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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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4화
4화
꾸우우우!
배 옆에서 정다운 목소리가 들리자, 이무환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상아, 비아, 이제 그만 가라니까 왜 또 왔어?”
등에 흰 줄이 쳐진 돌고래 두 마리가 배와 나란히 헤엄치고 있다.
십오 년을 같이 지내온 친구 녀석들.
꾸우, 꾸우우…….
녀석들도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걱정 마. 곧 돌아올 테니까. 장대하고 잘 지내고 있어.”
장대는 사자탄의 소용돌이 밑에 사는 늙은 바다뱀의 이름이었다.
자신이 장대를 처음 알았을 때, 그 녀석은 상아와 비아하고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었다. 친하기는커녕 매일 싸우다시피 했었다.
그 이유를 안 것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장대는 사자탄 밑의 바다 동굴에서 자라는 신비한 과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상아와 비아가 그것을 욕심내고 바다 동굴로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열다섯이 되던 그해, 지진으로 사자탄 위의 절벽이 무너진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다 밑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장대가 바위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은 상아, 비아와 함께 바위에 깔린 장대를 구해주었다.
그러자 장대는 자신과 상아와 비아가 바다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더는 막지 않았다.
다쳐서라기보다 포기한 듯했다. 아니면 고마워하는 마음에 그냥 놔두었던지.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 외로 바다 동굴 안의 바닷물은 상당히 뜨거웠다. 더 들어가면 몸이 익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들어간 것이 아쉬워서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렇게 숨이 막힐 때까지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들어가자, 어느 순간 뜨거운 물이 용솟음치는 동굴이 나타났다.
그곳은 비룡도의 중앙에 삼 장 정도 높이로 뚫린 공동(空洞)이었는데, 가운데에 있는 붉은 산호처럼 보이는 나무에서 불꽃보다 더 붉은 과실이 자라고 있었다.
동굴에 박힌 열두 개의 구슬 때문인지 영롱한 열매의 빛은 너무 황홀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동굴에서 자라고 있던 과실, 만년해령실(萬年海靈實)은 모두 일곱 알. 그중 네 알을 자신이 얻고, 바위에 눌려 몸을 다친 장대와 상아와 비아에게 사이좋게 한 알씩 주었다.
사실 아버지에게도 한 알을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녹으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모두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말해봐야 없는 것을 다시 구해다 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내공이 급작스럽게 늘기 시작해서 감추느라 혼났었지.’
만년해령실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곳에 남은 글을 보고나서였다.
그곳에는 천노광자가 절벽에 남긴 무공의 마지막 구결도 있었는데, 만년해령실의 인연이 닿지 않으면 어차피 마지막 구결이 소용없기에 그리 안배한 듯했다.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그곳의 구결을 알려주지 않았지. 뭐, 결국은 잘한 일이었지만…….’
일 년가량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구결을 아버지가 알았다면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후우,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는 내가 뭘 숨긴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이무환이 잠시 그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을 때다.
꾸우우!
상아가 길게 소리를 내지르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촤악!
상아와 비아가 동시에 바다를 가르며 튀어 올랐다.
마치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듯했다.
“꾸꾸꾸꾸…….”
이무환도 입을 오므리고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첨벙!
물장구를 치며 떨어져 내린 상아와 비아가 배를 한 바퀴 돌더니 속도를 늦추었다.
이무환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점으로 변해 버린 정한도를 바라보았다.
그 뒤쪽의 비룡도는 안개가 짙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아직 서서 바라볼지 모르는데…….
2
배가 상산 포구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지기 직전이었다.
이무환은 숯불처럼 타오르는 태양을 가슴에 안고 배에서 내렸다.
포구를 따라 늘어선 수백 채의 건물이 그를 반겼다. 개중에는 낡고 초라한 건물도 있었지만, 정한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층 삼층의 커다란 건물도 수십 채나 되었다.
감개무량. 그 말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심정이 설명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살던 곳이 어디였지?
저쪽이었나? 아니면 저쪽?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세 살 때 떠났는데 저 수많은 집 중 어딘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도 좋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어머니와 살던 곳이 아니던가.
‘어머니! 나 어머니하고 살던 데 왔어!’
떠나올 때는 귀찮았는데, 옥이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데, 막상 발을 딛고 나니 가슴이 뛰었다.
이무환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힘껏 숨을 들이켰다.
진한 바다 냄새에 육지의 흙냄새가 섞여 맡아졌다.
“흠, 역시 흙냄새부터 다르군. 따뜻한 냄새야.”
그때였다.
열 살 정도 되는 꼬맹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이무환의 위아래를 잽싸게 훑어보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혹시 객잔을 찾아가려는 것이 아닙니까? 값싸고, 음식 맛있고, 아늑하니 편안한 곳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마치 한번 훑어본 것으로 너의 모든 사정을 다 알아버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객잔?’
아버지 말로는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라 했다.
물론 정한도에도 가끔 들르는 상선의 뱃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 있다. 하지만 그곳과 육지의 객잔은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인심도 그렇고, 거래 방식도 그렇고.
곧 어두워질 테니 길을 떠나기에도 어정쩡한 시간. 이무환은 꼬맹이의 눈빛이 가소로웠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그런 곳이 있다면 가보자.”
꼬맹이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홱 몸을 돌렸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꼬맹이를 따라 들어간 객잔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초라했다.
탁자라고 해봐야 모두 네 개. 건물도 작아서 잠잘 곳이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이무환이 육지의 객잔이란 곳을 처음 와봤다는 것이었다. 통나무집에서 아버지와 둘만 살았던 그에게는 작은 객잔이 불편하고 못마땅할 것도 없었다.
이무환은 사방을 둘러보고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꼬맹이 말대로 값은 쌀지도 모르겠군.’
그때 꼬맹이가 주방 쪽으로 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손님 모시고 왔어요!”
곧이어 서른가량의 여인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고 주방에서 나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드르륵.
여인의 인사 소리에 맞춰 꼬맹이가 재빨리 의자 하나를 잡아당기고 탁자 위의 먼지를 닦아냈다.
“앉으세요, 손님.”
그런데 왠지 초조한 표정이었다. 행여나 그가 그냥 나갈까 봐 걱정하는 눈치.
하긴 먼지가 앉은 탁자를 보니 손님이 거의 없었던 듯했다.
‘객잔이 작아도 음식이 맛있으면 손님이 모일 텐데…….’
그렇다면 두 가지 모두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시설도, 맛도.
하지만 이무환은 차마 나가지 못하고 꼬맹이가 내민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얼굴이 조금 풀어진 꼬맹이가 빠르게 요리 이름을 늘어놓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저희 성하루에서 잘하는 요리를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무환이 꼬맹이의 말꼬리를 자르고 간단히 말했다.
“여기서 제일 자신있게 하는 게 뭐냐? 적당한 걸로 하나 해와라.”
어차피 요리 이름을 들어봐야 알지도 못할 거, 오늘의 저녁식사를 꼬맹이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꼬맹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손님. 최고급 요리의 재료는 없어도 제법 고급에 속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있답니다. 잘못하면 손님께서 상당한 손해를 입으실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이무환은 여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이라면 자신이 요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으니까.
“그 말이 옳군요. 제가 객잔이라는 곳에 처음 오다 보니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이무환은 솔직히 말하면서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한 냥 정도 되는 은두(銀豆)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될 것 같습니다만.”
꼬맹이와 여인은 은두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허름한 이무환의 옷만 보고 잘해야 동전 몇 개로 식사와 잠자리를 구하려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한 냥짜리 은두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정도라면 두 끼의 고급 음식과 잠자리를 내드릴 수가 있습니다. 한데 정말 그걸 다 쓰실 생각인가요?”
여인의 말에 이무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냥 넘겨짚는 말이 아니다. 진정이 담긴 말이다.
게다가 꼬맹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면서도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그만큼 자식을 엄하게 가르쳤다는 뜻.
이무환은 기분 좋게 다른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대신 저에게 이것저것 일반적인 상식을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섬에서 처음 나오다 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거든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무지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한데 칼을 찬 무인이 일개 객잔의 주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러한 이무환의 태도가 또 의외인 듯했다. 여인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두를 받아 들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저희가 아는 만큼은 가르쳐 드리지요.”
그제야 꼬맹이가 횡재라도 한 듯 밝게 웃으며 나섰다.
“어머니, 제가 손님께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 그럼 내가 음식을 마련할 동안 그렇게 하려무나.”
음식이 나오기까지 이각가량이 걸렸다.
이무환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지루할 시간도 없었다. 꼬맹이가 어찌나 아는 것이 많던지 자신보다 어른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꼬맹이가 객잔의 상황, 요리, 가격, 여행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 등을 쉬지도 않고 늘어놓을 때 음식이 나왔다.
“알았죠? 큰 도시에는 항상 촌닭을 노리는 건달, 사기꾼들이 있다구요.”
자신이 영락없이 촌닭처럼 보여서 걱정이 되는가 보다. 이무환은 피식 웃으며 꼬맹이의 말을 인정하고 숟가락을 집었다.
“그래, 잘 알았다. 흠, 일단 음식을 먹고 또 들을까?”
하나는 생선으로 만든 탕이었고, 하나는 닭을 주재료로 한 찜이었다.
이무환은 탕을 먼저 한 숟가락 떠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순간 이무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죠?”
꼬맹이가 웃으며 물었다.
이무환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정말로 맛있었다. 전혀 느끼하지도 않았고, 향이 너무 강하지도 않았다.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느낌에 절로 침이 고인다.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내가 잘못 생각했군.’
음식 맛이 형편없어 손님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왜 이런 음식을 사람들이 먹으러 오지 않는지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혹시 다른 곳의 음식이 더 맛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이 아무리 요리를 모른다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무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꼬맹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요리 솜씨는 상산에서도 알아줘요.”
이무환은 숟가락 가득 음식을 뜨며 물었다.
“그런데 왜 손님이 없지?”
“사람들을 우리집에 오지 못하게 하니까요.”
“누가?”
“상천문에서요.”
꼬맹이의 말에 이무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여인이 나오며 꼬맹이의 입을 막았다.
“용아야, 그만 해라. 저, 손님. 그 아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식기 전에 드세요.”
용아라는 꼬맹이는 마지못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엽차를 가져오고 주위의 탁자를 닦으며 이무환 주위를 배회했다.
어떻게 하든 입 안에 담긴 말을 뱉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을 한 채.
피식 웃은 이무환은 일단 빨리 넣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배부터 달랬다.
맛이 좋은 것은 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닭으로 만든 찜도 어찌나 맛있던지 뼈까지 씹어 먹다 용아라는 꼬맹이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푸흐흐! 아저씨, 뼈는 발라내야죠.”
이무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뭘 모르는가 본데, 원래 이런 것은 뼛속에 든 것이 더 맛있는 법이다.”
물론 이가 튼튼한 사람에게만 통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난 이무환은 여인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용아를 손짓해 불렀다.
“상천문이 강호의 문파냐?”
“예.”
대답하는 용아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상산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그들이 왜 막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