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7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71화
271화. 깨달음
천강이 거리로 내려가 발을 옮긴다. 중천의 떠오른 태양이 매섭게 비추나, 가을에 접어든 계절이라 그런지 뜨겁진 않았다.
'어쩌면 딱 싸우기 좋은 날일지도.'
오고 가는 인파를 따라 발을 옮기길 잠시, 누군가 천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르는 얼굴이나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청루의 루주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이지?"
"그대를 막으러 왔습니다. 오늘 황궁에 들어가 태감과 싸우는 건 멍청한 짓입니다. 돌아가 때를 기다리십시오."
"무슨 때?"
"어차피 현 황제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황제가 승하하면 황실의 힘은 자연스레 약해질 터."
즉, 황제가 죽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잔 뜻이다.
그러나 천강이 고개를 젓고는 루주를 지나쳤다. 그녀가 천강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물었다.
"혹 애들 때문에 그런 겁니까? 겨우 그깟 애들 때문에 수만의 목숨을 던지는 책략을 선택하다니요!"
그깟 애들이라.
천강이 걸음을 멈추자 청루의 루주가 자신의 생각을 설파했다.
태감이 지금은 오로지 무림을 없애는 일에 열중하고 있지만, 무림인이 다 사라지고 나면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결국은 일반 사람들까지 손을 댈 것이고. 결국 천강이 겪었던 그 전란의 세대가 되풀이될 거라고도.
"확률상 지금은 승부를 내기에 좋지 않습니다. 때를 기다릴 시기입니다."
그러나 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마교에 들어서고 무림 생활을 하며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명분이니 협이니 때니 대의니 그런 것 따질 시간에, 나와 내 주변을 지켜야 한다는 거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 주변 사람을 버리고, 대의를 외치며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용해 먹고. 그놈의 명분이나 협 때문에 가족마저 외면하고.
그리 떳떳하게 행동하던 자들도 정작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걸 숱하게 봐왔다.
물론 그러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천강은 그들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주변 제일 가까운 이들의 시체를 밟아,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게 그리 중요한가?
"내겐 말이다. 그깟 애들 몇몇이면 넉넉하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도 하루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감사하고, 칼 맞아 죽을 걱정 없이 편안히 낚시나 즐기며, 아는 이들과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원하는 것.
그러나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태감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을 주관하고 지켜보는 하늘은 끝까지 천강을 몰아세울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죽음으로 내몰며.
사람은 간사하기에, 한 번 못된 짓을 하게 되면 계속하게 되는 동물. 오늘 이 아이들을 버리게 된다면 다음 싸움 때에도 같은 짓은 더 쉽게 행하게 되리라.
어쩌면 완벽한 승리를 바라다가 모든 걸 잃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
"그리고 난 확률 운운하는 걸 싫어한다. 숫자놀음이야 지침이 될 뿐, 그게 핵심이 돼선 곤란하지."
"그래도 그렇지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요!"
"사람이란 자신의 뜻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지만, 때론 굽히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이, 이익! 누가 무림인 아니랄까 봐, 이런 꽉 막힌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음. 내 살다 살다 저런 말도 다 듣네. 나름 개방적이고도 유연한 사고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야.
다시 발을 옮기는 천강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씩 황제가 기거하는 궁, 자금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곳에는 수만의 병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천강이 그 정문 앞에 떡하니 서는 순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입구를 만들었다.
천강이 자금성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황군들이 2열로 쭉 도열해 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었기에.
'이것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힘.'
병사 하나하나에서 기백이 느껴진다. 자부심 또한.
- 군기가 바짝 들어있구나.
- 훌륭한 군대로다.
이 끝에 태감이 날 기다리고 있단 말이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늘 생사를 겨루는 싸움을 해온 천강이지만, 지금과 같은 호적수는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항상 싸우면 다수의 적과 싸웠고, 끽해야 암살에 시달렸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천강보다 강한 상대라고 해봤자 투파창귀 정도였으나, 그조차도 정작 싸움의 순간엔 천강에게 한참 못 미쳤다.
그에 기대가 되었다. 아마 놈도 그렇기에 그 잠깐을 못 참고 새벽에 찾아왔던 것이겠지.
천강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인다. 수많은 장인들을 불러 짓게 만든 자금성의 내부는 가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할 만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그 모습을 가만 구경하는데, 천강의 걸음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 왜 그러느냐?
'지금 나만 봤나?'
- 뭘 봤길래 그런가요, 소년?
천강의 시선이 한 곳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신병이기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 소년?
'기분 탓인가?'
아냐. 그럴 리가.
분명 보았다. 저 멀찍이서 두 저승사자가 나를 보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걸.
처음엔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그곳에 서 있던 건 분명 추혼살개였다.
'하…….'
그제야 천강은 태감과의 마지막 결전이 다가왔음을 비로소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죽든 천강 자신이 죽든, 오늘 한쪽은 그 끝을 고해야 한다는 것도.
거대한 공간에 들어섰다.
좌우로 황군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정예병들이 도열해 섰고, 천강이 들어선 반대편으로는 동창의 일원들이 자리했다.
그 앞으로는 초아와 연화, 청청이 포박돼 천강을 바라보는 중이었는데, 점혈을 당했는지 말 한마디 못 하고 간신히 숨만 쉬는 꼴이었다.
그래도 태감의 말대로 몸에는 상처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천강이 발을 옮겨 그 공간의 중앙으로 나아가자, 그 반대편에서 태감이 나아와 천강과 20보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어둠 속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으나 밝은 대낮에서 본즉, 태감은 인간이라 볼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온통 시커먼 피부에 새까만 이빨. 그나마 다른 빛깔이 있다면 눈인데, 그 눈에서조차도 용암의 불꽃이 이는 것처럼 붉은 기운이 형형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 오고 마는군. 매일 이날을 꿈꿔왔지. 네놈과 이 장소에서 만나는 꿈을 말이야."
"근데 참 요란하게도 준비했네."
"아, 이거 말인가?"
태감이 양팔을 크게 펼치고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천강과 태감 주위로는 1만의 군사가 창과 칼을 지닌 채 대기 중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네놈을 죽이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
"그럼?"
"누군가는 봐야 전할 것 아닌가? 무림의 대표가 황실의 사람에게 두 무릎을 꿇는 걸 말이야."
"그래. 그랬지. 그러나 그 무릎 꿇는 대상이 네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보지?"
천강이 목을 좌우로 풀었다. 태감 또한 손목과 발목을 풀기 시작했다.
"아아. 인간이 고작 개미에 물려 죽는 걸 보았나? 생각할 가치도 없는 가능성인 게지."
"그럼 오늘 세상이 놀라겠군."
"응?"
"개미에게 물려 죽은 첫 인간의 탄생이 될 테니까."
"놈!"
천강과 태감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 공터 정중앙이었다.
쿠콰콰콰콰-
서로가 서로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그것을 반대 손으로 막으면서 강한 공기파가 터져 나온다.
그것은 단숨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바짝 낮추게 만들었다.
쾅. 쾅. 콰콰쾅.
두 사람의 주먹과 발이 수차례 부딪쳤다. 환한 대낮에 불꽃놀이라도 하듯 불꽃이 번쩍번쩍 일었다.
"이대로 끝까지 싸울 생각이냐? 어서 네 무기를 꺼내지 그러나! 하하핫!"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태감.
천강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한 대로, 태감은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과연 마지막으로 싸웠던 그때 그 태감이 맞는지조차도 의문이 들 정도로.
'힘도. 속도도. 모든 게 내가 밀린다.'
그나마 백호의 가호와 지천뇌공이 있어서 망정이지, 두 사람의 순수한 외공 위력의 차이는 거의 곱절에 가까웠다.
'북명신공이 없었다면 지금쯤 뼈와 근육 곳곳이 부서졌을 터.'
이대로 싸워본들 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천강이 독목신공을 사용해 오른발을 빙그르르 움직였다. 그에 따라 회전하는 몸.
태감의 발차기가 한발 늦게 날아들고, 그걸 왼팔로 흘리며 천강의 오른팔이 뒤로 쭉 내뻗었다.
그러자 손아귀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검은 안개에서 천강의 의지를 받아 흑색 절굿공이가 날아온 것이다.
그것을 꾸욱 꼬나 쥔 천강이 태감과 함께 몸을 회전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몽둥이를 태감에게 휘둘렀다.
쿠구구구구구.
단숨에 공터 가장자리까지 밀려난 태감의 신형.
그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더니, 손으로 몇 차례 주무르며 미소를 띠었다.
"하아. 역시 그게 문제군. 너와의 싸움을 준비하며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게 늘 문제였지."
태감에게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바로 저 절굿공이였기에.
천강이 몽둥이를 한쪽 어깨에 메고는 삐딱하게 섰다.
"그래서 방도는 찾았나?"
"물론."
천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심안(心眼)으로 본즉 태감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환상이 보이더군. 아무래도 하늘은 너의 죽음을 원하는 모양이다."
그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은 팔찌였다.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천강이 단숨에 땅을 박차고 태감에게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태감의 행동이 더 빨랐다.
태감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떠오르는 팔찌. 이내 그것에서 강렬한 힘이 발산되더니, 천강이 가지고 있던 절굿공이를 홱 잡아당겼다.
'무슨?!'
몽둥이가 천강의 손아귀를 벗어나 팔찌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검은 안개에 있던 신병이기들까지 죄다 날아가 그것에 달라붙었다.
"하하핫. 보았느냐! 너도 이것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들어본 적 있다. 글로 본 적도 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도 꽤 두루 알려져 있으니까.
상대의 모든 무기를 끌어당겨 무력화시키는 무적의 보패.
"……금강탁이로군."
금강탁.
서유기라는 각 지역마다 내용이 좀 다른 소설에 나오는 보물이다.
태상노군이 만든 것으로, 그저 허공에 한 번 던지면 상대의 모든 무기를 뺏어오는 어처구니가 없는 능력을 가진 물건이었다.
'근데 그게 실제로 있었다고?'
보는 순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가, 천강이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신수 백호도 있는데 금강탁이 없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자고로 없는 사실을 일일이 다 지어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어렵다. 어디서 본 게 있으니 그런 소설을 만들어 낸 거겠지.
- 소년! 이것 좀 어떻게 해보거라!
- 모, 몸이 꼼짝을 안 하느니라!
심지어 그곳엔 탐(貪)도 잡혀 있었고, 전투력이라고는 쥐뿔도 없을 것 같은 천해지경조차 끌려가 파닥거리는 중이었다.
'최악의 상황이군.'
태감이 뒷짐을 지고는 천강에게로 나아온다. 그의 입가엔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무기를 하나쯤은 남겨줄 걸 그랬나?"
"……."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저걸 내가 몇 번 시도해봤는데 말이야. 하나만 남겨두고 그런 건 안 되더군. 평범한 무기라도 건네주고 싶지만……."
태감이 정예병이 들고 있던 칼을 가져와 천강에게 던진다. 천강이 그걸 집자, 곧바로 홱 금강탁에게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봤지? 무기라 판단이 되면 죄다 저 꼴이 되어버려서 말이야."
천강의 입이 다물어졌다.
역시 오늘 이 자리에 섰던 건 너무 오만했던 걸까.
무림맹 사람들 말대로, 마교 측 말마따나, 그리고 오늘 만난 청루 루주의 이야기대로, 때를 미뤘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천강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도 암담한 현실에.
그런데 그때, 천강의 오른쪽 소매 안쪽으로 무언가가 툭 걸렸다.
왼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 본다.
그것은 침이었다. 무제(武帝)가 천강에게 건네주었던.
'천해지경도 달라붙는데 이 침이 안 달라붙었다고?'
천강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한 깨달음이 내려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