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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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화
2화
“그건 좀 너무하고…….”
“그럼, 아버지 형제들의 원한을 갚아줘요? 그분들의 자식들을 도와줘요?”
쾅!
탁자를 내려친 중년인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 형제의 자식들은 또 네 형제가 아니겠느냐? 원한도 갚고, 도와서 집안도 세우고…….”
“그럼 아버지도 가셔야지, 왜 저만 갑니까? 우내십존, 천중십마를 빼곤 적수가 없다면서요?”
“네가 나보다 더 강하잖냐!”
그건 사실이다. 열일곱 살이던 삼 년 전부터 실력이 역전되었다.
“게다가 이 아비는 이제 손이 떨려서 칼을 쥐기도 힘든 상태가 아니냐. 가봐야 오히려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야.”
그것도 그럴듯한 이유였다. 아버지의 손은 일 년 전부터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에 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내가 가면, 그 썩을 놈들이 가만 놔두겠냐?”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버지를 배신자, 도둑놈취급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만? 그렇다면 자신은 그들에게 배신자, 도둑놈의 아들이 아닌가!
‘에휴,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만 했다.
이무환은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어차피 우리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반기기는커녕 죽이려 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중년인, 이충량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형제 좋다는 게 뭐냐? 아무리 미워했어도, 형제들이 어렵다는데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그나마 나에게 잘해준 백부가 크게 다쳤다는데 보고만 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생판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낭만과 행복이 가득한 비룡도를 떠나야 하다니!
환장할 일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형제들을 생각했다고 갑자기 이러시는 거지? 어제 드신 술이 아직 덜 깨셨나?’
이무환이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다.
이충량이 무거운 목소리로 짓눌렀다.
“너도 이제 스무 살이다. 혼자 살아가는 법도 배울 겸 세상에 나가봐야지. 오히려 기회라 생각해라.”
그러더니 철컹, 앞에다 주머니를 하나 던졌다.
“무창까지 가는 데 경비로 써라. 배가 떠나려면 아직 멀었으니 지금 가도 늦지는 않을 거다. 진주도 두 알이나 들었으니까 모자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야.”
노자에 배가 떠나는 시간까지.
말하기 전부터 결정을 내려놓은 듯하다.
이무환은 주머니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가란 말씀입니까?”
이충량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그래, 지금! 대장부는 결정을 내렸으면 머뭇거림이 없어야 한다!”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번복을 하지 않는 아버지다.
태풍의 흐름을 연구하겠다며 비룡도의 절벽 꼭대기에 서서 하루를 버틴 아버지가 아닌가.
벼락의 기운을 느끼겠다며 죽을지 모른다는 자신의 말에도 꿋꿋이 칼을 들고 벼락 아래 몸을 내맡긴 아버지가 아닌가 말이다.
오죽하면 비룡도 건너편의 정한도 사람들이, 하늘은 뒤집혀도 이충량의 말은 뒤집히지 않는다고 할까.
근해의 해적들이 정한도 백 리 인근에 접근하면 쫓아가서 다 죽인다는 아버지의 말에 백 리도 아니고 이백 리 밖으로 돌아서 갈까.
‘아니지, 이제는 나 때문에 삼백 리 밖으로 다니는군.’
좌우간! 그렇다면 섬에 남아 있어봐야 시달리기만 할 게 뻔한 일. 이무환은 차라리 이 기회에 강호라는 곳을 구경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항주제일장이라는 어머니 집도 찾아가 보고. 비룡도에 무공을 남긴 미친 늙은이의 소원도 들어주고.
‘그러고 보니 나가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군.’
다만, 아버지의 고향에는 천천히, 나중에 가봐도 될 일이었다.
집안의 원한을 갚고 형제들의 어려움을 돕는다?
아직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닌데 맞아 죽기 딱 좋은 그곳에 왜 자신이 먼저 애달아서 달려간단 말인가!
‘일단 검운장이라는 곳부터 가볼까?’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무환이 이충량을 직시한 채 물었다.
“당연히, 형제들에게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란 걸 밝히면 안 되겠죠?”
“미쳤냐? 그걸 말하게?”
눈까지 부릅뜨며 멍청한 소리 말라는 투로 소리치는 아버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아버지가 딱 그 짝이다.
‘끄응, 물어본 내가 그렇지.’
죄라면 아버지 아들로 태어난 게 죄였다.
“좋습니다, 아버지! 그럼 몇 가지만 부탁드리죠.”
이를 지그시 깨문 이무환의 말에 이충량의 눈이 반짝였다.
“부탁? 어디 말해봐라.”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표정. 이무환의 눈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우선 그 칼을 주세요. 적과 싸우러 나가는데 그럴듯한 무기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움찔한 이충량이 허리에 매달린 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은은한 묵빛 도병, 안쪽의 칼날은 더욱 진한 묵광이 흐르는 자신의 재산 일호, 묵린도다.
집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누가 알아볼까 봐 도병과 도집에 색도 칠하고, 검은 가죽을 둘러 본래의 모습을 감추었다.
평소부터 아들이 욕심내기에 행여나 아들에게 뺏길까 봐 한시도 허리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칼. 떼어놓으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아침마다 확인을 했던 그 칼!
아까웠다. 하지만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도 잠시, 이충량은 칼을 빼내 이무환에게 내밀었다.
‘나쁜 놈, 끝내 뺏어가는군. 좋아! 준다, 줘!’
“옜다! 또 뭐냐?”
이무환은 마치 본래부터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칼을 받아 옆구리에 척, 꽂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충량은 아들의 느닷없는 행동에 움찔 뒤로 물러났다.
자신만큼이나, 아니, 이제는 자신도 다음 행동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성격이 괴팍한 아들이 아닌가.
“뭐, 뭐냐니까?”
“아아, 좀 가만히 계셔요. 떠나기 전에 한 번 안아보게.”
덥석!
이무환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힘껏 껴안았다.
이렇게 안아본 것이 얼마 만인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뜨거운 심장의 고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콱 메어 말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이무환은 껴안은 손에 힘을 주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떠나더라도 식사 잘 챙겨 드세요.”
“그, 그래.”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좀… 줄여보마.”
“그리고 절벽 밑에서 자라고 있는 삼은 아직 어리니까, 절대! 술 담근다고 캐지 마시고요.”
이충량이 찔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 나도 알지.”
“특히! 뭐가 있나 본다고 사자탄에 뛰어들지 마시고요.”
그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자신과 친구들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아무리 아버지가 강하다 해도.
문득 아버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느껴졌다.
그토록 강하게만 느껴지던 아버지가 어깨를 떨다니.
이무환은 갑자기 시큰한 마음이 들어 말문이 잠시 막혔다.
‘진작 안아볼걸. 그랬으면 아버지를 원망하지만은 않았을지도…….’
그때 이충량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이러다 배 떠나겠다. 항상 조심하고……. 강호란 곳이 고개 돌리면 귀 베어가는 곳이라는 것 잊지 말고. 뭐, 그동안 숱하게 말했으니 네가 누구에게 당할 리야 없지만…….”
천천히 두 부자의 몸이 떨어졌다.
이십 년 만의 헤어짐을 앞에 두어서인지 그동안의 다툼이 모두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무환은 아버지의 어깨를 잡은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갔다 올게요. 아마 옥이가 저 떠나면 슬퍼할 거예요. 아버지가 잘 달래주세요.”
옥이는 정한도에 사는 이무환의 여자 친구였다. 말로는 오빠동생 사이지만,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그래. 걱정 말고 잘 갔다 오너라.”
대답하는 이충량의 눈에도 안개가 끼었다.
생각도 못했던 상황에 이충량은 휘휘 손을 저었다.
“어서 가봐라. 가면서 항주의 네 외가에도 들러보고. 요즘 절강이 시끄럽다던데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가지 말래도 가볼 생각이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래도 어머니의 집안인데 인사는 해야죠.”
물론 인사만 하고 바로 떠날 생각도 없었다.
“그, 그래. 혹시 박대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말거라.”
“걱정 마세요. 제가 어디 아버지하고 같아요?”
‘썩을 놈. 꼭 말을 해도…….’
그래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양반, 네 엄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을 거다. 이 아버지가 매우 미안해하더라고 전해주거라.”
“걱정 마시라니까요? 아버지를 미워하면 미워했지, 설마 손자까지 미워하겠어요?”
“아무래도… 그러겠지?”
“어머니하고 야반도주한 건 아버지잖아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이무환은 손을 흔들며 비룡도를 떠났다.
2
정한도까지는 삼십 리.
돌고래 두 마리가 이끄는 한 척의 조각배가 옅은 안개를 헤치고 빠르게 나아간다.
이충량은 절벽 꼭대기 곰솔나무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 돌고래는 아들의 친구들이었다. 아마 저 돌고래들은 아들이 뭍에 도착하기 전까지 따라갈지도 몰랐다.
‘그것참,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러 환이가 세상에 나가게 되다니…….’
돌고래를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십칠 년 전.
비룡도에 들어간 다음 날, 이충량은 아들과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아들아, 너는 이 아비처럼 도망자로 살지 마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니, 너는 천하를 굽어보며 살아라!”
세 살 먹은 아이에게 비룡도의 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충량은 손을 내밀기보다 스스로 움직일 것을 종용했다. 안쓰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힘든 나날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년간의 수소문 끝에 비룡도를 찾아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집안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책 중 하나에 비룡도에 대한 것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사십 년에 걸쳐 마침내 모든 것을 완성했도다. 이제 비룡도를 떠나 원수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 사형제들을 죽이고, 사문의 보물을 훔쳐 달아난 네 마리의 짐승을 잡아 사형제들의 원혼 앞에 바치리라.
…반나절 만에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오 년 만에 놈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이제 그놈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그것은 천노광자(天怒狂者)라는 기인이 남긴 일지였다.
사람들은 바다를 걸어서 건넜다는 부분을 보고 역시 미친놈답게 헛소리를 지껄인다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충량은 술 마시고 읽어서 그런지 그 부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절대지경에 도달하면 허공도 걸을 수 있거늘, 물 위가 대수겠는가.
하기에 서슴없이 비룡도를 찾아왔다.
그가 이곳에서 뭔가를 완성했다면, 자신 역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못한다면 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충량은 믿었다. 자신을, 그리고 아들을.
어쨌든 결심을 굳힌 그는 그날부터 비룡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다. 하늘도 그의 노력에 감탄했는지, 아니면 아이를 등에 업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벼락을 내리쳐 비룡도의 중앙에 있는 절벽을 강타했다.
사흘 후, 마침내 이충량은 벼락이 떨어진 절벽에서 이끼로 뒤덮여 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천노광자가 남긴 흔적을.
그렇게 이 년째 되던 어느 날.
이충량은 아들의 허리를 밧줄로 묶고 인근에서 가장 사나운 소용돌이, 사자탄에 집어넣었다.
절벽에 적혀 있는 수련법을 보고 바람과 물의 흐름을 느끼는 수련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련 보름째가 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사자탄의 흐름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더구나 무슨 이유에선지 파도마저 출렁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예측 불가능하게 흘렀다.
처음에는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가끔씩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자신이 만든 밧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다.
소용돌이가 갑자기 거세지는가 싶더니, 미처 거두어들일 틈도 없이 세 겹으로 꼰 밧줄이 서로 뒤엉키면서 뚝, 끊어져 버렸다.
“헉!”
안색이 노랗게 변한 이충량은 급히 바위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아들이 소용돌이를 따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아버……. 어푸우!”
아들은 그동안의 훈련 덕분인지 쉽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자탄의 소용돌이는 침착함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흐름이 엉켜 물결마저 거셌다.
“환아!”
잠깐 망설이는 사이 아들의 몸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자탄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게다가 그 밑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말까지 있었다. 오죽하면 정한도의 사람들이 죽음의 소용돌이라 불렀을까.
이충량은 손에 들린 남은 밧줄을 한쪽으로 홱 던졌다.
자식은 죽어도 자신은 살아서 꿈을 완성해야 했다. 지금까지 이충량이 살아온 대로라면 그렇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자탄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이 과연 살아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조차 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환아! 조금만 참아라! 아버지가 구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