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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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화
10화
이무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이무환의 등을 바라보는 나철위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묘한 뜻이었다. 조용히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만들겠다니.
나철위는 왠지 모르게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재미있는 놈이 들어왔어. 오랜만에 심심하지 않게 지낼 것 같군.’
건물 밖으로 나온 이무환의 눈빛이 깊어졌다.
결코 앞에 늘어선 이십여 명의 풍운대원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투기에 주눅이 들어서도 아니고.
풍운대주 폭풍철검 나철위, 바로 그자 때문이었다.
‘의외군.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자야.’
이틀 전, 검운장의 장로인 사마성문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검운장에서 서열 이십 위에도 들지 못하는 풍운대의 대주가 그보다 더 강한 고수라니.
이무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철위는 오대 중 제일 말단인 풍운대의 대주다.
그렇다면 다른 대주들도 나철위만큼, 아니, 나철위보다 더 고수여야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다른 사대의 대주들 중 누구도 나철위보다 강한 자는 없었다.
‘도대체가 알 수 없군. 왜 저 사람은 풍운대에 만족하고 이곳에 있는 거지?’
어쨌든 두고 보면 알 일.
이무환이 의문을 털어내고 막 계단을 내려섰을 때다. 누군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이봐, 자넨 앞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나?”
벽에 등을 기댄 채 개미 싸움을 즐기던 자였다.
그제야 이무환은 천천히 좌우를 훑어보았다.
이십여 명의 풍운대 대원들이 일제히 싸늘한 기운을 일으킨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무환은 양손을 깍지 끼고 우드득, 소리를 내며 말했다.
“번거로우니까, 덤비려면 한꺼번에 덤벼요. 빨리 끝내고 가서 쉬고 싶으니까.”
어이가 없는지 풍운대 대원들의 눈과 입이 커졌다.
“미친놈! 뭐? 우리를 한꺼번에 상대하겠다고? 네가 절정고수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이무환은 무심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이.
“우리 내기할까요?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에게 벌을 주기로 말입니다. 전부 덤벼도 상관없는데.”
몇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자신들이 구박받는 풍운대의 무사들이라지만 한 사람에게 전부 덤비다니.
“저 새끼가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선배들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완전 미친놈이잖아? 저거 그냥 둘 거야? 그냥 패버리자고!”
그들의 아우성에 이무환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기 싫으면 말고.”
그때 악에 받친 소지공이 나섰다.
“좋아! 하자! 대신 절대 약속을 어겨선 안 된다는 걸 분명히 해!”
이무환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답했다.
“그럼요! 약속을 어기면 남자도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나섰다.
“내가 먼저 해보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였다.
“나는 한초강이라 하네. 삼조의 조장을 맡고 있지.”
‘삼조의 조장이라……. 적당하군.’
이무환이 천천히 걸어서 마당 한가운데 멈춰 서자 한초강이 옆구리에서 두 자루의 짧은 곤을 꺼내 들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죠.”
이무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 한초강이 번개처럼 튀어나가며 두 자루의 곤을 휘둘렀다.
이무환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 자루 곤 사이를 흐릿한 안개처럼 빠져나가며 두 손을 휘둘렀다.
한초강은 결코 자신의 적수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단 일 초에 저승으로 보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상대는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할 사람들이니까.
투둥!
이무환은 상대의 곤을 가볍게 밀어내며 이초를 흘려보냈다. 그러다 한초강이 더욱 기세를 올리며 곤을 휘두르자, 우수로는 두 자루의 곤을 걷어내고, 좌수를 빈틈에 꽂아 넣었다.
대경한 한초강이 빙글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이무환의 주먹이 옆구리에 틀어박힌 후였다.
퍽! 퍼버벅!
“커억!”
그걸로 끝이었다. 한초강은 단 삼 초 만에 바닥에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꺼꾸러지고 말았다.
“다음!”
이무환의 목소리가 풍운대의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눈치를 보던 풍운대의 무사들 중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좋아! 합공해도 된다고 했으니,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세 사람은 기세등등하게 이무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채 오 초가 지나기도 전, 앞마당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전신을 십여 차례씩 두들겨 맞은 세 사람이 낯짝을 바닥에 처박고 엎어진 것이다.
“씨발, 겁나게 세잖아? 다 덤벼!”
마침내 소지공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동시에 우르르, 십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무환이 환하게 웃었다.
한 시진 후.
“앉아! 일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지는 구령이 떨어질 때마다 십여 명이 앉았다 일어섰다. 등에 각기 한 사람씩 업고서.
“무공을 십여 년이나 익혔다는 사람들이 마보 자세도 제대로 못 취합니까? 누구는 여덟 살 때 백 근짜리 돌을 지고 마보 자세를 두 시진이나 채웠는데 말입니다!”
지붕 위에서 울리는 악귀의 목소리.
등에 업힌 사람들이나, 마보를 위한 채 앉았다 일어서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
‘거짓말하지 마!’
‘악귀 같은 새끼!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놈은 내기에서 이기더니, 갑자기 한 사람을 업으라 했다.
‘백 근이 넘으니 다리 힘 기르기에는 딱 좋군’이란 말과 함께.
그러고는 마보를 취한 채 구령에 맞춰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라고 했다.
별 웃기지도 않은 짓이었다.
자기는 마음이 약해서 심한 벌은 줄 수 없다나?
처음에는 할 만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처럼 느껴져서 하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반 시진이 지나자 서서히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진. 등에 업힌 사람은 제발 시간이 늦게 가기만을 바랐다. 동료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앉았다 일어서는 사람들은 태양이 너무도 늦게 가는 것 같아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등에 업은 동료를 아무 곳에나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고의로라도 넘어져서 쉬든가.
오죽했으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해서 머리를 땅에 박은 채 물구나무 서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지붕 위에 앉은 놈이 말했다.
“전쟁에 나가서 동료를 버릴 생각은 아니겠죠? 힘들더라도 끝까지 함께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뿐인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면 남자가 아닙니다. 안 그래요? 남자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를 버리지 않는 법이죠!”
미칠 일이다. 시궁창에 담근 걸레로 주둥이를 막아버리고 싶은 마음뿐.
“힘들 내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제 반 시진만 견디면 된다니까요?”
반 시진!
그들에게는 오십 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아득한 시간이었다.
“일어 서!”
풍운대원들은 덜덜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앞이 노랗게 보였다.
그때 천상의 선녀가 부르는 노랫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교대!”
외부로 나갔던 풍운대의 대원들이 돌아온 것은 석양이 지기 전이었다.
이질적인 분위기를 접한 그들은 자신들이 거처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뭐,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꼭 초상집 온 것 같잖아? 우리가 잘못 찾아왔나?”
건들거리며 다가와 농담을 건네는 놈도 없다.
시시콜콜 밖에서 벌어진 일을 묻는 놈도 없다.
은근히 어느 기루의 어떤 기녀 속곳 색깔을 물으며 킬킬거리는 놈도 없다.
마당엔 한 놈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두어 명이 보이긴 하는데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뜬 채 오간다.
풍운대의 대원들이다. 이곳이 풍운대의 거처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풍운대 부대주 유태신은 일단 수하들을 쉬게 하고 대주인 나철위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방을 나서는 한초강이 보였다.
“이봐! 한 조장!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한초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짧게 말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 어, 그야…….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람들이 안 보여?”
한초강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막힌 혈관을 풀기 위해 운기를 하느라…….”
“뭐? 대체 뭔 말이야? 갑자기 웬 운기? 어디 다른 임무라도 맡았었나?”
그때였다.
덜컹, 바로 옆의 방문이 하나 열리더니 이무환이 밖으로 나왔다.
그를 본 유태신이 한초강에게 물었다.
“저거, 누구지? 처음 보는 놈 같은데.”
이무환이 직접 대답했다.
“풍운대의 신입 대원인 이무환이라 합니다.”
“신입?”
유태신의 뒤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그제야 흥이 인다는 눈빛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한초강의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흠, 혹시 자네가 요즘 소문이 자자한 전 향주의 조카 아닌가? 듣기로는 전 향주의 조카가 우리 풍운대에 들어온다고 했다던데.”
“맞습니다. 전 향주님께서 제 숙부님이십니다.”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고개가 뻣뻣한 이무환이다.
유태신은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 명색이 풍운대의 부대주가 아닌가?
그런데 조장도 아닌 풍운대의 일반 대원이 어깨를 펴고 뻣뻣이 고개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다니.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뒤에 서 있던 자들 중 긴 머리카락이 반쯤 얼굴을 가린 무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꽤 건방지군. 전 향주님의 조카라는 것이 대단한 지위인 줄 아나 보지?”
이무환이 어깨를 털고 솔직히 말했다.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속으로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맞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자네에게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할 것 같군.”
한쪽에 서 있던 한초강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잔뜩 기대에 찬 표정.
‘차복승, 네가 무덤을 파는구나. 우흐흐흐…….’
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린 자는 이조장인 차복승이다.
앙숙까지는 아니어도 자신과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자신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차복승은 제법 높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줄 알았다.
그 때문에 자신은 삼조장으로 밀려났고,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차복승이 이조장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잘하면 꼴 보기 싫은 차복승이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보기 싫은 악귀처럼 보였던 이무환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무환이 자신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가르침을 내려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한초강이 재빨리 유태신에게 말했다.
“부대주님, 대주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이곳의 일은 차 조장에게 맡겨두시고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음? 그럴까? 이봐, 차 조장,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도록 하게.”
차복승이 힘차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부대주. 적당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잠시 후, 방문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열렸다. 동시에 그 사실을 안 차복승의 입가로 싸늘한 냉소가 흘렀다.
‘나를 입만 살았다고 무시하는 새끼들, 나 차복승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주마!’
차복승이 검지를 뻗어 이무환을 가리켰다.
“이제부터 신입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 너,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