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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룡기 9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5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광룡기 9화

 

9화

 

 

 

 

 

 

 

 

“예, 령주.”

 

“나가 봐.”

 

갈의인이 허리를 한 번 깊숙이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흑의인은 손에 들린 곰방대를 움켜쥐었다.

 

마른 대나무로 만들어진 설대(연도:煙道)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툭, 떼구르르…….

 

끝에 달려 있던 동으로 된 대통(안수:雁首)이 떨어져 굴러간다.

 

꼭 자신의 목이 떨어져 굴러가는 것만 같다.

 

흑의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그는 이를 갈고 뒷짐 진 손을 움켜쥐었다.

 

벌써 련(聯)에 연락을 넣지 못한 지 열흘이 넘었다. 당연히 그곳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젠장! 영패가 있어야 낙인을 찍어 보내지.’

 

낙인이 찍히지 않은 것은 중간에서 걸러진다. 아무리 위급한 소식을 전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러다 중대한 사태가 일어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만 한다.

 

문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후계자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나이 먹은 자신이 사령주라는 것에 불만이 많은데,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때문에 그리 된다면 견딜 수 없을 터였다.

 

‘누군지 알아내기만 하면 사지를 잘라내 죽여 버리겠어!’

 

 

 

제4장. 풍운이 일고, 수하를 거두다

 

 

 

 

 

 

 

1

 

 

 

석양이 질 무렵 전호가 굳은 얼굴로 이무환을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음…….”

 

전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무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카, 정말 노장주께 말하지 않을 건가?”

 

사마추경에게 신세를 털어놓지 않겠느냐는 뜻. 전호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이무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요. 아직은 그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노장주께서 아버지를 용서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대해선 전호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네 아버지야 그렇지만, 자네는 또 다르지 않겠나?”

 

“기왕이면 아버지까지 용서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전호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갑자기 화가 난다는 듯 버럭버럭 소리쳤다.

 

“나참, 이런 아들을 그렇게 패다니! 자네 아버지, 내 다음에 만나면 그냥 두지 않을 거구만!”

 

‘글쎄요, 아버지 손가락 하나 감당하시기도 힘들걸요?’

 

이무환은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겉으로는 너무 그러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아버지가 어디 저를 미워해서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기에 갑자기 그것을 묻는 겁니까?”

 

그제야 전호가 다시 이무환을 직시했다.

 

“뭔가 일을 해야 할 텐데, 차라리 다 알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던 거네. 말단 무사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긴 마냥 놀고 먹으며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며칠을 편하게 지냈더니 온몸이 근질거리던 터였다.

 

“전 숙부, 제가 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어허! 백부래도! 내가 자네 아버지보다 생일이 석 달이나 빠르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게… 이제 와 말이지만, 아버지가 이름을 속일 때 나이까지 한 살 속여서…….”

 

전호가 움찔했다. 이무환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좌우간 그건 그렇고. 뭐, 할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험, 일이 왜 없겠나? 명색이 항주제일 검운장인데. 문제는 조카 실력인데…….”

 

이무환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제가 누굽니까? 아버지의 아들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어지간한 실력은 되니까요.”

 

“그래?”

 

전호가 재빠르게 이무환의 몸을 훑어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조금 마른 듯싶은 체격이야 섬에서 고생만 하고 살았으니 그러려니 했다. 한데 자세히 보니 제법 탄탄해 보이는데다 균형이 완벽히 잡힌 몸이다.

 

게다가 이충량이 무공을 가르친다며 죽을 고생을 시켰다하지 않았던가.

 

“호오, 내 미처 몰랐군. 정말 한 수가 있어 보이는데?”

 

“아마 직접 시험해 보면 더 놀랄 겁니다, 전 숙부.”

 

“흠… 자신있다, 이 말이지? 좋아! 어디 조카 실력 좀 보자!”

 

 

 

쩌정! 쩌저정!

 

세 걸음을 물러선 전호가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검을 들어 겨루기 시작한 지 벌써 일각째. 도무지 승부를 가를 수가 없다.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교묘히 빠져나가는 이무환이다.

 

게다가 이무환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인 반면, 자신은 이마에 흐르는 땀이 눈으로 스며들 지경이다.

 

그나마 크게 밀리지 않는 게 다행이기는 한데, 어쩐지 이제는 그것조차 이무환이 봐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판이다.

 

‘제기랄, 쪽팔리게 이게 무슨 꼴이람?’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이무환이 이성의 공력도 끌어올리지 않고 있다는 걸.

 

어쨌든 더 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게 분명한 일. 전호는 검을 하단으로 내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정말 대단하군! 조카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네!”

 

“다 숙부님이 봐주셔서 그런 것이지요.”

 

“하, 하, 하! 봐주기는. 조카의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거지.”

 

전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좌우간 안심이군. 그 정도 실력이라면 당장 신검대에 들어가도 되겠어.”

 

신검대라면 검운장의 최정예 무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인원은 오십 명 정도. 대부분이 명문정파의 제자들로, 검운장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무환은 그래서 신검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곳에 갔으면 싶습니다, 전 숙부.”

 

“다른 곳? 왜?”

 

“얽매이고 싶지가 않거든요.”

 

권한이 크고 위상이 높은 만큼 신검대의 규율은 엄격했다.

 

이무환은 그것이 싫었다. 권한과 위상보다는 자유로움이 더 좋았다.

 

“그래? 그럼 염두에 둔 곳이라도 있나?”

 

“풍운대에 들어갔으면 합니다.”

 

그 말이 뜻밖인 듯 전호의 눈이 커졌다.

 

“풍운대? 왜 하필 뜨내기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가려고 그러는 건가?”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조장보다 강한 일반 대원들. 뭔가가 있는 듯했다. 아니라면 조장보다 강하면서 일반 대원으로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검운장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을 듯했다.

 

게다가 나머지 사대와 달리 풍운대는 대부분 낭인들이 아닌가.

 

얽매이지 않은 자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들 말이다.

 

 

 

2

 

 

 

검운장의 주세력은 삼각, 오당, 오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추인 삼각은 각기 이단을 둔 채 검운장을 지휘하고, 오당은 각 당마다 삼향을 두고 검운장의 잡다한 대소사를 관장했다.

 

그에 반해 오대는 온전한 무력 단체였다.

 

신검대와 금검대와 용검대가 명문정파의 제자들 아니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중견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철검대와 풍운대는 중소 문파의 젊은 무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북쪽 외곽에 있는, 총인원 백여 명의 풍운대는 낭인들의 집합소와도 같았다.

 

 

 

이무환이 풍운대에 도착했을 때는 사시가 막 지나갈 무렵이었다.

 

마침 풍운대원 중 상당수가 임무를 맡아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남은 자들은 삼십여 명 정도. 여기저기 앉아 십일월의 햇살을 즐기던 그들은 이무환이 들어가자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참 적을 맞아 싸우고 있는 개미를 쳐다보던 자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저놈이 바로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놈인가?”

 

반대편에 앉은 자가 눈만 힐끔 돌리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놈 같은데?”

 

“정말 낯짝 하나는 그럴듯한 놈이군.”

 

“그러니까 계집들이 저놈에게 사족을 못 쓰지.”

 

이무환이 묵묵히 그들 옆을 지나쳤을 때다. 창틀에 걸터앉아 질겅질겅 풀을 씹고 있던 자가 씹던 풀을 뱉어내더니, 짜증난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아, 씨발. 새카맣게 어린 어떤 놈은 계집들이 환장해서 주둥이를 서로 부딪치려고 하는데, 나는 이곳에서 풀이나 씹고 있어야 하다니. 신세 참 엿 같구만.”

 

쥐처럼 이가 툭 튀어나온 자였다.

 

이무환이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생기라고 했나?”

 

다시 풀 하나를 입에 넣으려던 쥐상의 청년이 동작을 멈추고, 역시나 쥐처럼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사위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낄낄낄, 오랜만에 옳은 소리 하는 놈을 보는군.”

 

“하긴, 소 조장이 생긴 게 좀 그렇긴 하지. 클클클클…….”

 

“푸흐흐흐, 너무 그러지들 말게. 그래도 물건은 제법 쓸 만하다구.”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갈 즈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 조장이라는 청년이 천천히 창틀에서 내려왔다.

 

그러든 말든, 이무환은 풍운대의 건물 안쪽으로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소 조장이라는 청년이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데도, 이무환은 강아지가 따라오는 것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묘한 동행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한 이무환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 건데, 따라올 거요?”

 

“너 이 새끼, 들어가기 전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이무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말이오, 누가 나에게 욕하는 걸 되게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욕하지 마쇼.”

 

“이 씨발놈이…….”

 

소 조장, 소지공이 일 보에 이 장의 거리를 좁히며 이무환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순간이었다.

 

이무환이 파리를 쫓듯 손을 뿌리쳤다.

 

타닥!

 

두 팔이 양쪽으로 벌어진 소지공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가볍게 걷어낸 것 같은데도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이, 이 개자식이!”

 

주춤거린 그가 욕을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이무환의 좌수가 죽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소지공이 화들짝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허공에 매달렸다.

 

“커억!”

 

축 처진 채 덜렁거리는 두 팔. 순식간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 소지공의 이가 악다물어졌다.

 

“욕하지 말랬지.”

 

“커… 어……. 이 개…….”

 

목이 손아귀에 잡혔으면서도 시뻘게진 얼굴로 끝까지 욕을 하려는 소지공이다.

 

이무환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서서히 목살 속으로 파고든다.

 

벌게진 얼굴이 시커멓게 물든다.

 

이무환이 튀어나올 듯이 불거진 소지공의 두 눈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일단 대주께 신고부터 해야 하니까, 들어갔다 와서 보자고. 할 말 있으면 그때 해.”

 

말을 마친 이무환은 좌수에 목이 잡힌 소지공을 홱, 내던졌다.

 

그러고는 데굴데굴 구르는 소지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너 명이 건물 양편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잠시간, 풍운대의 앞마당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건물의 문을 여는 이무환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싸울 때 기선을 제압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지. 흠, 역시 재미있는 곳이야.’

 

 

 

건물 안은 매우 단순했다.

 

화려함은커녕 단순한 장식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 빈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좌우 양편에 서 있는 두 사람만 아니었다면, 기다란 방 끝에 앉아 있는 커다란 체구의 중년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무환이 안으로 들어가 걸음을 옮기자 좌우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눈을 좁혔다. 예리한 눈빛, 뭔가를 탐색하려는 듯 전신을 훑어보는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무환은 그들의 눈빛에 아랑곳없이 전면의 중년인을 향해 걸어갔다.

 

커다란 체구의 사십대 중년인.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자. 그가 바로 풍운대의 대주이며, 한때 철랑(鐵狼)이라 불렸던 폭풍철검(暴風鐵劍) 나철위였다.

 

가까이 다가가 걸음을 멈추자 그가 나직하면서도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대단하군. 소 조장도 그리 약하지 않은데 말이야.”

 

밖의 상황을 다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자가 조장이었나?’

 

이무환은 거두절미하고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이무환이라 합니다. 풍운대에 신입으로 배정받았습니다.”

 

“전호의 조카라고 하던데, 맞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호하고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군.”

 

“숙부와 조카가 꼭 닮으란 법도 없지요.”

 

가늘게 뜬 나철위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긴……. 좌우간 시끄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저도 원래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저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을 생각입니다.”

 

나철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조용하기는 애당초 틀렸다는 말이다.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도 태연하게 말한다.

 

풍운대가 원래부터 조용한 곳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가벼운 바람이 아니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긴장감이 살아 있어야 칼이 녹슬지 않을 테니까.’

 

“험, 그래도 지나치게 시끄러워지면 내가 제재를 가할 거네. 알았으면 그만 나가보게나.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지내고.”

 

“곧 조용하게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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