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3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38화
238화. 청루
사신 넷이 북경의 성벽을 넘어간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의 시선을 피한 그들은 빠르게 거리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저잣거리 뒷골목 어느 으슥한 공간이었다.
한 인물에게 다가간 그들이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
"예. 생각보다 저항이 거센 바람에."
턱을 매만지던 흑귀가 고개를 주억인다.
"알겠다. 이만 쉬어라."
"존명."
사신들이 빠르게 흩어진다. 흑귀의 시선이 남서쪽을 향하였다.
'일합무신이라……. 제법 하는 애송이인가?'
***
환한 아침 태양이 동쪽 하늘에 머문 오전.
기다랗게 이어진 줄을 따라가며 천강이 고개를 든다. 그 입에선 이내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야. 여기가 북경이라고?"
믿을 수 없군. 나 때의 북경은 완전 엉망이었는데.
과거 북경의 성벽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마치 무너진 유적지 같았고, 죽음의 사신이 한 차례 영혼들을 수거해간 것처럼 으스스하곤 했었다.
그런데 일단 겉으로 본 외양은 아주 그럴듯했다.
'과연…… 황제가 어디 사느냐가 중요하긴 하네. 이러니 남경에 사는 놈들이 필사적으로 도움을 주지.'
성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의 모습은 더욱 대단했다.
끼익끼익- 음산한 안개가 껴 폐가가 늘어서고 곳곳에 백골이 있던 이전과는 달리, 새 건물이 반듯하게 서고 곳곳에는 휘황찬란한 간판이 멋들어지게 달려 있었다.
좌우로 저잣거리의 상가가 있어 눈을 사로잡을 만한 물건들이 즐비하며, 그 사이로는 물고기 떼와 같이 구경하는 이들로 바글바글하였다.
"……."
말없이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자, 묵현이 미소를 보이며 묻는다.
"이전과 그렇게 다른가?"
"다르지. 내가 살던 때는…… 솔직히 모든 게 엉망이었어."
윤택이나 아름다움은 사치에 불과하다. 그저 오늘의 한 끼를 구해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을 뿐.
고작 50년 전에 사는 천강이 그럴진대, 신병이기들은 어떠하겠는가?
천산의 보고에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신병이기들이 감탄에 감탄을 하고 나섰다.
- 허헛. 새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있구나. 저건 무엇이냐? 저건?
- 새로운 장신구도 보이는군요. 어? 저건 못 보던 책인데요?
그 와중에 제일 흥분한 건 바로 천잠보의였다.
- 하. 하아……. 사방이 먹을 것 천지다. 이건 고문이군.
그러며 파닥파닥 몸을 흔드는 녀석.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녀석은 지금 빽빽이 찬 북경의 전경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바로는 이놈이 못 먹는 게 없었다.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 심지어 생명이 아닌 지푸라기나 비단, 가구 등등.
흙도 맛이 없어 안 먹을 뿐,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모조리 먹어 치우는 괴물 중의 괴물이 탐(貪)이었다.
왜 이 녀석을 흉수라 명명하며 이철괴가 놈을 봉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으읏. 쩝쩝."
아예 입 밖으로 소리까지 내는 꼴에 천강이 내기를 배로 먹이며 묵현에게 고갯짓했다. 더 있다가는 녀석이 발작해 날뛸까 해서였다.
두 사람은 말을 정리한 뒤 저잣거리를 관통했다.
무려 이동하는 데에만도 두 시진은 족히 걸리는 그곳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름의 고소함이 코끝을 자극하고. 그에 몇몇 음식을 주워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저잣거리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고 나온 거리는 바닥이 매우 잘 닦인 곳이었다.
그곳은 굉장히 크고 고급스러운 담이 좌우로 자리한 지역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고관대작들이 지내는 거처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묵현이 익숙하게 발을 옮겨, 모퉁이를 돌고 돌아 한 저택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대로 그 입구를 지나쳐야만 했다.
관군들이 그 앞과 안쪽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어찌 된 거야?"
"……나도 모른다. 아무래도 일이 꼬인 것 같다."
얼굴이 다소 굳어있는 묵현.
"일단 이쪽으로."
천강과 묵현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다른 저택들의 상황도 매한가지였다.
네 군데를 추가 방문했으나 그곳 모두 관군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이거 아무래도 너에 대한 정보가 샌 것 같은데?"
"……."
상황 파악을 할 필요가 있겠군.
묵현을 데리고 저잣거리로 빠져나온 천강은 한눈에 봐도 말 많게 생긴 과일 장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과일 하나를 사 먹으며 물었다.
"주인장. 내가 북경에 오랜만에 와서 그런데, 요새 뭔 일 있나? 관군들이 값비싼 집들을 열심히 돌아다니던데."
"말도 마오. 아니 글쎄 반역을 도모했다고 하지 뭐요?"
"반역?"
"그렇소. 전대 황제를 따르는 무리가 은밀히 일을 진행하다가 동창에게 덥석 덜미를 잡혔다는데…… 그로 인해 대장군부터 해서 그 밑으로 싹 다, 일가친척까지 지금 다 잡혀가 난리도 아니라오."
"하. 무서운 세상이로구만. 모처럼 큰돈 들고 놀러 왔더니, 에잉. 북경에 올 시기를 내 잘못 잡은 모양이네."
천강의 연기에 주인장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검지로 남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돈으로 놀려면 사천으로 가시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요새 이곳 유곽들도 분위기가 아주 살벌하다오."
좋은 이야기를 해준 답례로 천강이 웃돈을 주고 과일 하나를 더 샀다. 그리고는 장고에 빠져 있는 묵현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할 거야?"
발을 옮기며 묻는 천강의 질문에 묵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이곳에 오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 판단했다. 설마하니 저들이 목덜미를 잡힐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특히나 묵현이 아는 대장군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인물.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접점이 전혀 없군. 후우."
"그럴 땐 선진들의 지혜를 빌려. 그들이 경험은 아주 많아서 쓸 만하거든."
"아는 이가 있나?"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은 천강이 묵현을 보고는 생긋 미소 짓는다. 픽 작게 웃음을 터뜨린 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방식대로 가는 것에 동의하는 거지?"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간단해."
천강이 검지로 한쪽을 가리킨다. 그곳엔 높다랗게 누각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청루로 가자."
***
청루.
북경에 자리한 고급 유곽.
원래는 남경에 위치했으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지면서 따라 이동해 왔다.
사천에 홍루가 있다고 한다면 북경엔 청루가 있다고 할 만큼 이쪽에선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실상은 그 둘이 한 자매다.
다만 차이는 있었다.
똑같이 술을 팔고 시중을 들어주고 하지만, 홍루는 얼굴이 반반하고 말을 잘하는 여인들을. 청루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고 꼽은 이들을 사용한다.
홍루가 돈만 주면 누구든 받는 것과는 달리, 청루의 경우엔 일종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중원에서 권력 좀 쥔 자들.
그에 따라 활활 불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홍루와는 달리 청루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연꽃이 만개한 연못처럼 화려하지만 대체로 잔잔했다.
그곳을 드나드는 손님들조차도 고고하고 잠잠할 정도로.
천강과 묵현이 다가서자, 문지기들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그중 한 사람이 나와 공손히 묻는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청해에서 온 천이라 한다."
"처음 오신 분이십니까?"
"이곳 루주에게 내 이름을 전하거라. 아마 홍루의 루주로부터 어떤 전갈을 받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홍루와는 달리 문지기들이 실력이 있군.
무려 화경을 문지기로 사용하다니. 아무래도 청루 쪽이 예산이 더 넉넉한 모양이다.
천강이 팔짱을 끼고 문 안쪽으로 비치는 청루의 전경을 구경하자, 묵현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왜 이름을 밝힌 거냐?"
"그래야 들여보내 줄 것 아냐. 여기 통과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
"그럴 거면 그냥 일합무신임을 밝히지 그랬나. 그럼 바로 통과일 텐데."
"……정말로?"
"현재 무림인들의 가치는 네가 상상한 것 이상이다. 용봉지회 우승자라고 한다면,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직접 뛰어나와 인사할 정도는 된다."
하핫. 무림인이 요새 잘나간다는 걸 말로만 들었지, 설마하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려 황실에 드나들며 일하는 관료라도 하급에 불과하면 이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무림인이라는 이유로 그게 용서가 된다고 하고 있었다.
루주에게 보고를 하러 갔다가 후다닥 되돌아오는 문지기. 그가 천강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이번 용봉지회의 우승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로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결국은 일합무신이라고 알린 꼴이 되어버렸구만.
이곳이 기루(妓樓)이기 이전에 정보상인 걸 깜빡했다.
천강과 묵현이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청루 안쪽으로 들어섰다.
홍루는 거대한 호수가 있고 그 위에서 뱃놀이를 하던 것과는 달리, 청루는 잘 가꾼 연못이 여럿 자리하고 그 사이사이를 작은 누각과 다리가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물론 중앙으로는 떡 하니 거대한 누각이 똑같이 존재했지만, 그 누각 크기는 홍루에 비해 작고 대신 전체적인 면적 자체는 홍루의 족히 네 곱절은 되어 보였다.
그 대부분이 연못 등 아름다운 전경인 걸로 보아, 이 시대 권력자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큰 누각 입구에 다다르자 한 기생이 나와 천강과 묵현을 안내했다. 예법을 제대로 익힌 유려한 행동은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
그녀는 사방이 꽉 막힌 어느 작은 공간으로 두 사람을 인도했고, 그 안에 앉아 기다리자 곧 가벼운 복식을 차려입은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와 그들과 마주 앉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루주입니다."
청루의 루주치고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
그러나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천강의 입에선 나직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천수향과는 어떤 관계지?"
"왜 그걸 물어보시는지요."
"내가 왜 물어보는지 잘 알 텐데."
"후훗.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역시나 천수향님을 50년간 골탕 먹이신 분답다고 할까."
여인이 작게 눈웃음을 치며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가만히 있고, 오로지 내기로만.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현이 눈을 크게 떴다.
- 천강. 이 여자…….
- 그래. 현경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현경. 미오왕과 동급으로 보일 정도로.
이런 여인이 미오왕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용정차를 내어주며 그녀가 묵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이미 묵현이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장군을 뵙지 못하시니 이쪽으로 오신 거로군요. 잘 오셨습니다."
"상황을 설명해주겠나?"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일단 흑살마신님의 대답부터 돌려 드리고 말이지요."
양손을 자신의 양쪽 볼에 댄 여인이 활짝 미소 짓는다.
그러자 곧 그 얼굴이 괴기하게 비틀어지더니, 우두둑우두둑 뼈가 이리저리 뒤틀리고 근육이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며칠씩이나 생각이 날 정도로 끔찍한 모습.
하지만 차츰 안정이 되어가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는 낯익은 미모의 여인이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밑에서 검은 부채를 꺼내 들고는 얼굴의 반을 가리며 여인이 눈웃음을 짓는다.
"흑선마희?!"
묵현이 깜짝 놀라 묻는 질문에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잘 느껴봐라. 교묘하긴 하지만 내기의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묵현으로서는 그 차이를 느끼기 힘든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그 정도로 내기를 감추는 능력도 외형 변환만큼이나 보통이 아닌 여인이었다.
"정해진 형태가 없고, 원하면 언제든 새 모습을 만든다 하여 저를 아는 분들은 절 무형천모(無形千貌)라고 부른답니다. 과거 천수향님이 아직 젊은 시절, 이 기술을 일부 가르쳐 드렸었지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절 아는 분들만이 그리 부른답니다. 후훗."
"너 정도의 고수가 어찌 미오왕 밑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 말에 방긋 미소 짓는 루주.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다는 걸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묵현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두 분께선 구체적으로 무얼 알고 싶어 오셨는지요?"
"일단 대장군과 그 세력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