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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26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263화

263화. 무제(武帝)와의 만남

 

 

진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몸 주변으로 자욱한 대자연의 기운이 느껴졌다.

코끝을 도화의 향이 간질이고, 눈을 뜨자 천공의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거대한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오는 입구 위치는 늘 같은지,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전경이었다.

다만 그때는 아직 화경에 불과했었고, 지금은 현경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인지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천강은 이내 팔랑거리는 천해지경과 그 천해지경을 들고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백호를 떠오르게 하는 백발의 머리는 산발하여 허리춤에 닿아 있고, 한줄기 미풍에 이리저리 춤을 추고 노닌다.

그 아래로는 바위 같은 근육이 자리해, 그의 강함과 단단함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평소 관리를 하는 걸 싫어하는 모양인지, 듬성듬성 나 있는 수염을 보건대 어찌 보면 비렁뱅이로 보이기도 했다.

다만 앞으로 내려온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형형히 빛나,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가늠케 했다.

천강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이 무제(武帝)?"

"그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나의 후학이여."

천강이 그의 앞으로 나아가 꾸벅 절을 올렸다.

"본 사문의 시조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핫. 나도 진정 반갑구나. 내 비급을 세상에 내놓고 올라온 지가 한참인데…… 이곳으로 올라오는 이가 아무도 없어 혹여나 소실된 건 아닌가 했다."

"그 말씀은……."

"그래. 그대가 내 후학 중 처음으로 이 선계에 온 이니라."

천강은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왜 무제가 그토록 기쁜 기색을 띠는지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남긴 족적을 따라 선계로 올라온 첫 열매이기에.

"잠시 걸을 시간은 되겠지?"

"물론입니다."

무제가 찬찬히 발을 옮기고, 천강이 그 옆에서 살짝 뒤처져 그 뒤를 따랐다.

천해지경을 검지로 톡 때리며 무제가 물었다.

"천해지경은 어땠느냐? 잘 작동하더냐?"

"아, 예 뭐."

"하는 말이 어렵진 않고?"

천강이 순간 고민에 잠겼다. 그 속내를 짐작한 무제가 천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려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거라. 나는 격식을 깐깐히 차리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자비도 많은 성품이니, 네가 전에 만났다던 선계 토끼에게도 지금껏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다."

아무래도 그놈의 선계 토끼는 성정이 꽤 문제가 많은 모양이네.

그 한마디에 뭔가 자신감을 얻은 천강이 대답했다.

"사실…… 현경이나 생사경에 도달할 때 상당히 난감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랬나. 흠. 나름 쉽게 대답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아, 쉬웠습니다. 그러니까…… 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니 다 되더군요. 나중에 깨달은 건데, 비급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저 스스로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핫. 무제가 파안대소를 했다.

"하긴. 인간이란, 무슨 비밀을 써놓았다고 하면 지레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무림인은 그게 더 심하고 말이지요."

"하핫. 공감이다."

무려 시조이자 신선과의 대면이라 좀 긴장했는데, 무제(武帝)란 이름과는 달리 그의 성품은 인생을 유쾌하게 즐기는 한량에 가까웠다.

꽤 솔직하고, 그러면서도 상당히 온화하고.

이런 분이 어찌 신선의 반열까지 올랐을지 잘 상상이 가질 않는군. 어찌 됐든 무(武)를 익혔으니 이곳에 와 있는 것일 텐데.

무제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천강이 사념에서 빠져나와 그를 응시했다.

"그래. 내게 묻고 싶은 게 많겠지."

많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그에 천강은 미리 준비한 질문을 꺼내 들었다.

"하늘이 주재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승리의 방법을 알고 싶다라……."

무제가 가만히 뒷짐을 지고는 천공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나오는 데 꽤 걸리려나? 그런 의문도 잠시, 의외로 답은 바로 나왔다.

"싸움에서 상대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음. 글쎄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군. 간단하다. 어떤 싸움이건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설령 하늘이 주관하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뭔가 방법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준비 방법도 다양하다.

그냥 무식하게 노력하는 것도 있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는 것도 있고.

상대에 대해 조사해 그 약점을 공략한다거나 내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거나 등등.

"방법이야 있지. 무림인으로서 그중 제일 좋은 건, 일단 내게 부족한 걸 보완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냥 쉽고 간단하게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핫. 그거 좋군."

천강의 말에 수긍하며 나온 무제의 조언은 이거였다.

"나 이외의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젠장. 이자가 천해지경의 본체라는 걸 깜빡했다.

천강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자, 그가 마치 어린애 대하듯 천강의 볼을 잡아 쭉쭉 잡아당겼다.

후학이 들어오니 참으로 좋구나! 같은 소리를 하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천강은 진지한 얼굴과 어조로 말했다.

"계산상 생사경이 되려면 제겐 1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적과의 싸움은 고작 달포 남았습니다. 제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흠. 그건 확실히 문제로구나."

그래도 아직 미온적인 반응.

그럼 어디 이래도 동일한지 봅시다.

턱을 쓸며 고개를 주억이는 남자에게 천강이 회심의 한 수를 내밀었다.

"만약 적과의 싸움에서 지면, 무제(武帝)님의 후학인 저도 선계에 올라올 일이 없어집니다."

뚜둔! 무제의 눈이 크게 뜨이고, 이내 그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가 만난 첫 후학인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심각함이 와 닿는 모양이었다.

"이런……. 그러나 내가 네게 도움을 주면, 그만큼 상대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을 것이다."

"예?"

"경기가 어느 때 제일 재미있는지 아느냐?"

그야 당연히…….

"그 실력이 비등비등할 때죠."

"그래. 하늘이 주관할 때도 마찬가지다."

즉 천강이 무제의 도움을 받아 강해진다면, 태감(太監) 또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주어지리라는 것.

"그래도 괜찮겠느냐?"

……쉽지 않네. 생각보다 이 싸움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체감된다.

어쩌면 단순히 무(武)를 경쟁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지금 천강이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잠깐의 고민 후 천강이 대답했다.

"예."

"후우. 좋다. 그러나 네가 좋다고 했지만, 나는 최소한만 관여할 것이다. 그로 인해 섭섭해하지 말거라."

무제가 천강을 한 나무 아래로 이끌고 갔다.

시간이 없는 걸 아는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보거라."

무제와 천강 머리 위로는 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파리를 간간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제가 나무를 응시하자, 곧 떨어지는 이파리들이 무제의 시선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바람을 타고 지면에 비산하는 이파리들.

천강의 입에서 나직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무슨……. 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자연의 기를 움직였어?'

현경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자신 이외의 것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그렇기에 현경의 대표적인 기술로 이기어검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가능은 하나 그럼 왜 현경부터라 말하느냐?

'내기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이지.'

화경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내기만을 사용해 물건을 들어 올려야 하기 때문.

그러나 현경부터는 대자연의 기를 느끼고 이용할 수 있다. 대자연의 기운이 흐르는 그 방식을 이해해, 내게 맞게 채찍질도 하고 당근도 주고 하며 이용하는 것이다.

그 채찍질과 당근에 해당하는 게 바로 자신의 내기인데, 조금 전 무제(武帝)는 그 내기조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현실에 그대로 반영돼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자연경…….'

천강의 감탄 속에 무제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건 어렵지 않다. 세상을 정확히 보고 열린 마음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되지. 장자의 나비처럼 말이야."

돌연 바람이 크게 일었다. 나무로부터 무수히 많은 이파리들이 떨어져 나비 형상을 갖추더니, 이내 숲 저 너머로 무리 지어 사라졌다.

그러한 엄청난 기행을 보임에 있어 무제는 손가락 까딱 안 하고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해 보거라."

천강이 무제를 따라 한다. 필사적으로 노려보고 자신의 의지를 자연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내기를 사용하지 않은 천강의 의지는 이파리들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보며, '서쪽 하늘로 날아가라 날아가라.' 간절히 바라는 듯한 행태에 무제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파리가 바람에 의해 팔랑팔랑 거리는 게 아니다. 너 자신이 팔랑거리며 떨어지기에 이파리들이 그러는 것이다."

그가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시선을 주기가 무섭게 30보 떨어진 한 나무 위로 돌연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보이느냐? 하늘에 물이 고여 자연의 섭리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네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무제의 시선이 다시 전방의 나무로 향했다.

그러자 그 나무뿐만 아니라 그 뒤까지 무려 수십여 그루의 나무들이 밑동 부근에서 잘려 나가고, 이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무제의 말이 천강의 귓가에 와 닿았다.

"똑똑히 기억해라. 나무를 베는 게 아니다. 내가 베이는 것이다. 나무를 들어 올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내가 있는 세상이 베이고, 들어 올려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베인다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가르침.

천강이 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베이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를 바라나, 수차례 시도해도 천강은 무제와 같은 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분명 될 것 같은데…… 뭔가 안 되네요."

천강을 바라보며 무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살아온 세월이 아직 사십도 안 되었는데,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이 도리어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널 그곳까지 이끈 욕심이 이젠 도리어 네 앞길을 가로막고 있구나."

"예? 욕심이라뇨?"

다른 건 몰라도 욕심 하나만큼은 없다고 자부하는 천강이다.

그런 천강의 생각에 반발하는 걸까? 천해지경이 무제 뒤편에서 몸을 펼쳐 글자를 써 내려갔다.

『 만두 』

'아, 그것은…….'

젠장. 할 말이 없어지네.

솔직히 만두로 인해 벌어진 사달이 꽤 되긴 했다.

"그걸 놓아야 한다. 그래야 주위의 것이 보인다."

무제님. 설마 만두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죠?

천해지경이 만두를 써 붙이고 있는 바람에 천강의 얼굴에 살짝 혼란이 일었으나, 다행히도 천해지경과 무제의 이야기 주제는 달랐다.

무제(武帝)가 진지한 얼굴로 콕 집어 이야기했다.

"지금의 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과 상대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우러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그랬다. 지금 천강의 머릿속엔 온통 태감과의 일전으로 그득했다.

얼마 전 무진에게 지독한 살초를 먹인 것과 애들을 납치한 것에 대한 분노는 덤. 거기다가 그를 쓰러뜨려야만 무림과 중원에 진정 평화가 찾아온다는 부담감까지.

"그 모든 걸 해탈해야 한다. 그리한다면……."

무제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로 올라갔던 나무들이 제자리를 찾아 내려가, 잘린 몸뚱어리를 복구했다.

'잘린 몸뚱어리가 도로 붙다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얼마 전 탐(貪)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잣대를 아득히 벗어나, 생각하는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

기적적인 일을 그저 의지 하나로 이루어낸 무제가 천강을 돌아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한다면, 다른 생물을 이해하는 일 따윈 한순간에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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