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0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0화
20화
이무환은 냉소를 지으며 좌수로 작은 원을 그렸다.
둥!
북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 소정완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내심 이를 악문 채 한 걸음 물러선 오천상은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는 이무환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좌수를 거두어들인 이무환이 오천상에게 말했다.
“조카가 그냥 끝내자고 했으면 그냥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데 힘을 아껴야죠.”
팔성의 공력을 끌어올리고도 밀리다니.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 그랬다.
오천상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남들의 비웃음만 살 뿐. 그렇다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물러나는 게 상책이었다.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린 오천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게 좋을 것 같군.”
이무환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돌아섰다.
“배가 오는 거 같은데, 가시죠?”
4
막간산이 보이는 백장현(百丈縣)을 지나갈 즈음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두를 이끄는 신검대가 조금씩 속도를 냈다. 어두워지기 전에 안길까지 가려면 현재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거리가 벌어졌다. 이각가량이 흘러 막간산이 가까워지자 선두와 풍운대의 간격이 오륙십 장 거리로 늘어졌다.
평지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굴곡이 심한 지형을 달리다 보니 선두가 간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길이 외길이고 마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어서 뒤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장님, 좀 더 가까이 따라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막위가 답답한지 달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른 조가 문제야. 아마 반은 따라오지 못할걸?”
이무환의 대답에 영호승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흩어지면 적의 공격에 더 치명적이죠.”
“맞아. 그러니 차라리 조금 처지더라도 대형을 유지하는 게 나아. 그동안은 앞에서 막아줄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저 앞쪽에서 바람 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거의 동시에 이무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적이 있는 것 같다.”
“예?”
“바람에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어. 같은 편이 아니다. 제법 많은 숫자야.”
앞에 있는 자들이야 알 수 있었다고 치자. 칠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바람에 섞인 적의 기운을 느끼는 이무환은 뭐란 말인가?
네 사람은 괴물 바라보듯 이무환의 등을 응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대체 조장의 능력은 한계가 어디일까? 정말 절정에 달한 고수일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강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만큼 살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말이니까.
“조장님, 그럼 속도를 더 내서 거리를 좁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주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기다려. 적이 앞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았다. 정보가 새어나갔든지, 아니면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앞에만 적이 있으란 법은 없었다.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흑마련의 이련주 흑안마조 조창산은 감았던 눈을 떴다.
“놈들은?”
흑마련의 최강 전위부대 흑살단의 단주 시홍이 입술을 깨물고 앞을 노려보았다.
“포위망 안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준비는 완벽하겠지?”
“놈들은 절대 합비에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시홍의 나직한 대답에 조창산의 표정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비 때문인지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사위가 뉘엿뉘엿 어두워지고 있다.
“검운장이 남궁세가와 힘을 합하면 절강에서 우리가 설 땅이 없어진다. 금천신문에서 알려오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당할 뻔했어.”
“놈들이 워낙 철저히 일을 진행해서…….”
그때다. 멀리서 옅게 피어오르는 안개를 헤치고 마차 한 대가 완만한 골짜기 아래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금천신문에서 온 자들은 어디 있지?”
“십리곡에 있습니다. 적을 그곳으로 몰아넣으면, 마지막은 그들이 맡게 될 것입니다.”
상대는 검운장의 자랑이라는 신검대와 금검대의 고수 삼십 명과 풍운대 이십 명. 그리고 대여섯 명의 초일류고수다.
자신들만으로는 완벽히 처리할 수 없는 전력. 그러나 다행히도 이곳에는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조차 압도한다는 금천신문의 고수들이 와 있는 것이다.
“좋아, 시작해. 놈들을 쓸어버려!”
하늘로 밝은 빛 한 줄기가 솟구쳤다.
그 직후!
쉬쉬쉬쉭!
빗속을 뚫고 회색빛 화살이 날아들었다.
선두에서 마차를 이끌던 신검대의 부대주 사공위정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모두 조심해! 화살이다!”
히히힝!
마부석에 앉아 있던 신검대원 하나가 급히 마차를 세웠다.
달리면 그만큼 화살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 더구나 안정되지 않은 자세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화살을 쳐낸다는 것은 일류고수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열 명의 신검대원은 재빨리 마차를 에워싸고 날아드는 화살을 신중하게 쳐냈다.
티디디딩!
하지만 화살은 멈추지 않고 날아들었다.
곧이어 달려온 이십 명의 금검대가 두 번째 방어막을 치고 마차를 보호했지만, 십여 발의 화살이 마차의 이곳저곳에 박혔다.
다행히 마차의 외벽이 한 치 이상 가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져서 화살이 깊게 박혀들지는 않았다.
“마차는 금검대가 보호하고, 신검대는 놈들을 찾아라!”
사공위정이 악을 쓰듯 명령을 내렸다.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화살을 멈추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열 명의 신검대원은 화살이 날아드는 찰나의 틈을 이용해 마차에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몸을 낮추고서 빠르게 전진했다.
바로 그때 풍운대가 구릉 위로 올라섰다.
신검대가 다섯 명씩 둘로 나뉘어져서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날듯이 달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화살은 두 곳에서 날아든다. 그러나 적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양쪽으로 나뉘어져 적을 막는다!”
나철위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일이조는 나와 함께 좌후방을 막고, 삼사조와 십삼조는 우후방을 막는다. 가자!”
풍운대가 좌우로 갈라져서 구릉을 내려갈 때였다. 골짜기의 좌우에서 흑의인 백여 명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들은 풍운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마차를 향해 밀려 내려갔다.
시커먼 먹물이 터진 둑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이무환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데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멋쟁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
“흑마련 놈들입니다.”
“흑마련? 거지같은 놈들이 어디서 감히 검운장을 건드려!”
이무환은 묵린도를 도집째 빼들고는, 몰려 내려가는 흑의인들의 옆구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예쁜 여동생을 죽이려는 저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따라와! 다 쓸어버리자고!”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바로 뒤에서 따라가는 삼사조와 십삼조의 조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놈들, 오늘 사람 잘못 건드렸군.’
흑의인들은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다 멈칫했다.
그들 중 몇이 풍운대의 복장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풍운대 놈들이다! 다 죽여!”
“감히 풍운대 따위가 우리 흑살단에 덤비다니! 모두 토막내버려라!”
하지만 숨을 서너 번 쉬기도 전, 조소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저 새끼 뭐야? 으악!”
“케엑!”
“미, 미친 새끼다!”
좌충우돌.
꼬리에 불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양 떼들 사이에서 발광을 하는 듯했다.
손에 잡히는 것은 팔이든, 검이든, 칼이든, 무엇이든 부러뜨리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묵린도로 후려쳐 숨통을 끊어버렸다.
머리가 터지고, 목이 부러지고, 불판에서 콩이 튀듯 흑의인들의 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막간산에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과 신음 소리.
순식간에 십여 명이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물러서!”
“야, 이 새끼들아! 물러서지 말고 놈을 막아!”
“조장이 앞장서쇼!”
“아, 쓰벌, 진짜 욕 나오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겁에 질린 흑의인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우르르 물러섰다.
그러나 이무환은 상대가 물러서든 말든 조금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막는 놈은 다 죽는다!”
이무환의 목소리가 흑의인들의 귓속을 염왕의 외침처럼 파고들었다. 사실 이무환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 뿐, 막는 사람은 없었지만.
흑의인들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자기가 달려들어 놓고 앞을 막는다며 두들겨 패는 이무환이 미친놈처럼 보였다.
도망가야 하나, 덤벼야 하나.
“일단 물러서자!”
“물러서지 마! 저 미친놈은 물러서도 소용없다! 모두 덤벼!”
그러나 풍운대에는 이무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풍운대원들이 덮쳤다.
그중에서도 십삼조의 조원들은 같은 풍운대의 대원들조차 흠칫할 정도로 사나웠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손을 썼다.
영호승의 검이 검화를 피워내며 파도처럼 쓸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한두 명의 몸에서 피가 솟았다.
단우경의 쌍칼이 허공을 난자하면 빗방울 속에 핏방울이 섞여 튀었다.
막위의 도끼가 이마를 가르고, 혁수린의 꼬챙이 같은 검이 흑의인의 목을 꼬치처럼 꿰뚫었다.
그 사이 이무환은 네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살벌하게 날뛰며 구릉 아래쪽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때 영호승이 소리를 질렀다.
“조장!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마차 쪽을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그제야 마차 쪽을 바라본 이무환의 눈썹이 거꾸로 치솟았다.
“저것들이!”
흑의인들은 풍운대가 막아선 백여 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또다시 백여 명이 앞쪽에서 내려오더니 마차 쪽을 공격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제법 고수라 할 만한 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는 듯했다.
그 때문인가? 마차가 적들이 뜸한 곳으로 방향을 꺾고 있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게 당연한데도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적이 고의로 길을 열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비켜!”
이무환은 앞을 향해 냅다 소리치며 신형을 날렸다.
흑의인들이 쫙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어서 가라는 듯.
“놈이 가지 못하게 막아!”
하지만 또 다른 명령이 떨어지자, 엉겁결에 비켜섰던 자들이 다시 이무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날아가던 이무환이 두 손을 휘둘렀다.
“비키라니까!”
콰아아아!
가공할 기운이 앞으로 밀려가며 회오리처럼 휘돌았다.
사자탄에서 생활하며 만든 일곱 가지 수법 중 하나, 폭류탄(暴流彈)이 펼쳐진 것이다.
“으아악!”
“어어? 으아아!”
“케엑! 지미, 비키라고 할 때 비켰어야…….”
당랑거철. 수레를 막아선 사마귀나 다름없었다.
회오리 기운에 휘말린 자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본 채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이무환은 전면이 뻥 뚫리자 마차를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이곳에 있는 놈들을 정리하고 따라와!”
“대체 저놈은 또 뭐야?!”
조창산은 눈을 부릅뜨고 후방을 노려보았다.
풍운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수하들을 움직였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수하들이 겨울비 맞은 낙엽들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풍운대주가 있는 곳이라면 그러려니 할 일이었다. 폭풍철검 나철위는 그럭저럭 초일류로 알려진 고수니까.
그런데 나철위가 있는 곳보다 다른 곳이 먼저 무너지고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저 새끼 막아!”
조창산은 다급히 자신의 측근인 흑령십위 중 다섯을 내보냈다.
풀잎 위를 스치듯 날아가던 이무환은 전방에서 흑의인 다섯이 마주 달려오자 냉랭히 코웃음 쳤다.
거리가 순식간에 오 장으로 좁혀졌다 싶은 순간, 이무환이 좌수를 들어 앞으로 뻗었다.
쾅!
맨 앞에서 달려오던 자가 메뚜기처럼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이무환은 그를 보지도 않고 두 번째 흑의인을 덮쳤다.
움찔한 흑의인이 멈칫하는 사이, 이무환의 우수가 수십 개로 변하더니, 그중 하나가 흑의인의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퍽!
“꺼억!”
내부가 터져 나간 흑의인은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 남은 흑의인 셋이 이무환의 좌우에서 도검을 휘둘렀다.
찰나였다. 이무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허공이다! 조심해!”
조금 뒤로 처졌던 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동시에 도를 든 흑의인이 머리 위로 도를 올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