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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21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5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217화

217화. 천강과 홍랑, 두 사람 사이의 진실

 

 

산서 무영신투의 비고로 향할 땐 순식간이었지만, 사천 홍루로 다시 되돌아가는 길은 느긋했다.

말과 깨끗한 수레를 구매해 찬찬히 이동하는 천강.

수레에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치열한 삶은 잊고 늦여름의 정취가 물씬 올라왔다.

'이런 삶이 나에겐 딱인데 말이야.'

뭐 하나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 어릴 적 스승과 낚시하던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 옆에서 부스럭 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무려 무림의 다섯 존자 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얘 때문에 그런 삶은 힘들겠지.'

기분 좋은 감정일랑 훅 날아가고 암담한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말 안 하고 이리 자고 있으면 선녀와 같이 예쁜데, 어찌 눈만 뜨면…….

끔벅끔벅.

천강과 천수향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흐릿하면서도 쌍꺼풀이 진 눈이 점차 맑아지고 이내 눈 끝이 확 치켜 올라간다.

"천강, 너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

"아니. 왜?"

"그래? 그냥 표정이 좀 이상해서."

이런. 다음부터는 거울 보고 표정 연습 좀 해야겠다.

천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제를 돌렸다. 수레를 이끌고 있는 일천귀검에게 말을 건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

"음. 반나절이면 사천성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

천수향이 화색을 띤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천강을 소개하고자 벼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간 그녀에게 쌓인 오명을 어느 정도 풀 수는 있기에.

그 오명이란, 혼례를 올리기로 한 남자가 그녀가 무서워 혼례 당일 나타나지 않았고. 그런 그를 그녀가 독살했다는 뭐 그런……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암. 그러니 소문이 났겠지.'

아무튼 천강이 그 일에 동행한 이유는 그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서다.

천강의 기억에는 없는 혼례식.

당시의 일을 아는 건 오로지 가주와 1, 3장로뿐인데, 현재 가주와 3장로는 죽었고 생존자는 오직 1장로 하나였다.

- 천강. 내가 진실을 듣고 싶어 해도 가르쳐주지를 않아.

그러나 천수향이 아닌 오명을 함께 쓴 흑살마신이 요구한다면 그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말하지 않으면 당가를 멸문지화 시켜버린다고 엄포 놓으면 그만이니까.

현재 중원에서 흑살마신의 악명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사천성에 도착한 천강은 일천귀검과 헤어졌다.

"고맙다. 귀찮을 텐데 여기까지 수레를 이끌어줘서."

"아닙니다. 천 대협께서 주신 은혜에 비하면 두세 번도 더 할 수 있습니다."

무림인에게 영약이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 의외로 선계 토끼의 절구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만수무강하십시오, 대협!"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춘 뒤 저잣거리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일천귀검.

제갈현과는 산서에서 헤어졌고, 천강은 당가로 가기 전 사천제일미에 들러 방중에게 한마디 일렀다.

"이곳에 사자왕이 오기로 되어 있어."

"엥? 사, 사자왕?"

"어. 만약 오면 나한테 소식 전해 줘."

외모를 자세히 묘사해준 뒤 나오는데 방중의 눈은 크게 뜨이다 못해 입까지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다섯 왕 중 하나인 사자왕에 이어 문밖으로 나서자 무려 음존이 떡 하니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 그래."

천강이 나가고 방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핫. 역시 천강…… 만나고 다니는 물이 다르구나."

천강과 천수향이 길을 거닌다.

원래 주위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천강이지만, 아까부터 계속 집중되는 시선에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뒤에서는 따라붙고 앞에서는 길을 트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그 시선을 따라가 본즉, 처음에는 천수향. 이후에는 그 옆에 서 있는 천강 자신에게 이어졌다.

그제야 문제의 원인을 찾은 천강이 천수향에게 작게 물었다.

"홍랑아."

"응?"

"너 근데 외모가 왜 그래?"

참고로 그녀의 외모는 금빛 머리칼에 푸른 눈. 색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생에 천강을 졸졸 따라다닌 천수향은 천강과 같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이었다.

그러나 50년 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꽤 파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천수향이 자신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빗질하며 물었다.

"왜? 이상해?"

"그건 아니고. 궁금해서. 50년 새 얼굴이 확 달라졌으니까."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들으면 좀 섬뜩할 텐데."

사실 그녀의 옛 외모는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일반인에 비하면 뛰어나나, 그 동생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동생인 당묘오는 용봉지회에 참여하자마자 봉으로 선택될 만큼 능력도 외모도 출중했으니까.

그래서 늘 비교당했으나, 사실 천수향은 그 부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품으로 외견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천강을 만나면서 모든 게 뒤바뀌었다. 천수향 그녀는 천강에게 푹 빠지다 못해 미쳐버렸다.

'왜 날 안 봐주는 거지. 뭐가 부족한 걸까?'

처음에는 내향적인 성격 때문인가 하여 바꾸었다. 늘 어깨와 허리를 펴고 턱을 치켜들고. 행동은 거만하기 그지없으며 말투는 싸가지 없는 게 천강을 똑 닮을 정도로.

그럼에도 천강의 행동에 변함이 없고 심지어 잠적까지 하자, 그녀는 그 이유를 자신의 외모로 잡았다.

'내가 못생겨서 도망 다니는 거야. 처로 들이기엔 쪽팔려서 그런 거지.'

자고로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들은 선녀와 같은 부인을 처로 들였다.

그걸 고증으로 삼은 그녀는 무려 10년에 걸쳐 그 분야의 최고 고수를 찾아가 역용술과 축골공을 배우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서역으로 넘어가, 자신과 맞는 여인을 찾아 그 눈과 머리털을 맞교환했다.

눈알은 서로 바꾸어 끼고, 머리털은 뽑아 심고.

이야기를 들은 천강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가만 있자니 분위기가 어색해 한마디 한다.

"용케도 잘 심었네. 쉽지 않았을 텐데."

"천존이 도와줬어."

"천존?"

"어. 너만 알고 있어. 실은 천존이 의선이야. 약선, 만의선사라고도 불리고 있지."

"뭐야? 그게 모두 한 사람이었어?"

그러나 진짜 놀라운 건 그다음 말이었다.

"실력은 생사경인데, 듣기로는 이생에 미련이 남아 아직 위로 못 올라가고 있다고 하더라고. 본명은 화타라고 하더라."

화타…… 대체 몇 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이야?

새삼 우화등선이라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천강이었다. 무려 1천 년 넘도록 못 하고 있단 뜻 아닌가.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 탓인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덧 천강은 사천당문의 앞에 서 있었다.

천수향이 천강의 한쪽 팔에 팔짱 끼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중 천수향의 모습을 본 문지기들은 급히 예를 갖추며 문을 열어젖혔다.

"당묘오는?"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 오늘 중으로 복귀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1장로는?"

"늘 계시는 곳에 계십니다."

"고마워. 수고들 하고."

천수향이 사라지자 문지기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딱 달라붙었다. 그들은 천수향이 끼고 나타난 남자가 누구인지 의문을 드러냈다.

"처음이지?"

"그래. 처음일세. 내 저분께서 저리 웃는 모습도 처음 보네."

그리고 그건 비단 문지기들의 반응만은 아니었다. 지나가며 천수향과 천강을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 수군거렸다.

청소하던 이들은 빗자루나 걸레를 손에서 놓친 것도 모른 채 어버버 거리고, 차와 다과를 즐기던 이들은 담소를 나누는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의 신형을 꾸준히 쫓았다.

그들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조용히 뒤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1장로실.

당가의 1장로가 두 사람 앞에 정중히 예를 차렸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어. 잘 지냈지?"

"이 늙은이야 늘 너무 편히 지내서 문제지요. 그쪽께선…… 요새 떠들썩한 흑살마신이시군요."

"맞아. 나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네?"

"허헛.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를 잠시, 1장로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무게를 잡았다. 대략 두 사람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를 안 것이다.

"이리 함께 오신 걸 보면, 모든 일의 전말을 듣기 위함이겠지요?"

"그래."

"듣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두 분이서 함께 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더더욱이요."

천수향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천강을 흘끔 눈치 보고는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긴데 그래? 심각한 거야?"

"심각하지요. 당소오님께서는 그로 인해 50년간 고통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진실을 알면……. 흠흠."

천수향이 다시 천강을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역력했다.

그러나 천강으로서는 도리어 들어야 할 이유가 바짝 섰다.

대체 어떤 오해를 빚어 이 사달이 난 것인지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나 괜찮은 명분이라도 나오면…… 후후후.

"천강."

"으응?"

"너 방금 웃었지?"

"내가? 비약이 심하다 너어……. 아무튼 난 들었으면 해."

"들으면 우리 사이가 안 좋아질 수도 있다잖아."

"그래도 무려 다섯 존자 중 하나인 너와 마교의 최고라 불리는 내가 50년간 오해한 일이야. 이래저래 한 번은 풀어야 하는 일인 거지."

왠지 찜찜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천수향이 고개를 끄덕이고, 1장로의 설명이 시작했다.

"실은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고인이 된 전대 가주에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흑살마신님. 혹시 약 55년 전 한 객점에서 당가의 전대 가주를 수치 준 일이 있습니까?"

수치?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자기 독이면 나 같은 건 눈 깜짝할 새에 하직하게 만들 수 있다길래, 손 좀 봐줬지."

"예?"

"시비도 걔가 먼저 틀었어. 내가 만두 먹고 있는데 지가 배고프다며 뺏어갔거든."

그랬다. 모든 일의 시작은 만두 한 접시에서 시작됐다.

자신이 사천당문의 가주라는 걸 으스대는 녀석이 천강을 그저 흔한 칼잡이로 보고 만두를 뺏어간 것.

"아주 흠씬 두들겨 패줬지. 다시는 못 까불게 말이야."

그 뒤로 녀석이 자꾸 자신이 만든 독만 가져왔어도 하며 독독독 거리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한 독이기에 저러나 싶어 당가에 숨어들어 일각산독을 빼돌렸었다.

천강의 이야기를 들은 1장로가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진실은 그러했군요."

"진실?"

"제 입으로 이리 말하는 게 좀 그렇지만, 전대 가주님께선 사실 굉장히 속이 좁고 치졸한 분이십니다. 뭐든 일이 잘되면 본인 탓, 안 되면 남 탓을 하곤 했지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처음 볼 때부터……."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1장로 말에 동의하던 천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못난 부모라도 남이 제 부모를 욕하면 기분이 안 좋은 법. 천수향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던 탓이다.

1장로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두 분의 인연이 이어졌지요. 두 분의 약혼 소식을 들은 전대 가주님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고, 그게 흑살마신님인 것을……."

"잠깐잠깐. 약혼이라니?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자꾸 이야기 끊지 말고 가만히 들어. 그 부분은 내가 따로 설명해 줄 테니까."

천수향의 낮은 윽박지름에 천강이 두 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다 듣고 나중에.

1장로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시 전대 가주님께선 일전의 일로 흑살마신님을 싫어했고, 어떻게든 그 명성을 깎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성대하게 혼례 준비를 했다.

무림의 유명 인사들과 사천의 권력자들을 다 불러 모아. 그런 뒤 거짓 조작을 한 것이다.

천수향에게는 천강으로부터 답신이 온 것처럼 대필 서신을 써주고, 천강 당사자에게는 소식이 날아가지 않게 입막음하고.

가문이 대외적으로 쪽팔리는 게, 천강을 사위로 맞아들이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해 벌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쾅.

"이놈의 씹어 먹을 늙은이가!"

장로실 건물이 부르르 떤다. 음존의 크나큰 분노에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거린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천강은 그로 인해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진정해. 그래도 네 아비잖냐."

"지금 이게 진정할 일이야!"

그러게. 확 그냥 그 시체를 가져다 오체분시를 시켜버릴까.

아무튼 천강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끔벅 죽는 천수향이 화를 내리눌렀다.

"……내가 일단 천강 봐서 참는 거야."

잠깐 중단되었던 1장로의 설명이 다시 재개됐다.

"후우. 문제는 이 일을 당시 배다른 동생이신 당묘오님께서 기회라 생각하고 악한 소문으로 둔갑시켰고……."

"당묘오가?"

"예에. 당시 당묘오님께서는 욕심이 많지 않으셨습니까? 당소오님께서 가문에 먹칠하고 명성이 깎인다면, 가주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거지요."

"하여튼 이놈의 가문…… 믿을 놈이 하나도 없네."

그로 인해 천수향은 모든 걸 잃게 되었다.

사랑도 잃고, 가문 내 지위도 잃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 앞에서 신랑도 없이 홀로 선 그녀를 사람들은 신랑을 독살해 잡아먹은 당가의 악녀로 몰아갔다.

당연히 이후로는 혼삿길이 다 막히게 되었고.

그렇게 천강을 찾는…… 아니, 찾을 수밖에 없는 천수향과 그 집착으로부터 도망 다닐 수밖에 없는 천강.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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