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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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화
1화
序
바람은 표표하고, 구름은 자유로웠다.
벼락은 천지를 쪼갤 듯이 강했으며, 비는 온 세상을 덮었다.
강호에 바람[風]이 불고, 구름[雲]이 몰려오더니 벼락[雷電]이 치고, 비[雨]가 내렸다.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이치를 깨달아 절대의 힘을 지닌 자들.
그들은 커다란 세력도 이루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을 추종하는 가신들만 데리고 천하에 유아독존했다.
절대사천좌(絶對四天座).
강호는 그들을 절대사천좌라 불렀다.
한데 그들이 절대사천좌로 불린 지 십 년이 넘어갈 즈음, 동해에서 한줄기 분노의 광풍이 불어와 중원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해, 추색이 만연한 가을의 어느 날, 분노의 광풍과 풍운뇌우가 동정호 서쪽 천자산(天子山)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르르릉! 쩌저저적!
콰아아아아!!
천자산을 뒤흔든 광풍폭우와 뇌성벽력은 석양이 떨어질 무렵 시작되어 다음 날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날 밤, 천자산의 수십 개 암봉이 무너져 내리고 지축이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강호에 소문이 돌았다.
―절대사천좌가 정체불명의 괴인에게 당해 중상을 입고 어디론가 숨었다!
소문이 천하를 뒤덮자 강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천하의 그 누가, 하늘의 힘을 얻은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단 말이냐?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호인들은 그들이 패권을 다투다 양패구상했다고 생각하고는, 은밀히 그들의 흔적을 쫓았다.
무려 수십 년 동안을. 그들이 지녔던 무공을 노리고!
추적은 무려 오십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작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완전한 실종.
그제야 강호인들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했다.
정파도, 마도사파도,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했던 그들의 무공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그들의 염원 덕분인지, 절대사천좌의 무공은 삼백 년이 흐르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序_2
절강성 상산에서 동남쪽으로 이백여 리 밖에 떠 있는 작은 섬, 비룡도(飛龍島).
거친 파도, 곳곳에 산재한 암초, 그리고 섬을 둘러싼 채 휘도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소용돌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뿌연 안개가 사시사철 끼어 어부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 곳이 바로 비룡도였다.
게다가 섬의 주위가 대부분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은 그곳을 아예 외면하다시피 했다.
드나들기도 힘들고, 들어간다 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곳.
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 정한도에서 삼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비룡도는 태곳적부터 무인도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월의 찬바람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한 사람이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비룡도가 점처럼 보이는 정한도에 나타났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섬사람들을 붙잡고 비룡도로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섬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미쳤수? 누구 죽이려고 작정했수?”
“접근하기도 전에 배가 부서져서 물에 빠져 뒈질걸?”
만약 그의 옆구리에 시커먼 칼만 꽂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 욕부터 날아갔을지 몰랐다.
결국 그는 조각배 한 척을 사서 아이와 함께 직접 비룡도로 향했다.
그 사실을 안 정한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씹어댔다.
“미친놈! 죽으려면 저만 죽지, 왜 죄 없는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가누?”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욕을 한 사람들을 비웃듯이 일 년에 두어 번씩 비룡도를 나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갔다.
한 해, 두 해…… 그렇게 십칠 년이 흘렀다.
제1장. 네가 좀 가줘야겠다
1
콰과과과!
가공할 소용돌이가 굉음을 일으키며 휘돈다.
동해의 바닷물을 모조리 삼켜 버릴 것만 같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질 정도다.
죽음의 소용돌이, 사자탄(死者灘)은 비룡도 일백아홉 개의 와류를 모조리 합친 것보다 더 사납고 거칠었다.
하긴 오죽하면 인근의 섬사람들이 지옥의 입구라고 부를까.
그런데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사자탄 바로 위 십 장 높이의 바위 위에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중년인은 물끄러미 사자탄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고함을 치듯이 이름 하나를 불렀다.
“무환아!”
고함 소리가 너울져 사라질 즈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시커먼 머리가 나타나더니, 하얀 얼굴이 쑥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 그것도 이제 스물 살 정도 되는 벌거벗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서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바위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잠깐 나와 봐라. 할 말이 있다.”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요?”
“나와 봐, 인마!”
잠시 후.
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투박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중년인과 청년이 마주 앉았다.
탁자에는 술병이 하나, 잔 하나, 약간의 건포만이 놓여 있었다.
어부나 입을 듯한 허름한 마의, 아무렇게나 자란 거친 수염. 중년인은 언뜻 보면 단순한 어부로 보였다.
그러나 탁한 듯하면서도 심해처럼 깊어 보이는 눈.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겁게 느껴지는 진중한 표정은 그가 결코 단순한 어부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년이 말없이 술잔을 가득 채우자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너에게 이 아비가 살던 곳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만…….”
청년은 묶지도 않은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버릇처럼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으로 턱을 받쳤다.
‘했었죠, 그것도 수십 번이나.’
아니나 다를까, 중년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과 한마디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살던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존재했었다.”
어쩌면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같을까?
청년은 힐끔 중년인을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곧 귀에 딱지가 내려않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한시도 서로를 가만두지 않았지.
웃기는 일이었어.
한때는 천하를 쥐겠다고 형님 아우 하더니, 천하에 우뚝 서게 되니 서로의 정당함을 인정치 않고 흑백(黑白)을 따지기 시작한 거야.
백 쪽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말했지.
흑이 바뀌어야 한다고. 힘만 믿지 말고 인의로써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그래야 자신들이 영원할 수 있다고.
그러면 흑 쪽에 있는 자들이 반박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세상은 힘으로 다스려야지, 고고한 체하며 인의를 떠들어댄다고 해서 다스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나는 대체 누가 옳은지 알아보기 위해 제삼자의 입장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니 보이더구나. 굳이 멀리 볼 필요도 없었어.
고고한 체하던 자들은 말로만 인의를 떠들고, 힘을 앞세우던 자들은 그 힘으로 남을 핍박하는 일에만 열을 올렸으니까.
결국 백은 병적으로 흑을 싫어하게 되었지. 가까이 있는 것도 참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일만 터지면 흑을 무조건 공격했고, 외진 곳으로 몰아내려 혈안이었어.
그리고 흑은 또 백을 겉만 화려한 독버섯처럼 여겼어. 위선자들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드러내는 자신들이 더 진솔하다면서.
위선에 찬 자들과 욕망에 찬 자들의 끝없는 다툼. 그걸 본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갈 즈음, 나는 또 다른 진실을 알게 되었지.
본래 형제처럼 지내던 그들. 그러면서도 상대를 그리도 싫어하던 그들. 그들의 다툼을 말리려던 부모님이 힘들고 외롭게 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그 일에 구룡의 주인들이 대부분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안 순간, 구역질이 나오더구나.
창자가 모조리 딸려 나올 것만 같은 지독한 구역질이 말이다!
나는 사흘간 술을 마셨고, 하루 종일 모든 것을 쏟아내고는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눈을 뜬 다음 날, 결국 그곳을 몰래 빠져나와 장강을 내려가는 배에 몸을 싣고 말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탁!
파르르 눈빛을 떤 중년인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마주 앉은 청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때 이 아비 나이 열아홉이었다.”
청년은 술병을 잡아가며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세요? 그러니까, 결국은 어른들의 권력 다툼이 답답해 보이고 짜증나서 집을 뛰쳐나오셨단 말이잖아요? 가.출. 말이에요!”
순간 중년인의 거친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년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건너편의 비어 있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자신은 건포 하나를 집어 입 안에 구겨 넣었다.
“거기다 술기운에 천룡비고를 뒤져 무공 비급과 무기까지 챙겨 가지고 나오셨다면서요?”
중년인의 술잔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래 봐야 수백 권 중 일곱 권에 불과했어. 무기는 달랑 하나고.”
“문제는, 그중에 외부로 반출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두 권의 금서(禁書)가 섞여 있었다는 거죠. 오죽하면 아버지 집안에서 초특급 추종령이 떨어졌겠어요?”
“끄응, 그때 하마터면 사촌형제들의 손에 죽을 뻔했지. 나쁜 새끼들, 내가 뭐 그게 금서인 줄 알았나? 아마 그때 순순히 줬으면 자기들이 몰래 다 챙겼을 걸?”
이를 악다문 중년인의 잇새로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를 죽였겠지. 그놈들은 내 자질을 시기하고 기회만 되면 해치려 했었으니까.”
청년이 그런 중년인을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보다는 원한이 깊었겠죠. 아버지가 숙부들을 매일같이 두들겨 팼다면서요? 그것도 비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당한 걸 생각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손을 썼을지 안 봐도 훤하다.
원한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하지.
하지만 아버지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거야 자기들이 실력이 없어서 맞은 거지! 비무 아니냐, 비무!”
중년인이 빽 소리를 지르자 청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비무하자고 해놓고 심심하면 팔다리를 부러뜨렸으니, 당한 입장에서 좋아할 리가…….”
그러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또 하시는 겁니까? 안 잡던 무게까지 잔뜩 잡으시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년인은 갈증이 나는 듯 술잔을 다시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중년인이 음울한 목소리로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제 정한도에 갔다가 한 가지 소문을 들었다.”
소문?
무슨 소문이기에 천하태평인 아버지가 어머니의 기일이 지난 지 보름이 넘었는데도 저렇게 궁상을 떠는 걸까?
청년은 창문 밖의 햇무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군.’
그때 중년인이 말했다. 어느 때보다 처연한 목소리로.
“정한도에 배가 들어왔는데, 그 배의 선부들이 술 마시면서 그러더라. 구룡성에 내분이 일어나서 한때 내가 가장 사랑했고 증오했던 그들이 반대파에 밀려 죽거나 다쳤다고. 조부님, 숙부님, 형제들이……. 한 달 열흘 전, 네 생일이었던 팔월 스무여드레 날에.”
청년은 차마 그 말에는 장난스럽게 대꾸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한마디로 집안에, 그것도 아버지 집안에 난리가 났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우리가 언제 그곳 생각하면서 살았나요?’
중년인은 청년의 관자놀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고민했지. 하지만 결론은 결국 하나더구나.”
청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중년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고민? 코까지 골면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주무셔 놓고 무슨 고민을 했단 말입니까?!’
하지만 중년인은 청년의 그런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커다란 대못을 박듯이 말했다.
“내 아들, 이무환! 네가 좀 가줘야겠다!”
그제야 청년, 이무환이 반응을 보였다.
굵고 긴 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슬쩍 꺾어지고, 흑백이 뚜렷한 눈이 가늘어져 검은 눈동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왔다.
“가서 다 때려 부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