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4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46화
246화. 압살진(壓殺陣)
널찍한 강가.
물이 잔잔히 흐르고 곳곳에 기다란 갈대가 밀집해 우거진 곳.
바람이 붐에 따라 갈대의 보송보송한 털이 깃발처럼 휘날리고,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런 평화로운 곳에 문득 큰 폭음이 일었다. 한 사내가 길길이 날뛰며 나오는 소음이었다.
몽둥이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강풍과 함께 파도가 일고, 배들이 낙엽처럼 허공에서 휘날리다 분쇄된다.
배는 물론 주변 나무를 한바탕 싹 쓸어 놓은 천강이 털썩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후우. 이로써 이쪽도 끝인가?"
- 너무 열심히 부수고 다니시는 거 아닌가요, 소년? 사심이 가득해 보이는데.
"기분 탓이라고 기분 탓."
절대 황군을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계획을 위해 움직이는 것뿐.
아무튼 이번 강가엔 배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나무는 적어 오히려 일을 끝내는 데 적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려 하는 이들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강폭이 이전 강가에 비해 족히 곱절은 더 되었던 것이다.
뱃값을 지불하러 마을로 올라간 묵현이 돌아와 천강 옆에 앉고는 보따리를 풀었다. 천강이 만두를 집어 먹고는 말했다.
"적들이 얼마나 늦춰졌으려나."
"글쎄다. 현명하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든 그렇지 않았든, 족히 5일은 늦추었다고 할 수 있다."
"5일이라. 움직인 보람이 있구만."
이제 적들의 행군을 늦추었으니 남은 건 무림맹을 어찌 설득할 것이냐인데.
"생각 좀 해봤냐?"
"그래. 일단 황실의 진실을 아는 남궁세가의 가주와 화산의 장문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봐야겠지."
그럴 것이다. 특히 현 남궁세가의 가주가 무림맹 맹주이니 그가 돕는다면 각 수장들을 설득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땡추들은 꽉 막혀서 말을 통 안 들어 먹을 텐데."
전생에도 그러했다.
당시 천강은 북명신공의 비급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림사 또한 찾게 되었다.
소림사가 각종 마공이나 이런 것들을 엄중히 관리하고 있었던 탓이다.
당시 천강은 큰맘 먹고 인형설삼과 만년화리를 주며 그 안에 든 비급들을 보기를 원했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었다.
원래 사문의 무공을 찾기 위한 거라고 소상히 설명해도 씨알도 안 먹혔던 것.
'결국은 힘으로 뚫고 들어가 보고 나왔었지.'
그런데 하필 이번 용봉지회 기간 동안 제일 피해가 적은 게 소림이라니.
정확히 말하면 적은 정도가 아니라 미비한 수준이었다. 어쩌면 다른 정파를 모두 합한 것보다 소림 한 문파가 숫자가 더 많을 정도로.
그런 그들을 설득해야 하니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묵현이 그런 천강을 보고는 미소 짓는다.
"걱정하지 마라. 그들이 꽉 막혔다 한들, 현재 황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래. 그렇지."
사실상 저들이 중무장을 하고도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림맹이 준비를 하기 전에 자리를 잡고 총공세를 가하기 위해.
식사를 마친 천강과 묵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가를 건너 다시 무림맹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돌연 시야가 뿌예졌다.
"음?"
한 번 겪어본 현상에 가만 기다리자 이번에도 어떤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이 내려앉고, 사위가 물과 갈대 흔들리는 소리로 그득한 곳. 그곳은 바로 지금 천강과 묵현이 건너려는 강가였다.
천강이 어둠을 뚫고 강을 건너자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태감이었다.
환상은 그곳으로 끝.
"천강?"
천강이 마치 강을 건널 듯하고는 움직이지 않자 묵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천강이 묵현의 손에 비파를 쥐여 주었다.
"혼자 무림맹까지 갈 수 있지?"
"……물론."
"그럼 전력으로 뛰어. 무림맹 근처에선 사신들 조심하고."
천강이 묵현을 강가 반대편으로 날려 보냈다.
천강이 태감을 만난 순간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아직은 노을이 지고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묵현이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천강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뛰어오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팔십에 해당하는 숫자.
'실력은 하나같이 화경 혹은 현경이로군.'
무림에 현경이 많다고는 하나 다 합쳐도 채 스물이 안 될 거라더니, 겁나게 많구만.
그러나 그들을 가만 지켜보는 천강의 얼굴에 의아함이 올라왔다.
'몇 명 빼고는 경공이 다 같다?'
아무리 경공에 종류가 많지 않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쉽게 말해 저들이 다 같은 출신이라는 건데……. 와아. 현경이 무려 32명이라고?
이는 순수하게 무력만으로 치면 마교를 압도하는 수준이 아닌가?
아니, 어쩌면 중원 전체를 압도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네놈이 흑살마신인가?"
천강을 보고는 용모파기를 펼치더니 비교하며 묻는 질문에 천강 또한 되물었다.
"그럼 너희들의 정체는 뭐냐?"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녀석들.
"우리와 같은 현경?"
"괜히 기대했잖아."
"무림에서 유명한 놈이라 하더니 별거 없군."
"이건 협공도 필요 없을 듯한데."
그러더니 한 녀석이 앞으로 나온다.
9척의 거대한 신장. 그럼에도 뚱뚱해 보이는 덩치.
외공을 익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우람한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킬 만하다.
녀석의 손에는 사람 머리보다도 더 큰 철퇴가 들려 있었는데, 놈은 그것을 마치 솜 망치 다루듯 가볍게 조작하고 있었다.
"인사하지. 금의위 소속 항학이다."
"금의위?"
"우리에 대해 모르나?"
"산속에서만 지내봐라. 모르는 게 많다."
천강의 대답이 일리가 있다는 듯 금의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저 먼 천산에서 쭉 지냈다면 중원의 일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황제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직할대라 보면 된다. 그쪽 마교로 치면 음…… 호법 정도 되겠군!"
"미안하지만 호법이 사라진 지 오래라."
뭐 요즘으로 치면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라는 거겠지.
천강이 뒷짐을 진다. 항학이란 자가 무기를 어깨에 메고는 자세를 낮추었다.
'경지는 현경. 아직 태감이 오려면 시간이 꽤 있으니, 어디 실력이나 좀 볼까.'
천강이 준비됐다는 걸 직감한 그가 무식하게 쇄도해 왔다.
한눈에 봐도 꽤나 무게가 나갈 거대한 철퇴를 이고는 움직인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실로 빠르고 매서운 돌진이었다.
"몽골의 전사보다 강할 걸 기대해보마, 마교인이여!"
훙. 사거리에 들어오자 호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일격.
천강이 오른편으로 몸을 낮춰 사선으로 들어오는 쇠뭉치를 피해냈다.
쿠콰콰콰콰-
대지가 초토화돼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철퇴에 응집돼 있던 강기가 그 파편들에 옮겨 타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강렬하군.'
그리고 꽤 위협적이다.
달려들어 내려치는 순간까지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깔끔한 동작.
그 이후엔 목표물뿐만 아니라 그 주위를 처참히 부숴버리는 공격.
무림의 정파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형식의 공세다. 지극히 실리를 추구한 공격법이니까.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마치 같은 마인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놈! 대체 언제까지 피해 다닐 생각인 것이냐! 반격을 해보거라!"
기고만장하긴. 천강이 녀석의 일격을 피해 발끝으로 그 정강이를 노렸다.
그걸 보고는 도리어 다리에 잔뜩 힘을 주는 녀석.
'오호? 방어에는 자신이 있다 이거냐?'
그러나 결과는…….
"끄아아악!"
정강이가 뚝 부러져 피부를 뚫고 밖으로 삐져나온다.
제아무리 현경이라 한들, 천령초로 강화된 몸에 내기까지 섞은 천강의 일격을 막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항학이 단 일격에?"
"저 무쇠 같은 몸을……."
항학이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천강이 그 뒤로 자리한 79명에게 손짓했다.
"자, 봤지? 귀찮게 하나씩 덤비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라. 나 바쁘다."
너울너울 지는 해의 모습에 천강의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적들이 무기를 빼 들고는 천강에게 달려들었다.
'최대한 제압만 하고 가야겠어.'
황제 직할대라 했다. 괜히 죽여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좋게 끝내도록 하자.
천강에게 달려드는 사람들.
천강이 짓쳐들어오는 검격을 피하며 그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시간에 쫓기더라도 언제고 다시 싸울 수 있으니 그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분명 뿌리는 환검인데, 담백하군.'
환검은 화려하고 잔가지가 많은 무공이다. 그런데 지금 천강의 전방에서 수차례 검격을 쏟아내고 있는 자의 검은 환검치고는 굉장히 담백했다.
천강이 장법을 내뻗자, 녀석이 뒤로 슥 빠지고 옆에서 다른 이가 공격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녀석.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일격을 흘리며 천강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쫓았다.
'저돌적으로 돌진해, 단숨에 적 하나를 일도양단 낸다라.'
그러나 끊임없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연격은 그가 힘 조절을 하고 있단 뜻이리라.
그렇게 적들과 수차례 공방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천강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놈들…… 전쟁에 특화된 놈들이로군.'
금의위가 어떤 조직인지는 몰라도 그 구성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감이 왔다.
무기는 제각각이어도 다들 비슷한 행태. 적은 근육을 사용해 최대한 많은 적들을 죽이도록 훈련된 자들이었다.
그 와중에 저돌적인 움직임을 갖춘 건, 그 상대가 몽골이었던 탓이다.
'무공은 무림에서 가져왔고, 그것을 전쟁터에 맞게 개량해 발전시킨 건가.'
그래서일까.
이들 무공에 대한 파훼법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저 단순히 찌르기 베기 등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경급 고수가 고속으로 휘둘러대는 단순 검격은, 때로는 그 어떤 초식보다도 대인전에 특화될 수 있었다.
'괜히 공방을 주고받으면 시간만 오래 걸린다.'
천강의 안광이 강하게 번뜩였다.
***
- 놈의 발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 강하게 튀기 전에 가둬야 한다.
- 가둬라.
검을 휘두르며 서로 전음을 주고받는 금의위들.
그들은 천강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날쌘 것을 주목하고는 진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찍이 현 황제가 전쟁을 하고 돌아다닐 때 만든 것으로, 적에 무위가 뛰어난 장수가 있을 경우 아군의 피해 없이 그를 끝장내기 위해 만든 일격이었다.
일명 압살진(壓殺陣)!
이는 소림의 108나한진을 따와 지극히 실리를 추구해 만든 것이니, 이 덫에 걸린 자는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마냥 흔들흔들 공격들을 피하고 피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무서운 진식이었다.
지금까지 몽골과 전쟁을 할 때 이 진식을 빠져나간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천강이 공세를 피해내며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순간, 그 주위를 돌던 금의위들의 눈이 번쩍였다.
- 지금이다.
- 공격해.
- 항학 녀석의 정강이 복수를 해주자고.
그러나 정강이가 부러져 그걸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항학은 볼 수 있었다.
함정에 걸린 건 적이 아니라 그의 동료들이란 걸.
"함정이다, 다들 피해!"
항학의 벼락같은 외침이 땅거미가 지고 있는 강가 위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뱅글뱅글 돌며 압박을 가하던 금의위들이 순간적으로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순차적으로 공격을 가하러 들어간 것인데, 천강에게 무기를 꽂고 빠져나와야 할 박자에 흡공으로 인해 그러질 못하니…… 마치 일제히 중심부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큿. 미친……."
내기를 모조리 빨리고 쓰러지는 적들.
천강이 목을 좌우로 풀고는 말했다.
"내 별호가 뭔지는 알아봤으면서, 정작 내가 무슨 기술을 쓰는지는 안 알아 온 거냐?"
적을 잡으려면 그에 대해 최소 조사는 해야지. 전쟁을 치르고 다니는 자들이 준비성이 영 엉망이네.
잘도 몽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부, 분명 손으로만 흡공을 쓸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아……."
그렇군. 과거엔 그리 알려져 있었지.
"누구나가 한 수 정도는 숨긴 패가 있잖아?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