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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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69화
269화. 변성대왕을 쓰러뜨리다
각 지옥을 관장하는 대왕의 자리는 그 당사자가 후임을 선택해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이가 그것에 간섭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 권세를 지닌 자가 죽으면 되는 것.
명계는 사실상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라 죽는다는 게 존재하질 않으니, 즉 죽기 직전까지 상대를 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성대왕의 신위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살아생전에도 싸움을 꽤 했던 모양인지, 그의 도끼질에 다른 대왕들이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그와 자웅을 겨룰 만한 이가 있다면 전대 천마인 송제대왕과 지옥의 최고 연장자인 오도전륜대왕뿐.
하지만 그들조차도 이렇다 할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크하하하! 고작 책이나 펼쳐 보며 서생질이나 하던 네놈들에게 나 이규가 죽을 성싶으냐!"
변성대왕이 몸을 웅크린다. 그러자 그에게로 검은 회오리바람이 일며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시왕(十王)들. 주위 자연들을 변형시켜 그것에 대항해보나 소용없었다.
모든 걸 흡수하던 변성대왕이 양팔을 크게 펼치며 도끼들을 내던졌다. 그러자 도끼가 호선을 그리며 주위의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하하하하하핫!"
싸움은 말 그대로 대패.
죽지만 않았을 뿐, 시왕들이 잘린 몸뚱어리들을 붙잡고 신음했다.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도끼들을 잡으며 변성대왕이 호언했다.
"하! 이런 것들이 같은 시왕이라고. 진즉에 다 모가지를 날려버릴 걸 괜히 몸을 사리고 있었구만!"
이규 그는 대왕이 된 기간으로 치면 딱 중간. 자신보다 위로 있는 네 왕들의 실력을 알지 못하는 그는 줄곧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숨긴 채 은밀히 풀어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 민낯이 다 드러난즉, 그는 조금도 거리낄 게 없었다.
"네놈들을 다 죽이고, 이 지옥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다스리겠다!"
그러고는 터져 나오는 광소에, 천마와 오도전륜대왕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 둘은 그래도 무인(武人) 출신. 조금 전 일격을 어렵지 않게 파훼한 자들.
만약 그들이 날아드는 도끼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다른 시왕들은 지금쯤이면 모두 파편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송제대왕. 그대가 좌측을 맡게."
"그리하지."
굳은 얼굴로 자세를 잡는 두 대왕. 그들의 싸움을 본 천강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 겉으로 보이는 행태나 기세만 자연경이지, 현경 수준밖에 안 되잖아?'
- 그러게요, 소년.
- 아무래도 지금껏 제힘을 온전히 써볼 기회가 없었으니, 더 그런 걸지도 모를 일이지.
그 말이 맞았다. 현재 이규와 무기를 맞대고 있는 두 대왕은 현경 수준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고, 나머지 시왕들은 싸우는 자세부터가 글러 먹었다.
새삼 무(武)를 익히는 일에 기본기…… 즉 형(形)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대로 가만 있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 나도 슬슬 움직여볼까.'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신병이기들이 그를 말렸다.
- 아서라. 그래도 명계의 왕들이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 참으세요, 소년!
'아냐. 걱정 마. 재들 밑천 다 드러났어.'
특히 저 변태 같은 변성대왕도 말이지.
무엇보다 맞은 걸 되돌려주는 건 직접 해야 더 시원한 법.
파팟-
세 시왕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명계의 하늘 위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광풍이 일고, 대지가 산산조각이 나 하늘 위로 솟구친다. 강기가 부딪쳐 이는 검은 불꽃은 화르륵 타올라 땅 위로 화려하게 비산했다.
그 속에서 천강의 신형이 조용히 녹아들었다.
"크하하하하핫!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냐! 이런 애송이들 같으니라고!"
"피에 굶주린 악귀가 말이 많구나!"
오도전륜대왕이 우편에서 연격을 먹이며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 좌편 뒤쪽 사각으로 들어간 송제대왕의 검 끝에 강맹한 기운이 어렸다.
천마신공 파검결 제4식 파천일검.
거대한 기운이 온 하늘을 뒤덮는다. 그것은 이내 거친 파도가 되어 전방에 있는 모든 걸 뒤덮었다.
"오오?"
그걸 흥미롭게 바라보는 변성대왕 이규.
그는 그 일격을 피하는 대신 자신이 들고 있던 도끼를 홱 휘둘렀다. 그러자 파도는 갈라지고 그 기술을 막 펼친 송제대왕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젠장."
"하하하핫. 즐겁구나! 직접 몸으로 뛰어 피를 보는 이 즐거움이란!"
이를 환히 드러낸 채 변성대왕이 앞으로 나온다. 잘린 몸뚱어리를 다 회복한 다른 시왕들과 그에 맞서 싸운 두 대왕의 얼굴엔 패색이 그득했다.
그렇게 싸움의 향방이 결정되려는 순간이었다.
"응?"
이변이 생겼다. 변성대왕이 돌연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의 뒤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 네놈! 뭐 하는 것이냐!"
뭐하긴. 네놈 기 빨아먹고 있지.
조금 전. 천마의 강한 일격을 변성대왕이 쳐내는 순간, 천강은 조용히 그의 등짝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바로 북명신공을 사용.
그의 내기가 빠르게 천강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강맹한 기운이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으아아! 떨어져라! 떨어져!"
변성대왕이 발악을 했다. 욕설을 하고, 들고 있던 도끼로 뒤에 있는 천강을 향해 휙휙 휘둘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무려 천령초를 수천 개 먹어 강화한 몸이다. 어떤 내공을 싣든 북명신공이 모조리 빨아들이는 상황이고.
변성대왕이 자신의 목을 두른 천강의 팔을 힘으로 풀려 하나 오히려 힘이 달리고, 도끼로 후려치려 하면 순간적으로 손을 슥 빼낸다.
그로 인해 피를 보는 건 오히려 변성대왕 자신이었다.
"이런 모기 새끼가!"
도끼를 버리고는 천강과 씨름을 하는 변성대왕.
'발악해도 소용없어.'
근접전에서 북명신공을 이길 무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백호의 가호로 움직임이 배가 된 천강의 속도는 대응하기에 너무도 까다로웠다.
'이미 등을 내게 잡힌 시점에 끝난 싸움이라 할 수 있지.'
자연경이 무서운 건, 자연을 내 마음대로 다룬다는 점. 눈으로 상대의 모든 걸 파악해 피하고 파훼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기만 해도 상대를 영면하게 만드는 심검(心劍)을 쓸 줄 안다는 점.
이 세 가지이나, 심검은 애초에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이 녀석은 자연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몰랐다.
그나마 까다로울 수 있는 게 눈이었는데, 뒤편에 매달려 이리저리 피해대는 천강을 녀석이 볼 수 있을 리 만무한 상황.
"마, 말도 안 돼. 이 내가……."
다른 아홉의 시왕들을 상대로 홀로 승기를 잡고 날뛰던 변성대왕의 두 무릎이 결국은 털썩 땅에 닿았다. 무려 두 시진에 걸쳐 내기를 빨아들인 결과였다.
- 탐(貪)이 있었으면 더 손쉽게 끝났을 텐데요.
'그러게.'
내기를 다 빨려 쓰러진 변성대왕을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시왕들이 다가왔다.
영체를 어떻게 초주검 상태로 만들려나 했더니, 그들은 옥졸들의 무기를 빼앗아 그를 찔렀다.
그러자 변성대왕이 피를 토하고. 그에게서 어떤 기운이 빠져나와, 구덩이 속에서 형벌을 받고 있던 한 망자에게 스며들었다.
"변성대왕의 직위가 해제되었다."
"이규. 그대는 이제 변성대왕이 아니다."
"망자 송학이여. 그대가 이제는 이곳 독사지옥을 관장하는 변성대왕이다."
힘을 잃은 이규는 오도전륜대왕에게 끌려가 흑암지옥 행에 처해지고, 그렇게 명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시왕들이 천강에게 나아와 예를 표한다.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그대를 도우려 했는데, 도리어 우리가 그대 도움을 받게 됐소."
"그러게 싸움 연습들 좀 해. 내가 보니까 주어진 힘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더만."
"하핫. 우리는 판관.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데 힘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오."
뭐 그건 그렇지. 틀린 말이 아니라 할 말이 없네.
천강이 볼을 긁적이며 화제를 바꿨다.
"근데 판결 내리는 게 재미있나? 왜 이런 짓을 해? 적당히 남에게 맡기고 그냥 환생하지."
그러자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 일을 잘 수행하고 나면, 이후 선계로 올라가 편히 살 수 있다는 것.
"힘을 다루는 건 그때 가서 익혀도 늦지 않소."
그런 건가. 뭐 일리가 있구만.
천강이 신병이기들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시왕들이 명계의 문 앞까지 따라와 천강의 마중을 나왔다.
한쪽에는 영혼들이 줄을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저승사자 둘이 이마를 땅에 박고 있었는데…… 얼굴을 가만 본즉 천강을 이곳으로 끌고 온 녹호와 가렴이었다.
그들 뒤로 추혼살개와 그 동료가 환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시왕들이 천강에게 물었다.
"영웅호걸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빚이 있네. 혹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 보게."
천강이 송제대왕, 전대 천마를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내가 뭐 받겠다고 일한 것도 아니고…… 됐어. 그래도 영 갚고 싶다면, 너희들도 이거나 써주던가."
그러며 천강이 손을 들어 보였다. 천강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손바닥을 본 시왕들의 눈엔 놀라움이 어렸다.
대체 뭐기에 저런 표정들을 짓는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는 천강에게 조심스레 묻는 시왕들.
"정말 그것으로 받을 텐가? 그대에겐 필요가 없을 것 같네만."
뭐야. 이거 좋은 거 아니었어?
천강이 홱 고개를 돌려 송제대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이 교주 새끼가?'
시왕들이 하나씩 나와 천강과 악수를 한다. 그렇게 천강은 찜찜한 보상을 받은 채 명계를 떠나야 했다.
- 그냥 교주 말 무시하고, 생사경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받지 그랬어요, 소년?
'너희들도 봤잖냐. 얼마나 싸움을 더럽게 못하는지.'
대부분 현명한 자들로 왕을 뽑는다더니, 무(武)하고는 꽤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칼 찬 놈이 판관 노릇에 어울리진 않지.
-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마라. 하나는 챙겼잖느냐.
그래. 저승사자의 뒤를 따르며 천강이 슬쩍 검은 안개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따끔한 감촉이 이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독사지옥을 지키는 옥졸이 쓰던 창.
영혼에 타격을 주는 이 영혼의 창이라면, 태감(太監)에게 제대로 일격을 먹을 수 있으리라.
'아무튼 요 근래 자연경급 존재들을 볼 일이 참 많네. 강해지다 보니 노는 물이 좀 달라져서 그런 건가.'
그래도 무제(武帝)와 시왕들을 보며 크게 깨달은 게 있다. 같은 자연경이라도 차이가 꽤 크다는 걸.
천강이 천해지경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무제(武帝)의 사념님. 혹시라도 제가 생사경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팔랑팔랑?
"혹시라도 하는 말입니다.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제 남은 건 넷. 태감과 싸워 이긴다면, 생사경엔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인단 말이지.
"자연경에 도달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천강의 질문에 천해지경이 물끄러미 천강을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 고심을 하는 듯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그 고민은 약 일각(一刻) 정도 이루어졌고, 이내 슥슥 서책 위로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자연경에 도달하는 방법! 그것은…….
『 저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 하는 자여. 나 이외에 구백의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그리하면 그대가 원하ㄴ……. 』
천강이 천해지경을 꾸깃꾸깃 움켜쥐었다.
'뭐? 백 개도 힘들어 뒈질 뻔했는데, 구백?'
자연경 따위 안 한다 안 해. 생사경으로 만족하고 살란다, 썅!
다른 개체를 이해하는 수련에 아주 질려버린 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