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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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6화
16화
화중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자네가 악귀 이무환?”
“아아, 지미!”
이무환이 느닷없이 빽 소리 질렀다.
설마 그가 화중인 앞에서 상소리를 내뱉을 줄 몰랐던 사람들은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손에 땀을 쥐었다.
그때 이무환의 혼잣말이 이어지며 사람들의 귓속을 소용돌이처럼 후볐다.
“어떻게 다 나를 아는 거지? 벌써부터 그렇게 유명해지면 구름 속의 잠룡처럼 지내려던 것이 다 헛수고가 되었잖아? 이거 큰일이군. 아직 소문나면 안 되는데. 숙부들이 알면…….”
구름 속의 잠룡!
이무환의 말에 모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화중인이 제일 먼저 마음을 다잡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커험, 수하들에게 말을 들었네. 검운장에 괴팍한 자가 조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더군.”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말은… 자네가 하겠다고 우리를 불러내지 않았나?”
“나는 다 했거든요. 그러니 이제 부문주께서 해보시죠.”
“뭘 말인가?”
“저 두 사람, 어떻게 할 겁니까?”
화중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네. 이미 양가의 합의하에 모든 것이 끝난 일이네.”
“그럼… 일 년만 기다려 주시죠.”
“무슨 말인가?”
“위지호천과 혼인을 해도 일 년 후에 하라 이겁니다.”
조금 전에 영호승의 목소리가 내실에서 들려왔다.
“내년 봄의 혼사를 겨울로 미뤄라.”
“때로는, 세월이 진실을 말해줄 때도 있는 법이니까.”
물론, 당연히 엿들었다.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려고 둘만 남겨놓고 나온 것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 듯했다. 제일 강해 보이는 화중인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무환은 그 말을 간단하게 해석했다.
―내년 겨울에 너를 데려가겠다!
그러기 위해선 그만한 자격이 필요했다.
이무환은 눈살을 찌푸리는 화중인에게 전음으로 몇 마디 건넸다.
<믿든 안 믿든, 나와 영호승은 겨울이 다 지나기 전에 구룡성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내년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올 것이고요. 아마 그때쯤이면 영호승이 구룡성의 요직에 있게 될 것인데, 후회하기 싫거든 몇 달 정도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해 보시지요. 내가 듣기로는 위지호천에게 어떤 좋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 같던데, 그런 자보다는 영호승이 낫지 않겠습니까?>
순간 화중인의 표정이 한겨울에 얼어붙은 떡처럼 굳어버렸다.
항주제일이니, 소주제일이니 해봐야 도토리 키 재기다.
하지만 구룡성은 그 격이 달랐다.
하남의 정천무림맹, 강서의 천마교와 함께 천하삼대세력 중 하나가 바로 구룡성이 아니던가!
내분 때문에 그 위세가 많이 약해졌다는 말이 들리기는 하나, 그 역시 정천무림맹이나 천마교가 봤을 때의 이야기일 뿐.
용화문이야 말할 것이 없고, 소주의 위지 가문마저 그 이름 앞에서는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위지호천에 대한 소문은 자신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지만.
오죽하면 절정공자라는 별호의 ‘절정’이라는 말이 여자와 관계된 말이라는 소문까지 들릴까. 게다가 몇몇 여자의 죽음에 위지호천이 관련되었다는 말조차 있는 마당이었다.
문제는 이무환이 과연 그런 말을 꺼낼 자격이 있냐는 것이다.
화중인이 확인하듯이 전음으로 물었다.
<구룡성을 잘 아는가?>
<그곳의 주인도 이 씨, 저도 이 씨지요. 자세한 것은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아! 기회가 되면 본 장의 노장주님께 물어보시죠. 아마 저에 대해 다는 아니어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구룡성과 관계되었다는 것은 그도 모를 테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사마추경의 외손자라는 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말을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이무환이 사마추경마저 들먹이자 화중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 화여경은 단순한 조카가 아니었다. 문의 대소사를 처리하느라 바쁜 형 대신 어린 화여경을 친딸처럼 보살핀 그가 아니던가.
‘그래, 본 문의 사정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여경이를 그 늑대 같은 놈에게 보내는 것보다는…….’
이무환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껏해야 팔 개월 정도 연기하는 겁니다.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정말 믿어도……?”
화중인이 겨우 입을 열었지만, 이무환이 곧바로 막아버렸다.
“아직은 부문주와 문주만 알고 계십시오. 나중에 드러날 일을 속이려 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 아니니까.”
하긴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팔 개월 정도 연기해 달라는 거다. 거짓이 드러나면 그때 가서 앞당겨도 될 일. 용화문으로선 크게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음, 좋네. 내 일단 형님께 말씀드려 보지.”
이무환은 흐뭇한 표정으로 내실 쪽을 바라보았다.
구룡성의 이름을 엿 바꿔 먹듯이 팔아버렸다.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다.
사실 영호승을 돕고자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위지호천이 무조건 싫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인, 화여경의 옆에 모르는 사람보다 영호승이 서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유는 오직 그것뿐. 절대! 자신이 누구를 질시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중원오신룡? 개뿔이나! 흥! 언제 시간 나면 다섯 마리 토룡을 만나봐야 할 것 같군.’
그때 영호승이 화여경과 함께 내실을 나왔다.
이무환은 화여경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누가 봐도 착하고 순진한 시골 총각처럼 보였다.
“이야기 다 나누셨습니까?”
화여경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예, 덕분에…….”
“하, 하, 하! 저도 좋은 대화를 막 끝마친 참이었습니다.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좀 더 좋은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시간이 없군요.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봐, 가자고!”
이무환이 섬 촌놈답지 않게 술술 말을 내뱉고는, 영호승을 비롯해 멀뚱히 서 있는 막위, 단우경, 혁수린을 향해 손짓을 했다.
“뭐 해? 가자니까? 아직 찾아갈 곳이 남았잖아?”
“예? 예, 조장.”
3
칠도회는 항주의 밤을 다스리는 일곱 개 흑도 조직 중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제법 큰 조직이었다.
알려진 조직원은 모두 이백여 명.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조직원이 그보다 세 배는 많다는 게 일반적인 풍문이었다.
“무공이야 형편없지만, 독하고 잡초처럼 질겨서 항주의 강호문파들도 어지간하면 건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무환은 혁수린에게서 칠도회에 대한 것을 보고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사람 만나봤는데, 별로 독한 것 같지는 않던데…….”
순간 네 사람의 눈빛이 똑같이 말했다.
―그거야 당신이 더 독해서 그렇지!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고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좁고 복잡한 남쪽 길을 따라 십여 번을 꺾어지자 저만치 시커멓게 때에 전 깃발이 하나 보였다.
깃발에는 만복루라는 세 글자가 알아보기도 힘들게 쓰여 있었다.
“저곳이 칠도회의 일곱 개 지부 중 하나인 만복루입니다. 전당강에서 만난 자들이라면, 아마 저기 있을 겁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내가 세 살 때 쓴 것보다 못 썼네. 쯔쯔쯔…….”
그 말에 잘 입을 열지 않던 막위가 중얼거렸다.
“들리는 말로는, 칠도회의 회주가 직접 썼다고 하던데.”
독사눈은 열 명의 조원을 거느리고 있는 말단 간부였다.
비록 흑도건달들의 간부에 불과했지만, 독사눈은 항상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기에 누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도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람을 본 순간, 독사눈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저, 저놈은……!’
그때 놈이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오! 독사눈깔, 정말 여기에 있었군!”
‘저 씨발놈이!’
어찌 잊을까, 그날의 치욕을!
아직도 손가락이 낫지 않아 마음껏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있거늘!
그런데 놈이 마침내 스스로 자신을 찾아왔다. 복수의 기회!
“너 잘 만났다!”
독사눈은 새파란 안광을 빛내며 좌우의 졸개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놈이 도망 못 가게 둘러싸!
그러나 그의 졸개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이 성큼성큼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이 자식들이 아침부터 썩은 우렁을 씹었나? 왜 이리 눈치가 없어?’
그도 썩은 우렁을 씹어본 적이 있다. 그날 이후, 그는 ‘우렁’ 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속이 울렁거려도 악귀 같은 놈을 가만둘 수는 없었다.
그가 다시 눈짓을 보냈다.
그때 들리는 말.
“잘 만났다니, 돈이 준비되었나 보군?”
그 말에 독사눈의 새파란 안광이 검처럼 뻗어나갔다.
‘도오온? 이 새끼가 미쳤……. 응?’
그제야 보였다. 놈의 가슴에 새겨진 눈처럼 하얀 글자가.
풍운.
‘이, 이 씨발놈이 검운장의 풍운대 조장?’
독사눈의 새파란 안광이 순식간에 토끼눈처럼 부드러워졌다.
“그, 그게…….”
이무환은 빙그레 웃으며 독사눈의 어깨에 턱, 손을 얹었다. 순간 수백 근의 무게가 독사눈의 어깨를 짓눌렀다.
후들후들 다리를 떠는 독사눈을 향해 이무환이 말했다.
“뭐, 되는 대로 줘도 돼. 모자라는 것은 사팔뜨기하고 칼자국한테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손가락이 아직 안 나았나 보지?”
이무환의 말에 독사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마에서 삐질삐질 흐른 땀이 눈으로 스며드는데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손가락이야 때 되면 나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두 놈도 곧 올 겁니다, 공자!”
“그래? 흠, 그럼 일단 식사를 하면서 기다리지. 여기 뭐 잘해?”
“아무거나 시키지시요.”
“아무거나? 그럼 당신이 내는 거야?”
“뭐, 약소하지만…….”
힘없는 것이 죄였다. 독사눈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날강도 같은 새끼!’
일각이 지나지 않아 사팔뜨기와 칼자국이 나타났다.
“장사 잘되고 있나?”
두 사람은 독사눈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다 갑자기 몸이 굳었다.
독사눈이 서 있는 앞쪽의 탁자에 검운장 풍운대의 무사들이 앉아 있었는데, 문제는 그중 한 사람을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창백히 굳은 두 사람이 돌아서려 하자, 독사눈이 반갑게 손짓을 했다.
“어서 오게!”
두 사람은 독사눈과 이무환을 번갈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이무환이 조용히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사팔뜨기와 칼자국은 정신이 제압당한 강시처럼 뻣뻣한 몸으로 탁자에 다가갔다. 그나마 콩콩 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 이무환이 독사눈에게 물었다.
“얼마 남았지?”
“좀 전에 제가 열다섯 냥 드렸으니까, 스물다섯 냥 남았습니다.”
이무환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스물다섯 냥이면 우리 계산이 끝날 것 같은데. 이자는 안 받을 거니까 걱정 마.”
두 사람은 이무환이 뭘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계산이 끝난다는 말에 두 사람은 몰래 숨겨두었던 은자까지 모조리 털어놨다.
그때다. 이무환이 고개를 들더니 객잔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흑의인 하나가 이층에서 내려오더니 객잔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대홍루에서 본 자인 듯했다.
같은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기운, 불길한 기운이.
‘저자가 여기에 왜 온 것이지?’
아쉬웠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그자의 기운을 알아봤을 텐데…….
이무환이 독사눈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나간 흑의인. 언제 들어왔지?”
독사눈이 망설이는 사이 이무환이 혁수린에게 명을 내렸다.
“꼬챙이, 올라가서 방금 나간 자가 앉아 있었던 곳에 뭐가 남았는지 알아봐.”
혁수린은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내려왔다.
흔적이 남은 탁자가 하나밖에 없었으니 시간이 걸릴 것도 없었다.
“빈 찻잔만 하나 덜렁 있습니다, 조장.”
단순히 식사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식사를 했다면 음식 그릇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앉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에는 빈 찻잔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무환은 구석의 탁자를 닦고 있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점소이!”
독사눈조차 꼼짝을 못하는 이무환이 점소이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뽀르르 달려온 어린 점소이의 허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졌다.
“부르셨습니까?”
“이층의 찻잔 주인, 언제 들어왔지?”
“반 시진쯤 되었습니다요.”
“반 시진? 혹시 그가 식사를 했어?”
“아닙니다. 그냥 차만 마시다 나갔습니다.”
이무환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왜 그러는 거요, 조장?”
영호승의 질문에도 이무환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을 셀 시간이 지날 즈음, 이무환이 이마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벌떡 일어난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은자를 쓸어 담았다. 단 한 번의 손짓에 티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지, 알아볼 것이 있으니까.”
독사눈이 급히 물었다.
“그럼 음식은……?”
“당신들이 다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