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4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42화
242화. 태감과의 조우
"기를 차단한다?"
"예. 단순히 운을 가져다준다고 여긴 황제와는 달리, 대장군께서는 뭔가 다름을 보시고 몰래 그것을 일부 취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몇 차례 실험을 한 대장장이가 있습니다."
천강과 묵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대장장이라면 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나?"
"북경 남서쪽 외곽에 허산이란 자를 찾아가 보십시오."
"생김새가 어떻던가?"
장각을 찾느라 고생한 걸 떠올린 묵현의 질문에, 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외모를 소상히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묵현. 천강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냥 이 녀석을 데리고 가지? 어차피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그러자 묵현도 장각도 고개를 젓는다.
"미안하지만 이자를 옥에서 빼간다면 황실이 무림에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지들이 어떻게 알 거야? 무림인들이 빼간 걸?"
"태감(太監)이 있지 않나. 흔적을 보고 필히 눈치챌 거다.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할 것이고."
"……좆같네."
그러나 좆같아도 어쩔까. 강자가 세워놓은 규칙에 따라야 하는 게 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그럼 폐하를 부탁드리오."
장각이란 사내가 천강에게 예를 갖추고 이내 묵현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천강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묵현과 함께 탐(貪)을 타고 바깥으로 이동했다.
***
"천강.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냐?"
북경의 남서쪽 외곽으로 향하는 길. 묵현의 질문에 천강이 떫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멍청한 두 인간의 결정에 아직도 속에 열불이 인다. 명분이 밥 먹여 주냐?"
천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명분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것은 숱한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고, 적에게는 그 의지를 꺾는 훌륭한 수단이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게 목숨보다 중하진 않다.
자연에서 제일 우선시 되는 건 오직 하나, 생존. 결국 각각의 생명은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다.
묵현이 명분 운운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당사자인 장각이란 자가 명분을 들먹이며 살기를 포기하는 건 마교 출신인 천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묵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을 이해한다. 그래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족쇄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네 울타리가 되어 줄 수도 있다."
"참네. 지금의 황제가 잘도 명분 때문에 칼을 안 빼 들겠다."
하지만 말을 그리하면서도 천강의 기분은 어느 정도 기분이 풀어졌다. 역시 화를 가라앉히는 데에는 주둥이를 놀리는 게 제일인 모양이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길을 찾아가는 두 사람.
"혹시 이 일대에 허산이란 자가 있습니까? 대장장이인데."
"저쪽으로 가보시오.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워진 곳 바로 옆이라오."
"느티나무 보이는가? 바로 저길세."
"느티나무……."
어둠 속. 꾸불꾸불 골목인지 미로인지 알 수 없는 거리를 지나간다.
두 사람은 오로지 건물들 위로 머리를 쳐들고 있는 한 나무를 목표 삼아 그 길을 찾아 나섰다.
갈수록 줄어드는 인기척. 그에 따라 자욱이 깔리는 고요함.
그것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화악- 두 사람 앞으로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고요한 달빛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따스하게 그 바닥에 내리깔린다.
공터 한쪽엔 나무 밑동으로 된 바둑판이 몇몇 자리하고, 그 너머로는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떡하니 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키가 족히 150척은 되어 보이는 나무. 사람들이 말하는 느티나무란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듯했다.
천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대장간으로 보이는 건물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에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한 가지 직감이 천강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묵현. 지금 바로 청루로 돌아가라."
"뭐?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아. 손님이 와서 말이야."
묵현에게 신병이기를 하나를 쥐여 주고는 돌려보낸다. 천강 그 자신은 찬찬히 걸음을 옮겨, 예의 목적지인 대장장이의 건물에 발을 들였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쇠와 곰팡이 향. 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전경.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밤.
마당 좌편으로는 각종 도구의 자루들이, 오른편으로는 녹이 슨 쇠붙이가 잔뜩 쌓여 있었다.
천강이 그 중심으로 한 발 내딛자, 어디선가 한 줄기 미풍이 불어와 이파리 하나를 천강의 볼에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것.
'똑같다.'
오늘 청루에서 본 환상과 같았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천강의 시선이 활짝 열린 건물 안쪽으로 향한다. 문 바로 안쪽으로는 누군가 쓰러져 있고, 그 앞으로 한 인물이 서 있었다.
비록 뒤돌아 있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천강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왔나?"
뒤돌아 서 있던 인영이 몸을 돌린다. 실눈으로 초승달을 그리며 웃는 그는 태감(太監)이었다.
"흥미롭군. 나름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말이야.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천강이 살짝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아아. 왠지 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훗. 그렇군. 너도 본 거야. 그렇지? 나와 이곳에서 만날 것을 말이야."
태감이 사뿐사뿐 운치 있게 걸음을 옮기며 천강을 빙 돌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엔 호기심과 함께 흥미가 그득한 상태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본 건 생사경의 경지에 다다르면서 나오는 일종의 능력이다. 신선이 되어 간다는 증거지."
예부터 신선은 자신과 관련된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신선놀음 즉, 신선끼리 하는 내기 중 하나가 바로 그 미래를 맞히는 게 있을 정도로.
그들의 신통력은 가히 놀라워서, 종종 그 자신이 입 밖으로 호언한 게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태감이 팔을 활짝 펼쳤다.
"난 가끔씩 꿈을 꾼다. 아주 찰나에 불과한 꿈이지. 내가 나비인지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꿈. 그 속에서 본 것들은 실제로 미래에 일어나더군."
"어느 정도나?"
"지금까지 틀린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태감이 천강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천강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근데 요새는 그걸 아주 자주 꾼다. 한 달에 한 번 꾸던 걸, 요새는 사흘에 한 번. 빠르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꾼단 말이지."
"여어. 미래를 자주 엿본다니. 축하해."
"고맙네. 자네에게 축하받으니 감흥이 참 새롭군."
좌편으로 사라졌던 태감이 우편에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자리에 서서 천강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중요한 이야기?"
"그래. 매우 중요하지.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전에는 아주 가끔 꾸던 것이 요새는 꽤 자주 보여.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지. 그런데 그 주기가 어느 순간 멈춰버렸단 거다."
"어째서?"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태감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이 올라왔다. 천강의 발끝에 힘이 실렸다.
"바로 내가 온전한 생사경에 도달했다는 걸 말이야!"
태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를 마주하고 있던 천강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상체를 살짝 굽힌 채 크게 뜬 눈으로 그대로 굳어버린 천강.
태감이 그에게 한발 한발 다가선다. 그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생사경에 온전히 도달하였으니, 내게 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휘두른다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사경에 도달하면서 태감은 육체의 행위를 탈피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지금처럼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심검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몸이 빨라 봤자 눈동자보다는 빠르지 못한 법.
천강 앞에 선 태감이 팔을 쳐들었다.
무슨 재주인지는 몰라도 일전에 천강은 심검을 맞고도 멀쩡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그가 마무리 일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끝이다. 우리의 악연은 이로써 끝내자, 흑살마신."
태감의 손아귀에 화르륵 강렬한 기운이 피어올라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그가 천강을 향해 그걸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촤라라라락-
천강의 겉옷이 태감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그 내기를 힘껏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큿. 무슨?!"
"그러게. 우리의 지독한 악연을 끝낼 때가 됐긴 했지."
"아니, 어떻게?"
분명 심검의 일격을 맞아 그 정신을 차리기조차 버거울 텐데?!
"아아. 누구나가 한 수 정도는 숨기고 다니잖아?"
사실 말은 그리해도 천강 또한 지금 놀라고 있었다. 심검에 맞았다고 생각한 순간 아무런 타격이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욕심 많은 탐(貪)이, 태감이 날린 의지의 일격을 호다닥 먹어 치워 버렸던 것.
배부른 걸 모르는 녀석답게 탐은 태감이 심검을 날리는 족족 다 먹어 치웠고, 천강은 태감에게 당한 척하며 가만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탐이 태감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천강 또한 그의 몸에 양손을 대 북명신공을 사용했다.
무려 두 존재의 흡공에 태감이 음기를 뿌리며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욕심 많은 탐은 끝끝내 녀석을 잡고 놓질 않았다.
- 더. 더 내기를 줘. 더어어!
그러나 역시 생사경은 생사경일까.
줄곧 극음(極陰)의 기운을 뿌려대며 저항하던 태감이 돌연 양기를 강하게 분출했다.
양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크나큰 통증.
- 끄아아아아!
탐이 비명을 지르며 속박하던 몸을 풀어주었다. 그 틈에 태감이 천강의 양팔을 잡고는 핑그르르 크게 회전시켰다.
'젠장. 그놈의 태극원리!'
버티려 하나 풀리는 손아귀. 강한 폭음이 밤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저쪽이다!"
"저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호각 소리와 함께 불빛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족히 4-5천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천강의 시선이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명패를 확인해본즉, 그곳에 죽어있는 시체는 천강과 묵현이 찾던 이였다.
'……빼야 하나.'
정보를 얻는 건 실패했다. 기습 또한 마찬가지.
내력 소모가 크긴 했어도 태감은 멀쩡했고, 사위에선 속속들이 관군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 황군은 웬만해선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그게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묵현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계속 싸워봤자 괜히 골치만 아파질 터.
입술을 짓씹던 천강이 암운신공으로 몸을 둘러 지체 없이 몸을 내뺐다. 대장간의 공터로 나지막이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조금 있자 사방에서 발소리가 몰려들었다.
"……."
슥슥. 태감이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단정히 한 그는 하늘 위 달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땐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