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6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66화
266화. 저승사자들을 이용해 먹다
칠흑 같은 어둠이 한참을 이어졌다.
저 밑으로는 으스스한 느낌이 물씬 드는 음기와 미약한 안개가 자리했고, 그 외엔 온통 어둠, 어둠, 어둠이었다.
그래도 앞선 저승사자들에겐 늘 다니던 길이라는 듯 나아가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것들아, 잘 따라오고 있느냐? 여기서 조금만 옆으로 새도 다른 세계로 똑 떨어지니 허튼짓할 생각일랑 말거라."
"……."
녹호의 말에도 영혼들에게선 별다른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들의 이마 위에 붙은 부적이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지 않나 싶었다.
물론, 천강의 머리에 붙은 건 북명신공에 의해 진즉에 그 효력이 다해 버렸지만.
'그건 그렇고, 제아무리 현경이라도 나 정도가 아니면 명계로 넘어가는 건 어림도 없겠구만.'
벌써 한 시진 째 이동 중이다. 영혼이 아닌 이상 날아서 이동해야 하는데, 벌써 천강은 그 많은 내기의 3할 가까이를 소모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나아가자, 저 멀리 담녹색의 안개로 둘러싸인 한 대문이 눈에 보였다. 저승사자들이 그 앞에 서는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가 명계(冥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곳곳에 천강이 들어온 것과 같은 문이 세 개가 자리하고, 그 중앙으로는 넓은 공터가 존재하고 있다.
그 공터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일렬로 서 있었는데. 뭐 하는 건가 싶어 그 제일 선두로 시선을 옮기자, 저승사자가 손짓할 때마다 영혼 하나씩 문짝이 달리지 않은 어떤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문지방의 중심은 짙은 어둠으로 그득해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으나, 대략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심판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 네놈들은 저기 서거라!"
지시에 따라 줄 맨 끝줄로 이동하는 영혼들. 천강 또한 따라 이동하나, 녹호와 가렴이 그를 제지했다.
"야. 넌 우리 따라와."
천강을 이끌고 흑백무상이 한쪽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떡하니 발을 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손귀님. 손귀님."
"으음. 누구냐. 감히 내 잠을 방해하는 놈이!"
"녹호와 가렴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손귀란 자에게서 엄청난 기백이 터져 나왔다. 그 기운은 능히 생사경에 필적할 만했다.
'사고치고 다니면 안 되겠군. 일개 감독이 저런 수준이라니.'
천강이 조용히 그러한 마음을 먹는 사이, 두 저승사자가 그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천강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저희가 구천을 떠도는 영혼 하나를 구제해 왔습니다."
"오호? 허구한 날 놀고먹고 사고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웬일이더냐?"
"에이. 손귀님도 참. 그거 다 거짓입니다요. 저희같이 정직하고 선량한 흑백무상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러나, 가렴?"
"아무렴! 흑백무상이 다 우리와 같으면 손귀님이 이곳에 와 있을 이유도 없지!"
두 저승사자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손귀가 막대기를 들고는 그들의 면면을 가리켰다.
"아무튼 너희 둘…… 요새 들리는 말이 많아. 그러니 사고 치지 말고 일 열심히 해. 알겠어?"
"예에."
"그래도 이렇게 길 잃은 영혼을 데려왔으니, 다음 진급은 확정이라 봐도 되겠구만."
손귀의 말에 녹호와 가렴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놈의 지겨운 흑백무상 일도 곧 끝나는구나!" 그러한 말도 하며.
"근데 정말 구천을 떠돌던 영혼이 맞느냐?"
손귀의 눈이 천강을 훑는다. 그 시선은 가히 섬뜩한 느낌이 있어, 천강은 최대한 아닌 척 연기를 했다.
'넋을 잃은 연기. 넋을 잃은 연기.'
- 잘하고 있어요, 소년! 조금만 눈에 힘을 빼세요!
명계 하늘 한쪽에서 천강의 얼굴을 보며 신병이기들이 부족한 면을 지적해주고. 조금 있자 미간이 좁혀진 손귀의 얼굴이 탁 풀렸다.
"아무렴 네놈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산 자를 데려오진 않았겠지."
"당연하죠!"
"자, 그럼 이만 쉬러 가 보거라. 이 영혼은 내가 잘 보고를 올릴 터이니."
"예, 잘 부탁드립니다!"
손귀가 팔을 쳐들었다. 그러자 검은 문 옆에서 일을 하고 있던 저승사자가 후다닥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놈 구천을 헤매던 영혼이란다. 먼저 들여보내라."
"예."
그렇게 맨 앞줄로 서게 된 천강.
- 그냥 이대로 들어가도 될까요, 소년?
'나도 몰라. 내가 저승에 한 번이라도 와봤어야지.'
문제가 될 법했으면 금나한이 이야기했을 터. 그냥 까짓거 들어가 보지 뭐.
저승사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신병이기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과연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대신 천강의 앞으로 기나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벽은 마치 검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 외길 끝에는 환한 빛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기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내뺄 기회는 아무도 없는 이때뿐인 것 같은데.'
천강의 몸을 뒤덮고 있던 미약한 어둠이 그 바깥옷까지 전부 뒤덮는다. 감쪽같이 기척과 몸을 감춘 천강은 복도 천장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 조금 있자, 저 빛 너머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호통이 일었다. 어찌나 큰지 세상이 크게 흔들거릴 정도였다.
"이놈! 거 앞에 뭐 하는 게냐! 진광대왕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느냐!"
천강이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검은 문에서 한 저승사자가 튀어나온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 빛 너머로 사라졌다.
"설마 일하던 중 또 존 것이냐!"
"아, 아닙니다. 분명 한 영혼을 막 보낸 참이었는데……."
"몇 번을 설명해야 알아듣느냐. 네놈이 있는 그곳과 이곳에는 큰 시간차가 있다는 걸 말이다!"
문책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설마하니 천강이 중간에 몸을 내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이 부적이 효과가 지속되었다면 그랬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저승사자. 조금 있자, 한 영혼이 나타나 빛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천강의 예상대로, 살아생전 그가 지은 죄를 가지고 판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궁금한데 한번 나가서 볼까?'
- 아서라. 참거라.
- 그 선계인이 그랬잖느냐. 시왕(十王)은 절대 피하라고.
- 이곳에 온 목적을 기억하세요, 소년!
맞다, 그랬지.
이놈의 호기심 때문에 또 큰일 날 뻔했네.
평소처럼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가는 크게 사고를 칠 테니 이번엔 조심하자. 일전에 선계에 올라가 그 주민을 팬 사건이 또 일어났다가는 정말 큰일이다.
천강이 검은 구름으로 된 벽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샛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자, 애들아.'
신병이기들을 끌고 흑운 안으로 사라지는 천강.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 그 길을 조심조심 더듬으며 나아가자, 곧 그들 앞으로 또 다른 복도가 나타났다.
- 머리를 숨기세요!
막야의 외침에 재빨리 머리를 집어넣는다. 스르륵 한 그림자가 천강이 숨어 있는 통로 밑을 지나간다.
- 이제 나와도 돼요.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방금 지나간 게 뭔가 하여 본즉, 저승사자였다. 다만 복식이 외부에서 돌아다닐 때와는 좀 색달랐다.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 이번엔 반대편이니라.
도로 고개를 숨기고는 가만 귀를 기울인다. 저승사자 넷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간다.
"그래서 자네들 휴가는 언젠가?"
"다음 일 마치고 나서일세."
"그 기간에 할 일이 없으면 같이 술 한잔하는 건 어떠한가?"
"자네가 쏘는 거라면 내 생각은 한번 해보고."
"에라이. 순 자린고비 같으니라고!"
그러며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는 저승사자들. 그 행태는 어째 인간사와 상당히 흡사해 보였다.
응당 저승사자라면 무게를 잡은 채 죽은 영혼들을 인도한다는 관념을 가진 천강으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뭐 추혼살개의 말을 들어보면 뇌물도 바치고 진급도 하고 한다고 하니, 저런 행태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여기는 저승사자들이 생활하는 구역인가 보군.'
- 그럼 여기서 훈련을 할 생각이느냐?
'생각해 봐야지.'
천강이 검은 안개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학 노인이 천강에게 건네준 것으로, 이것이 썩어 문드러질 즈음에 이승으로 빠져나오면 된다고 하였다.
일종의 천강이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인 셈.
그래서인지 나뭇가지엔 아직 생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천강이 그것을 도로 검은 안개에 챙겨두고는 복도를 내려다보았다.
'관찰할 대상들도 있고, 시간도 느리고.'
좋네. 다 좋은데, 문제는 대놓고 관찰할 수가 없다는 건가?
- 이것들은 잠을 안 자느뇨?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이들 또한 멍하니 있는 순간은 있을 터.
천강이 복도 천장에 바짝 몸을 붙였다. 다행히 검은 구름으로 이루어진 탓에 저승사자들은 천강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천강이 스르륵 움직여 한쪽으로 나아간다. 그 뒤를 신병이기들이 조용히 뒤따른다.
- 어쩌려고요, 소년?
'아아. 그냥. 왠지 숙소로 가면 틈이 보일까 해서 말이야.'
암살을 할 때도 보통은 목표물들이 제일 긴장을 푸는 그 거처에서 한다. 편안함이 가장 극에 다다르는 잠자리에서 많이들 암살당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셈.
저승사자들도 본디 그 본판은 사람의 영혼인바, 그와 같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에 어디가 숙소인가 돌아다니길 잠시…… 웬걸. 가는 도중 다른 기가 막힌 기회를 포착했다.
"크게 복창 안 하냐! 좌로 굴러!"
"좌로 굴러!"
복도를 쭉 따라 나가던 중, 넓은 공터가 나타나더니 거기서 저승사자들이 신나게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선임이 후임들을 단속하고 있는 모양.
천강이 건물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와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얼차려를 받는 수십 명의 저승사자들을 주목했다.
'어때? 괜찮지 않아?'
- 그래 봤자 하루 이틀 받고 끝나지 않겠느뇨?
천강이 한 생물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추 십 일. 얼차려 받는 이들을 관찰하고 이해하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왕년에 사고 좀 치고 다니면서 암운곡에서 구르고 굴러본 천강에겐 아주 좋은 기회로 보였다.
'시간이야 부족하면 늘리면 그만이지.'
- 응? 그게 무슨.
- 소년, 설마 또 사고를 치려는 건…….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
"시발. 진짜 좆 같네. 이 생활 언제 끝나냐."
"언제 끝나긴. 우리가 이 일 그만둘 때 끝나겠지."
"어휴. 그러고 보니, 곧 진급까지 한다던데…… 그럼 더 대놓고 설칠 것 아냐."
지금이야 그나마 위에 고참과 상관 몇 명이 있다 보니 눈치를 보고 있어 이 정도일 뿐, 이번에 녹호와 가렴이 진급하고 나면 이놈의 짓거리도 더욱 도를 넘어설 게 분명했다.
"그냥 찔러야 하나."
"아서라. 찌른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즉에 사라졌겠지. 괜히 갈굼만 더 심해진다야."
후우우. 어쩌자고 저승사자에 지원을 해서.
길게 한숨을 내쉬길 잠시, 이내 한 저승사자가 후다닥 뛰어와 그들에게 외쳤다.
"야, 다 모이래! 지금 당장!"
"왜?"
"씨발.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건물 뒤편 바닥에다가 그 새끼들 욕을 잔뜩 써놓았단다!"
저승사자 둘이 자리에서 펄떡 일어나 뛰어간다. 그곳에는 이미 이십여 명의 저승사자들이 모여 있었고, 속속들이 추가로 모이는 중이었다.
모이는 족족 바닥에 머리를 박는 사자들.
다 모인 걸 확인한 녹호가 매섭게 뜬 눈으로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어떤 새끼냐?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그의 뒤 건물 바닥 위로는 이런저런 글자들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 녹호, 좆같은 새끼. 선임만 아니었으면 씨발 존나게 쥐어 팼을 건데. 진짜 불쌍해서 내가 참는다. 』
『 가렴, 땅딸보 폐급이 아주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싸우면 한방에 나가떨어질 거면서, 센 척은 지가 다해요. 』
뭐 대략 이런 식.
그런 욕이 건물 뒤편 바닥에 가득 새겨져 있었으니…… 그 앞에서 녹호와 가렴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씨발 안 나와! 엉?!"
"끝까지 안 나온다 이거지? 어디 네놈들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해보자!"
그러고 시작된 얼차려.
"좌로 굴러! 우로 굴로! 확. 씨발. 내기 안 빼?!"
두 저승사자가 수십의 저승사자를 수차례 굴린다.
그 모습을 건물 옥상에서 가만 내려다보는 천강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정말 사악하네요, 소년.
'뭘 이런 걸 가지고. 이건 시작에 불과한데.'
- 네?
얼차려는 이틀 만에 끝이 났다. 그러나 그 뒤로 사건은 계속 터졌다.
"누구냐? 내 옷 찢어 놓은 새끼가?"
흑백무상 전용 옷을 갈가리 찢어 놓고.
"내 숙소에 들어와 난장판 만든 놈 어떤 새끼야!"
그 숙소에 몰래 쳐들어가 아주 개판을 만들어 놓는다.
그로 인해 계속 구르는 저승사자들. 분명 굉장히 화가 날 법한데, 그들은 하나같이 통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육신이 없는 까닭에 몸 굴리는 거야 상대적으로 힘들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남는 건 늘 시간이었던 탓이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아주 체증이 싹 가신다."
"내 말이. 그 새끼들 표정 구겨지는 거 봤나? 큭큭큭."
그 모습을 보고는 황당해하는 신병이기들.
- 이리될 걸 알고 그런 건가요, 소년?
'아니. 내가 볼 때 쟤들도 제정신은 아냐.'
아무튼 천강과 저승사자들은 서로 상부상조를 하고 있었다. 천강은 그들의 가려운 데를 팍팍 긁어주고, 그들은 천강에게 수련할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심지어 중간중간 흑백무상 일을 하러 나가도, 전체 인원의 얼마 이상은 이곳에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듯했다.
한 번 외근 나간 인원이 돌아오는 데에는 족히 달포도 더 걸리는 경우가 있다는 걸 우연히 들은 뒤로는, 천강은 근무표까지 확인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좋았어. 다섯 명 이해했고, 이제 남은 건 스물여섯.'
그렇게 천강이 저승사자들을 보며 그들을 한참 이해하는 그때였다. 순항 중이던 항해에 돌연 예상치 못한 태풍이 들이닥쳤다.
저승사자들의 기거하는 구역에, 시왕(十王) 중 하나인 오도전륜대왕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