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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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9화
19화
금빛과 은빛이 섞인, 신월 모양의 납작한 금속 세 개가 그의 손바닥에 놓였다.
세 치 길이, 납작한 면에는 각기 아홉 개씩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둥글게 깎여진 바깥쪽은 칼날처럼 예리했고, 그 안쪽에는 처음 보는 묘한 그림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마추경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암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가 없구나.”
이무환은 사마추경의 말을 한쪽으로 흘려들으며 세 개의 신월 모양 금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림, 정확히는 그림 속의 글자에 꽂혀 벗어날 줄을 몰랐다.
금속 하나마다 각기 한 글자씩, 모두 세 개의 문자가 전자체로 새겨져 있었다.
무(無), 영(影), 뢰(雷).
‘이름은 기가 막히게 멋진데…….’
멋진 정도가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때 사마추경이 돌돌 만 양피지를 마저 내밀었다.
“이것은 그것과 함께 있던 것이다.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했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것 같구나. 네 복이 닿는다면 그것의 사용법도 알게 되겠지. 우선은 그냥 이 할아비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간직해라.”
이무환은 양피지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풀어보았다.
양피지는 모두 석 장. 그 안에는 같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각기 다른 무수한 선이 복잡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바라보던 이무환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비룡도의 절벽이나, 아버지가 구룡성을 나설 때 가져온 책에 제대로 된 구결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덕분에 아버지는 그곳에 적힌 무공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했고, 자신은 몸으로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무려 십수 년간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무환은 양피지의 선을 본 순간 그 선이 뜻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혈맥의 흐름? 아니, 발출하고 거두어들이는 방법?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절대 예사 물건이 아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예, 외조부님. 정말 마음에 듭니다.”
외손자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준 사마추경은 이무환이 마음에 들어 하자 표정이 환해졌다. 싫어하며 어쩌나 했는데.
“나중에 돌아오면, 이 할아비가 또 다른 선물을 주마. 그러니 이 할아비가 죽기 전에 꼭 돌아오너라.”
“…예, 외조부님.”
3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던 햇살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아침부터 습기 찬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왔다.
구름이 조금만 더 짙어지면 비가 올 것 같았다. 그래도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사마하연이 탄 마차를 앞세운 사절단은 아침을 먹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밤이 되기 전에 안길(安吉)에 도착해야 했다. 중도에 비라도 많이 와서 자칫 수로의 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마차가 지나갈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되면 합비까지의 길이 더욱 바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운장을 떠난 지 일각 후.
복잡한 항주를 빠져나오자마자 신검대의 대원들이 마차의 양옆을 호위하고, 금검대의 대원들이 그 뒤를 받쳤다.
풍운대는 마차와 십여 장 거리를 두고 좌우로 흩어져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모두 오십칠 명. 위풍당당한 행렬은 빠르게 북쪽으로 향했다.
사절단이 검운장을 떠난 지 한 시진가량이 지났을 무렵.
한 사람이 검운장의 정문을 기웃거렸다.
독사처럼 쭉 찢어진 눈매, 독사눈이었다.
그는 붉은 코의 수문위사에게 넌지시 은자 반 냥을 건네고 이무환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다.
“풍운대 십삼조 조장을 만났으면 싶은데……. 안에 계쇼?”
“이 조장은 임무를 맡아서 조금 전에 장을 떠났네. 무슨 일로 만나려고 하는데?”
“아아, 별 것 아뇨. 그럼 수고하쇼.”
독사눈은 이무환이 장원을 떠났다는 말에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쳇, 겨우 놈이 있는 곳을 알아가지고 왔는데…….”
다행히 오후가 되도록 비는 오지 않았다. 앞을 막는 자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금의 평화로움이 지속될지 그것은 아무도 몰랐다.
이무환은 네 명의 조원과 함께 맨 뒤쪽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조와도 십여 장이나 떨어졌다.
“조장님, 합비에 가봤습니까?”
나란히 걷던 영호승이 이무환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제 비룡도를 떠나온 지 보름 남짓. 합비는커녕 절강 땅도 항주까지 이르는 길만 밟아본 이무환이다. 가봤을 리가 있나?
“처음이야. 멋쟁이는 가봤어?”
“두 번 가봤습니다. 그리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만.”
“그곳에선 남궁세가가 왕처럼 군림한다면서?”
“사백 년간 지주로 있던 자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사백 년? 굉장하군.”
“그런데… 요즘은 옛날만 못한 것 같습니다. 금천신문에 밀리는 것도 그렇고, 무림맹 서열 이십위 안에 한 사람도 들지 못한 것도 그렇고…….”
그때 이무환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멋쟁이, 사마하연이 남궁세가에 왜 간다고 생각해?”
“그거야…….”
막 입을 열던 영호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사마하연 낭자가 굳이 갈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만일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사절단이 남궁세가에 가는 이유가 사마하연 때문이라면, 그 목적이 뭘까?”
혁수린이 이무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생각나는 게 있어?”
혁수린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밀히 나도는 소문에 의하면, 십여 일 전에 사마성한 장로가 남궁세가에 갔다고 하다군요.”
십여 일 전에 갔다면, 팔순 잔치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혁수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방문하고, 장주의 딸이 뒤이어 방문한다.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영호승과 막위, 단우경이 흠칫 굳은 얼굴로 혁수린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다만 그런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무환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혁수린이 좌우를 둘러보고 나직이 말했다.
“혹시 정략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략혼?
이무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의 검운장이 누구에게 위협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딸을 이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절강에서 누구도 검운장을 건드리지 못하게 될 겁니다.”
혁수린의 대답에 이무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군.”
“당연하지요. 아마 나머지 사대세력은 결사적으로 막고자 할 것……. 응? 가만? 그럼 이렇게 많은 사람이 호위로 따라나선 이유가?”
혁수린을 비롯해, 영호승과 단우경과 막위가 굳은 얼굴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이무환이 나직이 말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군. 아무래도 조용히 가기는 틀린 것 같아.”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로는 제때 배가 있어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로인 영선수로에서 발이 묶였다.
어지간한 수로는 그냥 건널 수도 있지만, 영선수로는 일대에서 가장 넓고 깊어서 배 없이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배를 기다리며 일각가량이 지날 즈음, 두 사람이 풍운대로 다가왔다. 그중 앞장서 오는 사람은 금검대의 부대주 귀필(鬼筆) 오천상이었다.
그는 곧장 외따로 떨어져 있는 십삼조 쪽으로 다가오더니, 뒷짐 진 채 느긋이 서 있는 이무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악귀라고 소문난 이무환인가?”
오천상이 이무환에게 말을 걸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표정들, 대체 악귀라 불리는 이무환이 어떤 놈인가 잔뜩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다.
‘귀찮게 또 무슨 일이야?’
이무환은 고개만 슬쩍 돌리고 대답했다.
“악귀인 줄은 모르겠고, 제가 이무환인 것은 맞습니다만.”
삐딱한 대답에 오천상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오청학이라고 아나?”
이무환이 반갑게 말을 받았다.
“아! 철검대의 그 친구요? 알죠!”
마치 절친한 친구의 이름을 십 년 만에 듣고 반가워하는 사람처럼.
오천상이 그런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 아이가 내 조카란 건 알고 있나?”
“어?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말이군요. 그 친구, 왜 그 말을 나에게 안 했지?”
그 말을 했으면 몇 대 더 팼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무환이 눈을 크게 뜨자 오천상이 말했다.
“며칠 전 그 아이가 와서 그러더군. 자네와 가벼운 다툼이 있었다고.”
“그 친구가 먼저 그 말을 하던가요?”
“아니네. 내가 철검대에서 도는 소문을 듣고 불러서 물어봤지.”
이무환이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는 다행이군. 꼬마들처럼 달려가서 일러 바쳤으면 나중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리려고 했는데.’
“뭐라고 하던가요?”
“그냥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더군.”
“그럼 그렇게 지나가죠. 안 좋은 추억은 빨리 잊는 게 좋은 법이니까요.”
“뭔 일이 있긴 있었다는 말이군.”
“친구 간의 사소한 다툼이죠. 그 정도야 누구나 하는 것 아닙니까?”
뭐, 목을 잡고 죽일 것처럼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왜 그 아이가 그렇게 의기소침해졌는지 모르겠군. 정말 말다툼만 했는가?”
오천상이 이무환의 눈빛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세세히 살피며 말했다.
그때 오천상을 따라온 삼십대 초반의 무사가 끼어들었다.
“청학이와 함께 있었던 대원의 말에 의하면, 자네가 비겁하게 청학이를 급습했다고 하던데, 아닌가?”
이무환은 천천히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본인에게 다시 물어보시죠?”
삼십대 초반의 무사, 금검대의 일조장인 소정완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임무를 수행 중인 순찰조의 무사들을 건드리면 어떤 벌을 받는지 아는가?”
“친구끼리 장난도 못합니까?”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툭툭 쏘아붙인다.
소정완은 슬쩍 오천상을 바라보고는, 오천상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자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본 장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청학이와 친구가 되었나?”
“남자란, 그 자리에서도 친구가 되는 법이죠. 소 조장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나 보죠?”
“뭐야?”
“때로는 싸우면서 친구가 되는 게 남자요. 모르면 입 닥치고 좀 가만히 있으쇼.”
“이, 이 자식이!”
“이 자식? 그 말은 우리 아버지 빼고는 누구도 못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자꾸 말이 길어지자 이무환이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소정완이 대뜸 으르렁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네놈 아비 대신 버릇을 가르쳐…….”
찰나, 이무환이 소정완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소정완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눈이 타 들어가는 듯했다.
심장이 벌떡거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그런 와중에 귀청을 두들기는 목소리.
“한마디만 더 하면 혀를 뽑아버리겠어.”
전음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왱왱거리며 모기 우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그 뜻만큼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말하면 정말로 혀가 잘릴 것 같은 기분. 소정완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보다는 나아. 우리 아버지 같으면 말도 않고 목을 싹둑 잘라 버렸을 테니까.”
악귀의 아버지. 그자는 절대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소정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소정완이 몸을 떨자 오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소 조장, 왜 그런가?”
부드러운 경력이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무환은 가볍게 좌수를 털어 오천상의 기운을 밀쳐 내고는 소정완에게 한마디 더했다.
“명심해.”
오천상은 자신의 기운이 힘도 못 쓰고 밀려나자 공력을 팔성까지 끌어올리고 우수를 내밀었다.
어디 이래도? 하는 오기가 담긴 일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