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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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8화
8화
“중요한 이야기? 그럼 나를 따라오게나.”
눈살을 찌푸린 전호가 먼저 몸을 돌렸다.
코가 붉은 수문위사가 눈을 찡긋하며 마치 삼 년은 사귄 사람처럼 안으로 따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반 냥의 위력이었다.
이무환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마침내 어머니의 집 안에 발을 들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기는데 어머니의 살내가 풍겨 나오는 것만 같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한 기분.
이무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자위가 붉어질 것 같았다.
드넓은 마당을 빙 둘러가자 죽 늘어선 객방이 나왔다.
전호는 그중 방 하나를 택해 안으로 들어가면서 객방을 관리하는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게나.”
그러고는 의자에 앉자마자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 말해보게나.”
이무환은 전호를 향해 눈을 고정시키고 나직이 물었다.
“양충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전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양 씨 때문에 왔다더니……. 그럼 혹시 자네가 그의 아들……?”
이무환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호는 눈을 홉뜬 채 고개를 끄덕이는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랬군, 그랬어. 정말 아가씨를 많이 닮았군.”
“아버지는 가끔 전 아저씨에 대해 말씀을 하셨지요. 좀 굼떠서 그렇지 의리가 있는 분이라고 말이죠.”
전호의 홉뜬 눈이 세모꼴로 꺾어졌다.
“양가가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굼뜨다고?”
“양가가 아니라 이갑니다. 아버지는 사정이 있어서 본이름을 숨길 수밖에 없었지요.”
“빌어먹을 놈.”
“원래 이름도 양충이 아니라 충 자, 량 자를 써서 충량입니다.”
“그럼 이… 충량?”
“예, 맞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이름이지요.”
“그런데… 어째 말이 그리 곱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아버지 때문에 수백 번이나 죽을 뻔하다 살아났지요.”
전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가? 아버지 때문에 수백 번이나 죽을 뻔했다니?”
“후우…….”
일단 한숨부터 내쉰 이무환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반의반 정도만. 다 말하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도 일각이 지나기 전, 전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눈을 부릅떴다.
“뭐야? 그런 미친놈이 있나!!”
“그때는 아버지도 심적으로 고생이 많았던 때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아버진데, 참아야지 어떡합니까?”
아버지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친구에게 그 정도 혼나는 말을 들어도 싸다.
팔 부러진 자신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던 분이 아니시던가.
“나는 어릴 때 두 다리가 다 부러지고도 얼굴 한 번 안 찡그렸어, 임마. 자식이 엄살은…….”
그러시면서.
물론 자신은 그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가시 하나 박혔다고 오만상을 찌푸리시는 분이 아버지 아니던가.
좌우간 살짝 감정을 건드린 것이 주효한 듯했다.
‘생각보다 순진한 분이시군.’
전호가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만. 그런 고통을 겪고도 그리 아버지를 생각하다니.”
“아버지가 어디 저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그래, 하긴……. 끙, 그래도 그렇지, 그 친구도 참…….”
“그건 그렇고… 전 아저씨, 저는 어머니가 여기에 사셨다는 것만 알지,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저씨가 좀 가르쳐 주세요.”
막 눈가에 맺히려던 눈물을 잽싸게 닦아낸 전호가 가슴을 탕탕 쳤다.
“당연하지! 조카는 그저 이 백부만 믿게나! 내 알고 있는 것은 다 알려줄 테니까!”
“그리고 당분간은 저에 대한 것을 외조부나 외숙부께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왜?”
“싫어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딸의 아들이든, 여동생의 아들이든, 고종형제든, 이무환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좋아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싫어할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의 몫을 빼앗길지 모른다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전호는 이무환의 마음을 알고 측은한 눈빛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조카.”
다음 날 아침.
목욕을 마친 이무환은 전호가 가져다준 깨끗한 청의로 옷을 갈아입고, 흘러내린 머리를 질끈 뒤로 묶고서 전호의 거처를 나섰다.
옷이 날개라더니 전날의 촌닭 이무환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가 정원을 오락가락한 지 한나절,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검정당의 삼향주인 웅검 전호의 거처에 신비한 공자가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큰 키,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인상, 강인해 보이는 체격!
그야말로 명문가의 공자들조차 한두 가지쯤 갖추지 못한 것을 그는 다 갖추고 있다고 했다.
소문이 돌자 검정당의 시비들이 바빠졌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괜히 전호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다 보니 걸음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흘, 이무환은 검운장의 상황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사마추경이 십 년 전에 물러나고, 지금은 큰아들인 사마성운이 장주라는 것. 검운장의 간부들 이름, 건물 이름, 장원의 지리 등등…….
전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지만, 때로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봐서 스스로 익힌 것도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큰 도움은 검정당의 시비들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이무환이 질문을 던지면, 그녀들은 삼 년 전, 오 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까지 모조리 기억 속에서 뽑아내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이무환의 질문이 길어지기만을 바랐다.
“내가 너무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호호호호, 걱정 마세요. 오 당주님은 지금 밖에 나가셔서 한 시진이 넘어야 들어오세요. 아참! 아까 들으니까, 소주의 거부인 소향장의 장주님께서 저희 장주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해요. 아마…….”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말해주니 이무환은 그냥 듣고만 있으면 되었다. 슬며시 몸을 기대려는 시비들의 몸을 피하면서.
4
검운장에는 정식으로 검운장에 적을 올린 사람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 적지 않았다. 이무환이 전호의 조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금지로 정해진 곳은 검운장의 사람이라 해도 일정한 지위에 오르지 못하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무환은 그러한 곳은 최대한 피해서 돌아다녔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밤에라도 몰래 장원의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무환은 도둑처럼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으로서 온 것이지, 뭔가를 탐색하고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아직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될 수 있는 한 말썽은 피해야 했다.
“날씨 한번 겁나게 좋군.”
검운장에 들어온 지 닷새째. 그날도 이무환은 하늘을 힐끔 쳐다보고는 평소처럼 일정한 길을 걸어 장원을 둘러보았다.
그가 연무장 쪽으로 갈 때였다. 저쪽에서 한 사람이 햇살을 등에 지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스물이 조금 넘은 듯했는데, 척 보기에도 단순한 일반 무사가 아니었다.
깨끗한 백색 비단옷, 백색 혁피화, 옆구리에는 화려한 문양의 검이 장식처럼 매달려 달랑거렸다. 눈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간 눈만 아니라면 누구든 호감을 가질 만한 자였다.
‘누구지?’
보고 있는 동안 지나다니던 몇 사람이 인사를 했다. 제법 지위가 높은 자라는 말.
이 장의 거리가 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자군. 자넨 누구지?”
처음 본다면서 하대를 한다. 이곳에서 그럴 만한 자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젊은 사람은 더 그렇다.
‘검운장 핵심 인사의 자식인가 보군.’
이무환은 대충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무환이라 합니다.”
“이무환? 아! 검정당에 기거한다는 신비의 공자?”
조소가 물씬 풍기는 표정.
이무환은 그의 표정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검운장, 일단 참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테니까. 조금은 괜찮고, 조금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자신이야 아주 멋진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뉘신지?”
“나는 사마충이라 하네.”
그동안 들은 정보를 더듬어봤다. 금방 그의 이름이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사마충. 장로인 사마성문의 큰아들?’
거드름을 피울 만했다.
거기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니 외사촌형인 셈이다.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기에는 조금 그랬다.
“어디 가는 길인가?”
“그냥 구경 삼아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그래서 묻는 대로 순순히 답했다. 그런데 사마충이 또 비꼬듯 말했다.
“금지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조심해서 다니도록 하게. 그 잘난 얼굴 상하면 시비들이 싫어할지 모르니까. 하하하, 얼굴 상하면 밥 얻어먹기 힘들지 않겠나?”
‘너나 잘해. 너처럼 함부로 입 벌렸다가 이빨 부러진 상어가 수십 마리야.’
마음은 그래도 공연한 말썽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웃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가보게. 좌우간 만나서 반가웠네.”
여전히 비웃음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다. 그런데 지나쳐 가던 사마충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거참, 기생오라비 같은 애송이를 장원 안으로 들이다니, 전 향주도 제정신이 아니군.”
이무환은 두어 걸음 걷다 말고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뒷짐을 진 채 하늘을 보며 기분 좋게 웃으며 걸어가는 사마충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득 사마충의 앞쪽을 바라보던 이무환의 눈빛이 빛났다.
‘혹시 알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비룡도에선 가끔 하늘을 바라보다 얼굴에 갈매기 똥을 맞기도 하지.’
씩, 웃은 이무환은 왼손 검지를 살짝 튕기고, 오른손을 슬며시 당기며 오므렸다.
순간, 사마충의 왼발 앞에 있던 청석이 툭 튀어나왔다.
“어엇?!”
사마충이 놀라서 급히 오른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뒤로 힘껏 들렸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뒷짐 진 두 손마저 풀어지지 않았다.
퍽!
“커윽!”
당연하게도 얼굴이 그대로 청석 위로 떨어졌다.
문제는 그의 얼굴이 떨어진 곳에 누런 뭔가가 한주먹 정도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크으윽! 켁켁! 어떤 개새끼가 이곳에다가 똥을……!”
고고한 문사 같던 그의 입에서 ‘개’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이무환은 ‘똥’ 소리를 뒤로한 채 환한 햇살을 받으며 연무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게 만년송처럼 살아가려는 나를 왜 건드려? 가만? 혹시 저게 성하루 문 닫게 하라고 했던 그 ‘공자’ 아냐?’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선지 별다른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기분이 풀어진 이무환은 대연무장의 구석에 앉아 무사들이 수련하고 있는 모습을 구경했다.
무슨 절기를 연마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가 보는데도 사람들이 제지하지 않았다.
‘쯔쯔쯔, 도대체가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백 근 돌을 안기고 마보를 하루에 한 시진씩은 시켜야 할 거 같은데?’
그가 수련하고 있는 검운장의 무사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삼십여 명의 무사가 동문으로 들어는 것이 보였다.
이무환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돌아갔다.
“저들이 풍운대인가 보군.”
가슴에 풍운이라는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처음에는 오대 중 최약체라는 풍운대인지라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대충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거의 다 들어섰을 즈음이었다.
‘어? 저 사람들, 제법이잖아?’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 간부라는 조장도 아니고 일반 무사들이었는데 의외로 강하게 느껴졌다. 조장이라는 자들보다 더.
이무환의 눈이 반짝였다.
‘얼래? 어떻게 졸개들이 더 강한 거지?’
그들은 빠르게 연무장을 벗어나 북문 쪽으로 사라졌다.
이무환은 북문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는 그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5
입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 벌써 며칠째. 한 동안 끊었던 아편까지 손을 댔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제는 은근히 짜증이 날 정도.
‘대체 어떤 놈이 가져갔을까?’
그의 짜증 가득한 눈이 무릎을 꿇은 갈의인의 뒤통수를 향했다.
“찾았나?”
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짧은 물음이 흘러나온다.
무릎을 꿇은 갈의인은 허리를 더 깊숙이 숙이고 땀을 흘렸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흑비파의 등을 친 놈이 정파의 놈일 리는 없다. 그러니 흑도 놈들을 조져 봐.”
“놈들과 직접 얽혀들면 정파 놈들이 눈치 챌지 모릅니다, 령주.”
“후우우…….”
파란 연기를 뱉은 흑의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명을 내렸다.
“기루를 뒤져라. 흑도 놈들 중 근래에 돈을 많이 쓴 놈이 있는가 알아봐. 혹시 모르니 전장에 동패를 맡긴 놈이 있는지도 알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