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4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44화
244화. 생사경으로 한 발짝 더
여명의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녘.
북경에서 출발한 뒤로 쉬지 않고 발을 놀리던 천강이 앞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단 이 시간까지 태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오늘은 쫓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묵현 또한 천강 옆에 앉았다. 천강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꽤 지쳐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이 식어 더는 땀방울이 흘러내리지 않을 때쯤 묵현이 물었다.
"근데 루주에게 패는 왜 준 건가?"
무려 무림의 다섯 왕 중 하나인 미오왕의 명패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막말로 그 명패를 쳐든다면 웬만한 하급 관료들은 넙죽 절할 것이고, 그 오만한 홍루와 청루의 루주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귀한 걸 그리 쉽게 내어주었으니, 묵현으로서는 당연히 의아한 셈.
그러나 천강의 얼굴엔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
"쓸모가 없다니?"
천강의 눈앞으로 얼마 전 태감과의 전투가 스치듯 지나갔다.
태감과 싸우는 데 있어 미오왕 당사자가 나서준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데다가, 황실에게로 넘어간 정보책은 위험하기만 할 뿐이다.
"청루가 황실에 넘어간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관리들이 할 일 없이 잠도 안 자고 대기하고 있는 자들도 아니고, 청루에서 불렀기로서니 그날 밤 바로 떡 하니 나타나다니. 너무 빠르잖아?"
그래서 준 거다.
홍루와 청루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인 만큼, 더는 미오왕과 그 수족들이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발목을 잡으면 그 목을 쳐야 하기에 미리 선을 그은 것이다. 살짝의 경고도 더해서.
"확실히…… 네 말이 맞는다, 천강."
천강을 바라보는 묵현의 시선이 달라졌다.
마교 시절부터 늘 대단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일을 겪고도 그 자신과 이리 큰 차이가 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그 시선을 느낀 천강이 볼을 긁적였다.
'뭐…… 다 심안 덕분이지만.'
이왕 자리에 앉은 김에 천강과 묵현이 아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강. 앞으로 네 계획은 뭔지 물어도 될까?"
묵현 또한 자신만의 계획이 있지만, 천강의 의견과 상충된다면 적극 수정할 생각이었다.
천강이 만두를 목구멍 뒤로 넘기고는 대답했다.
"일단 무림맹과 관군이 당장 맞부딪치는 사태는 피해야겠지. 네 말마따나 여론과 명분이 지금은 저쪽에 있으니까."
천강이라면 그런 것을 일절 신경쓰지 않으나, 대부분이 정파인들로 구성된 무림맹은 여론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거의 확정적으로 흔들린다고 봐야겠지.'
그것은 이내 사기 저하로 이어질 것이고, 싸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천강은 그걸 피할 생각이었다.
"의도는 알았다. 그럼 언제까지 피할 생각이지?"
"밀물이 썰물로 뒤바뀌었을 때. 낮이 밤으로 바뀌고, 북풍이 남풍으로 전환되었을 때. 그때 움직일 거다."
신선환의 진실을 알리는 데 성공한다면 그 명분은 극구 거부해도 무림맹이 쥐게 된다.
협이라면 죽고 못 사는 정파인들의 장단만 맞추어준다면, 이 싸움은 이겼다고 볼 수 있으리라.
천강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적들이 우릴 태워죽이기 위해 피워 올린 화마가, 남풍으로 인해 적에게 되돌아갈 때. 그때 우린 진격할 거야. 그럼 제아무리 태감이라 해도 막지 못해."
그도 생사경이기 이전에 일개 인간. 200만이 넘는 중원 사람을 막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태감의 약점보다도 신선환 쪽이 더 중요하다고 한 거였군."
"그래."
뭐 사실 중원 사람 200만이 나서 본들 태감을 잡진 못한다.
그러나 그 많은 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수들이 움직일 것이다.
신수는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 직접 그들의 존재를 보고, 백호와의 일전을 떠올린 천강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중원 사람들이 들고일어나는 건, 장기적으로 보면 악수다.
이제야 망국의 상처가 아물고 있는 시점에 또 한 차례 내분이 인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겠는가.
'최대한 빨리 생사경에 도달해서 태감과 단둘이 승부를 봐야 해.'
밥을 다 먹은 천강이 검은 안개에서 물건을 빼 들었다. 그것은 비파였다.
묵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천강,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뭐가?"
아닌가? 묵현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물었다.
"근데 네가 악기 다룰 줄 안다는 소식은 처음인데."
"나 악기 다룰 줄 몰라."
"응?"
묵현의 시선이 악기에서 천강의 얼굴로 향한다.
"그럼 왜 이 박자에 악기를……."
"연습 중이야, 연습. 생사경을 위한 일보라고 할까."
그제야 묵현이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식사가 끝나고 악기를 꺼내자, 그는 아무래도 이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악기만큼 여러 원리를 다 표현할 수 있는 도구도 없지."
쾌, 유, 중 등등. 악기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색채가 판이했다.
비파를 잡고는 씨름을 하는 천강.
그 모습을 한참을 가만 바라보던 묵현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잡는 자세가 잘못됐다. 이런 식으로 잡아야 몸의 운신이 편하다. 소리도 잘 나오고."
"이렇게?"
"그래. 역시 무인이라 그런가? 몸으로 배우는 게 빠르군."
그러나 그뿐,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악기 다루는 이들을 거의 못 본 천강이다.
그 몇 번 본 것도 유곽 지나다니며 잠깐이지, 그조차도 잘 기억도 안 났다.
그 옆으로 예쁘장한 꽃들이 돌아다니는데 어찌 시선이 그쪽으로 갈까. 그저 귀로 들은 음악만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다."
천강의 옆으로 다가와 악기의 기본을 가르쳐주는 묵현.
"무기나 도구와 똑같다. 계속 다룰수록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거다. 너랑 한 몸이라고 생각해라."
"이렇게?"
"아니 이렇게다. 다시 해 봐."
으으으. 내가 이 나이 먹고 악기를 연습할 줄이야.
검 다루는 것보다 수백 배는 어려운 것 같은데?
- 이제야 저희의 위대함을 아시는군요. 아무렴 쇳덩어리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 뭐라? 어디서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뇨! 중원의 명성 자체로만 따지면, 검 끝의 때만도 못한 것들이!
- 뭐라고요! 지금 말 다했나요, 공포!
- 그래. 우리들이 오랜 기간 보고에 갇혀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온 세상에서 우릴 갖고자 전쟁이 일었을 것이다! 암. 고롬! 일개 악기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현상이지!
천강이 악기를 연습하는 사이, 신병이기들은 양측으로 나뉘어 싸움이 났다.
천강이 악기 다루는 걸 어려워하니 악기 측에서는 자신들이 질적으로 더 뛰어나다 주장했고, 무기 쪽에서는 까다롭기만 하고 하등 쓸데가 없다고 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 이 무식한 쇳덩이들이!
- 깐깐한 쓰레기들이 어디서!
'조용!'
아우. 시끄러워 진짜. 도저히 집중이 안 되네.
지금 그깟 게 중요한가 말이야.
흡공을 쓰던 천강에게는 사실 도구란 불편하기만 한 짐덩이에 불과했다. 악기나 검이나 솔직히 거기서 거기였다.
신병이기들이 잠잠해지자 천강이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좋아. 다시 시도해 보자. 한 몸처럼, 내 한 몸처럼.'
이미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한 묵현은 한 나무 아래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고, 뙤약볕 아래 천강이 악기를 붙들고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연주되다가 멈추고, 이상한 음정과 함께 멈추고.
미숙한 실력에 자꾸만 중단되는 연주.
'하아. 진짜 뭔 연주라는 게 이리 어렵지? 묵현 녀석 일부러 어려운 곡 가르쳐 준 거 아냐?'
- ……무지 쉬운 곡입니다.
천강의 손에 붙들려 있던 비파가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젠장. 차라리 음공을 쓰는 게 더 쉽겠다.'
천강이 비파를 촤라락 움직였다. 전에 투파창귀와 싸울 때 그가 연주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고스란히 재현되는 칼날 같은 바람.
악기형 신병이기들의 당황스러운 음색이 천강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에에?
- 이게 무슨…….
- 하아?
응? 그걸 보고는 천강의 머릿속으로 번쩍 깨달음이 왔으니…….
'오호라?'
***
나무 그늘 아래. 고요히 상념에 잠겨있는 묵현.
'천강의 말이 맞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건, 결국 군중의 마음을 누가 차지하느냐다.'
그러나 모든 게 이쪽이 불리했다.
상대는 권력도 있고 실질적인 힘도 있으나, 그쪽에 비하면 무림맹과 마교는 모든 게 취약했다.
그나마 딱 하나 반격을 노려볼 수 있는 게 있다면, 저들이 실수한 것.
무림을 집어삼키겠다고 악의로 신선환을 퍼뜨리고 소문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려는 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 만행이 그들을 그 자리에서 끄집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판을 뒤바꿀 절호의 방법.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때 고민하던 묵현의 고개가 슥 들렸다.
그 눈은 휘둥그레지고, 자연스레 시선이 옆 20보 거리 떨어진 천강에게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한 사내가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묵현 자신이 보여주었던 곡조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며!
'가르쳐 준 지 고작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완벽한 완주라고?'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하여 다가가 본즉,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천강이 손이 아닌 기로 악기 운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 천강. 너어……."
"어때? 괜찮은 거 같냐?"
괜찮다 뿐일까. 눈을 감고 듣는다면, 악기를 전문적으로 1년 이상 익힌 줄 알리라.
묵현의 심리를 알아들은 천강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굳이 직접 손으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나 싶더라고."
난 무인이자 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현경.
손이 아무리 자유로워 본들 육체라는 한계에 잡혀 있다. 관절과 근육의 구조상 까다로운 형태에 붙잡혀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라면 다르지.'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줄을 튕길 수 있고, 그 튕기는 강약을 실시간으로 조정까지 가능하다.
그저 줄과 그 주위 공기를 내기로 감싸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천강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있던 연주들이 내기를 타고 하나씩 재현된다.
생사경에 도달하겠다며 다른 생물을 수만 시간 따라 한 천강에게 그 흉내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핫. 천강, 너 정말이지……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묵현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어. 고마워!"
연주를 하며 수다까지 떠는 여유로움.
그것이 끝이 나자, 천강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서 몸을 흔들고 있던 비파에게로 향했다.
'야. 새로운 곡 연습하자. 시범 좀 보여 봐.'
- 알겠습니다.
천강에게서 내기를 가져다가 신병이기가 스스로 연주를 했다. 천강의 눈이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담아 기억하고, 이내 그것을 재현해냈다.
천강은 비파의 이해도가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속도면, 모든 악기를 접수하는데 십 일이면 충분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