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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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7화
17화
흑의인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만복루를 돌아다 봤다.
‘저 새끼, 뭐야? 왜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거지?’
문제는 시선이 마주친 순간 또 숨이 멈췄다는 것이다.
자존심에 금이 간 그는 당장 되돌아가서 한바탕하고 싶었다.
볼일만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남의 눈에 함부로 드러나서 안 되는 신분만 아니었어도, 성큼성큼 들어가 손을 쭉 뻗어서 놈의 목을 비틀어 버렸을 텐데!
그러나 당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분노가 끓어도 참는 수밖에.
그렇다고 언제까지 참지는 않을 것이었다.
‘언제고 검운장을 치게 되면, 저 자식을 제일 먼저 죽여 버려야겠어. 목을 확 비틀어서…….’
그러나 지금은 동패를 찾는 게 먼저였다.
‘나중에 보자, 이놈!’
흑의인, 광유는 분노를 가슴에 구겨 넣고 걸음을 빨리해 거리를 벗어났다.
이무환이 네 사람을 끌고 객잔을 나왔을 때, 흑의인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섯 사람은 두 시진에 걸쳐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흑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항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도 그는 완전 오리무중,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습을 감춰 버렸다.
셋 중 하나다. 다른 곳으로 갔든지,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길 곳이 있든지, 아니면 항주를 떠났든지.
하지만 그가 항주를 떠난 것은 아닌 듯 느껴졌다. 멀리 가지도 않은 것 같고.
문제는 항주 남부가 너무 복잡해서 다섯 사람이 뒤진다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아, 어디로 갔지?”
이무환의 탄식에 참다못한 단우경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왜 그자를 찾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좀 이상해서. 괴이한 기운을 지녔는데, 꼭 내가 아는 무공을 익힌 것 같거든.”
“누군지는 아십니까? 하다못해 문파라도요.”
“몰라.”
“그럼 이름도 모르고, 문파도 모르고, 얼굴도 정확히 모르고,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어, 몰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이무환이다.
모른다는 사람에게 뭘 더 물을 것인가.
지켜보던 영호승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듯 힘없이 말했다.
“그럼 밥이라도 먹죠. 신시가 지났는데.”
“응?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만복루로 가지. 공돈도 생겼고, 내가 맛있는 거 살 테니까.”
밥만 먹기 위해서라면 바로 옆에도 객잔이 있었다. 그런데도 만복루로 돌아가려는 것은 독사눈과 흑도의 건달들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지, 꼭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째려보는 사람들이야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다섯 사람은 두 시진이 지나서야 다시 만복루로 돌아갔다.
자신들이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독사눈과 사팔뜨기와 칼자국이 술을 진탕 퍼먹고서 이무환을 수백 조각으로 찢어발기며 욕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머리꼭지까지 취한 세 사람은 이무환이 나타나자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 눈이 완전히 풀린 채.
“꺼억, 너 잘 왔다, 이 씨발 새끼! 내 돈 내놔!”
“개새끼, 날강도 같은 놈! 세상에 너 같은 놈은 내 보다 보다 처음 봤다!”
“세상에 뺏을 게 없어서 우리 돈을 뺐냐? 근데 너 누구지? 아! 맞아. 너 악귀지? 꺼어어억.”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잖아도 흑의인을 찾지 못해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이무환이 아닌가.
“뭐가 어째? 순진한 촌놈 등쳐먹던 놈들이 어디서! 에라이, 어디 한번 털구멍에서 연기 나게 맞아봐라!”
네 명의 조원이 말릴 틈도 없이 구타가 시작되었다.
퍽! 빠바박! 퍼벅!
“아이고!”
“너, 이……. 켁!”
“나는…… 아니……. 크억!”
나중에는 영호승 등이 질려서 뒤로 물러날 정도가 되어버렸다.
독사눈 등을 도우려 했던 칠도회의 건달들 역시, 서너 번의 손질이 오가기도 전에 행여 자신들도 맞을까 봐 슬금슬금 만복루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일각가량이 흘렀을 때다.
“멈춰라!”
만복루의 주렴이 뜯어질 듯 거칠게 걷히더니 십여 명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무환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세 사람의 눈탱이를 차례대로 후려갈겼다.
빡! 뻑! 빠박!
그러고서야 몸을 돌린 이무환이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당신들 중에 칠도회주가 있소?”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마치 한숨 편하게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태연하다.
가운데 서 있던 가느다란 눈매에 말상의 중년인이 턱에 힘을 주고 답했다.
“내가 회주네. 그런 자네는 누군가? 보아하니 검운장의 풍운대 조장인 것 같은데?”
“이무환이오.”
“이무환? 아, 악귀 이무환?”
칠도회주 국자상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흑도 조직에게 정보는 필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누구든 항주제일장인 검운장의 조장 급 이상 무사들의 이름 정도는 달달 꿰고 있어야 했다. 하기에 그도 이무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아마 이무환이 서너 번만 밖으로 더 나왔다면 그의 얼굴까지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소문대로 악귀 같은 자군.’
아니, 소문보다 더했다. 사람을 묵사발 내놓고도 잠자리 날개를 떼어낸 아이보다도 태연한 표정이 아닌가.
“영광이군. 소문이 자자한 풍운대의 십삼조장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밥 먹으러 들어왔더니 술에 취해서 덤벼들더군요. 해서 약간의 교훈을 내렸을 뿐이오.”
조금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약간이 조금 지나쳐서 그렇지.
국자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점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도 더럽게 재수 없군. 며칠 사이에 요주의 인물로 떠오른 악귀에게 걸리다니.’
국자상의 가느다란 눈이 널브러져서 거품을 물고 있는 독사눈을 향했다.
“내가 확실하게 처리하지. 그러니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그만 가게나.”
“아니,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국자상의 가느다란 눈빛이 싸늘해졌다.
“나는 자네를 대우해 주려고 하는데, 자네는 나의 대우가 맘에 안 드는가 보군.”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자 옆에 있던 자들이 천천히 자리를 이동했다. 여차하면 무력을 쓰겠다는 듯이.
그러자 한쪽에 묵묵히 서 있던 영호승 등이 이무환의 옆으로 다가왔다.
은은한 기운이 네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국자상은 그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의외라는 눈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악귀 옆에 풍운대의 물건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말을 깜박 잊었군.”
영호승이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다 회주를 생각해서 그런 거요. 칠도회가 무너지면, 우리 역시 칭찬은커녕 욕만 바가지로 먹을 테니 말이오.”
국자상의 눈매가 꿈틀거리며 휘어졌다.
비록 칠도회가 흑도의 무리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성질만 믿고 설치는 건달들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진짜 고수라 할 수 있는 사람도 다수 끼어 있었다.
국자상 본인만 해도 능히 일류라 불리는 고수인 것이다.
“내가 자네들이 두려워서 이러는 줄 아나?”
“거, 어지간하면 우리 조장 성질 좀 건들지 마시오. 진짜… 무서운 사람이니까.”
영호승은 차마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여경과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사람이 아닌가.
“뭐야?!”
분노한 국자상은 당장에라도 손을 쓸 것처럼 공력을 일으켰다.
그때 이무환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나 있어.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국자상 앞으로 다가갔다.
국자상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해일이 밀려오는 기분.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뭐, 뭐야?’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간격이 일 장 이내로 좁혀지자 숨을 쉬기도 힘들고,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손끝이 오들오들 떨리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국자상은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마저 도는 이무환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맴돈다.
그제야 국자상은 자신을 짓누르는 기운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크윽! 설마… 절정의 고수들만이 쓸 수 있다는 무형지기?’
문득 영호승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칠도회가 무너진다고,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고, 영호승은 그렇게 말했다.
사실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이무환이 턱 끝으로 독사눈을 가리켰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시킬 일이 있소. 그러니 저 사람들을 잠시 나에게 맡겨줬으면 좋겠소만.”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국자상을 억압하던 기운이 사라졌다. 조금 전에 느낀 기운이 헛것처럼 생각될 정도.
하지만 국자상은 그것이 진짜 상황이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을 말인가?”
이무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국자상으로서도 손해 볼 일이 없었다.
비록 말썽을 피우긴 해도 제 할 일만큼은 똑 부러지게 하는 독사눈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독사눈을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칠도회가 망하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고.
“그런 뜻이었나? 허, 허, 허, 내가 뭔가를 오해했던 것 같군. 알았네. 저놈들, 정신 차리면 내 단단히 주의를 줘서 자네를 돕도록 하겠네.”
“흠, 이제야 이야기가 제대로 돌아가는군요. 일단 밥 좀 먹고 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지요. 뭔 놈의 주루에서 밥 한번 먹기가 이렇게 힘든 거요?”
“응? 그, 그거야……. 이봐! 최고급으로 한 상 차려!”
십여 가지의 고급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그런데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성하루라는 곳보다 맛이 있네, 없네, 따지는 이무환이다.
국자상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성하루가 어디에 있는 곳인가?”
사람들이 일제히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상산.”
“그곳이 그렇게 음식 솜씨가 좋은가?”
“기가 막히죠. 입 안에서 그냥 녹는다니까요?”
문득 용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있는지 모르겠군.’
“언제 나와 함께 가서 먹어 볼랍니까?”
“그럴 게 아니라, 그곳의 숙수를 이곳으로 데려오면 어떨까? 말 안 들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오지 뭐.”
그 말에 이무환이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키고는, 국자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에 어떤 놈들이 그곳을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제가 밤에 찾아갔지요.”
국자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천천히 말을 잇는 이무환의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처럼 콕콕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커다란 장원이었는데, 가서는 건물 기둥을 뽑아서 집을 다 때려 부숴 버렸죠. 아마 기둥에 맞아서 다친 사람도 꽤 될 거요.”
“그, 그런가?”
“그러니 헛생각 말고 그자를 찾을 방법이나 생각해 보쇼.”
칠도회에 흑의인을 찾아달라고 했다.
본래는 독사눈을 시키려 했다. 술 처먹고 덤비지만 않았어도, 칠도회주인 국자상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칠도회주가 나타난 이상 독사눈은 연락 임무나 충실히 수행하면 되었다.
국자상도 성질 더러운 악귀와 사이좋게 지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이무환의 부탁을 수락했다.
“허험, 너무 걱정 말게. 놈이 항주에만 있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네. 본 회를 비롯해서, 친분 있는 사람들을 깡그리 동원할 테니까.”
국자상이 힘차게 말했다. 행여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면 칠도회의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지도 몰랐다.
그때 이무환이 배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그런데… 저 바깥에 있는 깃발, 어지간하면 바꾸시죠? 글자가 영…….”
국자상의 눈이 바깥을 향했다.
근래 들어 누구도 깃발의 글자를 가지고 따지지 못했다. 그런 놈은 모두 돌을 매달아 전당강에 집어넣었으니까.
‘이 자식이… 저는 얼마나 잘 써서…….’
그러나 상대는 악귀 이무환이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신의 등줄기로 땀을 흐르게 만든 악귀!
“그, 그런가? 하긴 오래되어서 좀 낡기는 했지.”
국자상은 곧 죽어도 글자를 못 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7장. 막간산의 혈전(血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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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운신검(絶雲神劍) 사마성운.
현재 나이 마흔아홉. 당금 검운장주인 그는 사마추경의 큰아들로, 절강십대고수에 꼽히는 절정의 고수였다.
차갑게 느껴지는 햇살이 막 고개를 내민 아침나절.
사마성운은 점심을 마치고 용정을 즐기던 중에 한 장의 서찰을 받았다. 그리고 일각, 서신에 시선을 멈춘 그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미 반쯤 남은 용정은 싸늘하게 식은 후였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을 때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침중한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후우, 어쩔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