다면, 특히 무림인들이 그리 한데 모인다면, 신선환의 동향 또한 파악하기 쉬우리라.

- 참여하죠, 소년.

- 이건 기회이니라.

"좋아. 가자."

"천님, 정말입니까?"

"오오옷!"

그렇게 천강은 한 달 후에 있을 용봉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똑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루주와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온다던 천수향이 돌아온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강. 그러나 정작 나타난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응? 너는?"

"앗. 천 대협도 같이 계셨군요. 간만이에요."

당가의 새로운 봉(鳳)인 당소여가 예를 갖춘다. 천강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한사를 쳐다보자, 그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오늘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느냐고 하기에 시간이 있다 했소. 천 형께서 오실 줄 알았다면, 내 천 형께 물어봤을 것인데…… 미안하오."

"아냐. 그럼 잘들 이야기 나누고."

그러나 나가려는 천강의 손목을 덥석 잡는 여인.

"어딜 가시나요?"

"아니, 그게……."

괜히 천수향이 돌아왔을 때 여자 하나 끼고 있으면 어떤 오해를 살지 몰라서 그러지.

특히나 그게 조카라면 더더욱 이상하게 보일 수 있고.

천수향과는 50년 넘도록 오해를 퍼먹고 산 사이니만큼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할 생각인 천강이었다.

그러나 보통 오해를 만들 사건은 느닷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천강이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품고는 들어오던 천수향의 시선이 천강과 당소여의 손과 손목에 가 닿았다.

"낭군님, 제가 돌아왔…… 음? 소여?"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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