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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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34화
34화
뜬금없는 말인데도 독사눈은 즉시 대답했다.
“예, 놈의 거처를 찾고 나서 검운장으로 달려갔는데, 악귀대형께서…….”
“그냥 대형.”
움찔한 독사눈이 말을 이었다. 악귀라는 말은 빼고.
“예. 대형께서 임무 수행을 위해 검운장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요. 해서 돌아오시면 알려주려고 그냥 만복루로 돌아갔는데, 주루 안에서 비명이…….”
“낮에?”
“아뇨, 자시 무렵이었습니다요.”
“왜 너만 멀쩡하지? 놈이 너를 그냥 놔뒀나? 아니면 늦게 들어갔어?”
독사눈은 순순히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돈을 조금 땄다는 말까지.
그 말을 다 들은 이무환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지가 된 것이지?”
“오다가… 산적들을 만나서 다 털렸습니다요.”
그랬다. 막간산을 지나다 재수없게 산적들을 만났다. 무려 십여 명이 넘는 산적들을.
그들 모두를 상대할 실력이 없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방에 돈을 뿌리며 도망쳤다.
죽어라 도망쳐서 겨우 살아난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기껏 닷 냥. 그는 화가 나서 마을이 보이자마자 술을 사 마셨다.
문제는 너무 많이 마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취해서 그 마을의 건달들에게 남은 돈마저 또 털려 버리고 말았으니까.
사실 지나가는 사람을 털어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포기했다. 다음 날 소문이 돌았는데, 자신을 털었던 산적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목이 부러지고 팔다리가 잘려서.
그제야 알았다. 악마 같은 놈이 자신을 뒤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행적을 남기면 그놈에게 잡힐 것 같았다.
그때부터 독사눈은 거적을 훔쳐서 뒤집어쓰고는 거지 행세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악귀를 만난 것이다.
“그놈의 거처가 어디였지?”
“도화방이라는 도박장이었습니다.”
“그놈 말고 다른 놈도 있었나?”
“몇 놈 있는 것 같던데, 워낙 경비가 삼엄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알고 있나?”
“그게… 없습니다. 저 혼자 돌아다니던 중에 알아낸 데다 워낙 시간이 없어서…….”
“도박할 시간은 있어도, 회주에게 말해줄 시간은 없었단 말이지?”
“죄, 죄송…….”
“아냐, 잘됐어.”
“예?”
생각도 못한 말에 독사눈이 고개를 번쩍 들고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두들겨 맞을 각오까지 했는데, 잘 됐다고?
이무환이 수정처럼 굳은 눈으로 허공을 보며 그 이유를 말했다.
“그럼 칠도회 모두가 죽어도 네가 그들이 있는 곳을 알았다는 것은 모를 거 아냐?”
아마 그럴 것이다. 독사눈은 그제야 이무환의 말뜻을 알아듣고 소름이 돋았다.
“정말… 그가 칠도회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이백 명도 넘는데…….”
“나라면 그렇게 했을 거야.”
이번에는 독사눈뿐만이 아니라 뒤에 서서 묵묵히 듣고 있던 사람들도 소름이 돋았다.
그때 이무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어. 그러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야.”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투.
독사눈이 물었다.
“그놈이 누군지 아십니까?”
“정확히는 몰라.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지금은 그것도 말해줄 수 없어.”
“대형!”
독사눈이 간절한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이무환은 무심한 눈을 내려 독사눈을 향해 말했다.
“만일 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놈이 알게 되면,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칠도회를 없애려고 할 거다. 그래도 알고 싶어?”
“그, 그건…….”
“궁금해도 참아. 아, 그런데 그가 왜 만복루를 쳤을까? 왜 칼자국과 사팔뜨기와 만복루의 졸개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였을까? 자신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독사눈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혹시 겁을 먹고 나 몰라라 도망칠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다.
놈을 찾으려 한 사람이 이무환이니 그것만 말해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제가 얼핏 들은 대로라면, 대형이 제게 뺏… 가져간 동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무환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동패? 네가 나에게 선물한 그 동패 말이야?”
‘선물’이라는 말에 움찔한 독사가 이무환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예,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그놈이 사팔뜨기에게 동패에 대해 묻는 것 같았습니다요.”
이무환은 품속에서 동패를 꺼냈다.
‘단지 이 동패 하나 때문에 수십 명이 죽었단 말이지?’
그 점이 더 이상했다. 얼마나 중요한 동패이기에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이면서까지 찾으려 한단 말인가?
동패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말.
이무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독사눈, 너는 지금 즉시 남궁세가로 가라.”
“예?”
독사눈을 비롯한 모두가 의혹의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이무환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는 백양나무를 향해 다가가더니 손을 휘둘렀다.
우지끈!
반 자 굵기의 나무가 매끈하게 잘려서 건너편으로 쓰러졌다.
이무환은 매끈하게 잘린 곳에 동패를 가져다 댔다.
치익!
마치 불에 달군 인두를 가져다 댄 듯했다.
연기가 솟더니 동패에 새겨진 ‘풍(風)’ 자가 나무에 정교하게 찍혔다.
이무환은 다시 손을 휘둘러 나무를 다섯 치가량 잘라내고는, 도장을 찍은 듯 선명하게 풍 자가 찍한 나무를 독사눈에게 내밀었다.
“남궁세가에 가거든 풍운대주 나철위를 찾아가 이걸 줘라.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말해줘.”
독사눈이 손에 들린 나무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대협이… 그놈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 배는 더 강해. 그리고 그의 뒤에는 더 강한 자들이 있지. 아마 지금쯤 그의 수하가 칠도회에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고 싶거든, 즉시 그걸 나철위에게 갖다 줘라.”
마음 같아서는 항주로 가서 직접 관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일이 더 커질지 몰랐다. 자칫하면 엉뚱한 불똥이 검운장에 튈지도 모르고.
‘실수를 해서 내 무공이 드러나면 더 시끄러워져. 아마 놈뿐만이 아니라 나철위도…….’
이후의 일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나철위와 정천무림맹이 자신을 닦달하겠지.
그거야말로 최악의 경우였다.
‘어차피 독사눈의 정보를 접하면 나철위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야. 정천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그자쯤은 처리하겠지.’
그때 독사눈이 조금은 불안한 눈으로 슬그머니 물었다.
“대형은 안 가실 겁니까요?”
“나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 항주로 돌아가려면 몇 달 정도 걸릴 거야.”
이를 지그시 깨문 독사눈이 일어섰다.
악귀 이무환이 그리 판단했다면 더 따질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형. 저 먼저 가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언제까지든.”
그러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후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만경방의 상선에서 털북숭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타면 떠날 거요!”
2
상선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안경까지는 천 리 길. 중간에 몇 군데 들르다 보면 닷새는 걸릴 것이었다.
이무환 일행은 다섯 개의 선실 중 하나를 차지했다. 대상단의 배여서 그런지 아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네 개의 선실 중 손님이 탄 곳은 두 곳. 하나에서 열까지 남궁산산의 말과 일치했다.
‘계집애가 너무 똑똑해도 피곤한데.’
옥이라면 ‘오빠가 알아서 해요’ 하고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길 텐데.
때로는 그게 편할 때도 있었다.
이무환이 바람을 맞으며 끝도 보이지 않는 소호를 바라보는데 엽상이 다가왔다. 옆에서 끝없이 조잘거리던 꼬맹이가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꼬맹이가 들어간 선실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그때만 기다린 듯했다.
“내가 이 형을 잘못 본 모양이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간 내서 비무를 해봤으면 좋겠소만.”
이무환은 엽상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비슷한 무위로 생각했다가 그게 아닌 듯하자 호승심이 동한 모양이다.
“그거 좋지요.”
자신 역시 원하던 바다.
엽상을 수하로 끌어들이려면 어떤 식으로든 엽상을 굴복시켜야 한다. 단기간에 그러기 위해선 비무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자신이 본 엽상은 진짜 무인이니까.
‘흠,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지?’
엽상이 보따리에서 검을 빼더니 정성스럽게 닦는다. 그 모습을 본 영호승이 나직이 물었다.
“좋은 검이군요. 그런데 저… 엽 형, 혹시 조장님하고 비무 약속 같은 거 하지 않았습니까?”
“했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영호승이 나직이 말했다.
“절대로…….”
그때였다. 밖에서 이무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멋쟁이, 오늘 밤에 제대로 버티려면 충분히 운기를 해둬야 할 거야.”
그 말에 단우경과 막위와 혁수린이 영호승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영호승이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엽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해보시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화내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요.”
“하하하, 그거야 당연하지요.”
엽상이 걱정 말라는 듯 웃는다.
영호승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내일도 그렇게 웃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소.’
그날 석양이 질 무렵.
무위에 도착하자 털북숭이가 선실에 대고 외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요! 배에서 내리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오도록 하시오!”
무위포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림 가장자리.
언제부턴가 달빛 깨지는 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차디찬 한광이 번뜩일 때마다, 갈라지고 깨진 달빛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달빛 아래 서 있는 사람은 모두 일곱. 두 사람이 비무를 벌이고, 다섯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무가 벌어진 지 십여 초.
쩌저정!
엽상이 이를 악물고 주르륵 물러섰다.
상대는 맨손이었다. 옆구리에 꽂힌 칼은 장식이라도 되는 듯 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엽상은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얕본다며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상대의 손은 강철 갈퀴처럼 단단했고, 자신의 애검 설홍은 상대의 손톱 하나도 자르지 못했다.
자신은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이 저릿저릿한데, 상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숨결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엽상은 마지막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힘을 아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그나마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천천히 설홍을 중단으로 끌어올린 엽상은 자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순간, 설홍의 검신에서 뿌연 백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검신을 타고 쭉 뻗었다.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영호승 등이 벌떡 몸을 세웠다.
“아! 검기성형!”
“소문보다 더 강하잖아?”
검강의 전 단계. 절정의 발끝이라도 보지 못한 자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경지. 더구나 그게 끝이 아닌 듯 보였다.
한편, 이무환은 엽상이 작정한 듯 내력을 끌어올리자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찰나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청광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차앗!”
엽상이 기합을 내지르고는 이무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둠을 가르며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수십 송이의 검화!
이무환은 활짝 펴진 두 손으로 태극을 그리며 천천히 휘돌렸다. 사자탄의 일곱 가지 무공 중 하나, 수룡회였다.
쩡! 쩡! 쩌저저적!
수십 송이의 검화가 태극을 그리며 휘도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었다.
찰나!
한 발을 내딛은 이무환이 휘돌리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쾅!
태극 안으로 급격히 뭉친 엽상의 검화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크읍!”
동시에 엽상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서너 걸음 물러섰다.
이무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러서는 엽상을 향해 쇄도했다.
비무가 벌어지면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 이무환이다. 그걸 잘 아는 영호승 등은 이무환의 쇄도에 비명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도 엽상은 이무환의 공격을 두어 번 더 막아냈다.
하얀 검화가 활짝 꽃을 피우고, 마침내 검기가 춤을 췄다.
하지만 그마저도 삼 초가 한계였다.
퍽!
이무환의 장력이 엽상의 옆구리에 꽂혔다 싶은 순간, 이를 악문 엽상의 이를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커윽!”
이무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두 손을 연속 휘둘렀다.
엽상의 몸에 소나기 같은 장력이 쏟아졌다.
퍼버버벅!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엽상의 몸뚱이가 이 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털썩!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정신을 잃은 듯했다.
이무환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막위를 바라보았다.
“도끼, 엽상을 짊어져. 객잔으로 가자고.”
엽상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날 자시 무렵이었다.
엽상은 허탈감에 천장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젊은 층의 강자로 추켜세웠다. 나름대로도 젊은 층에서 이십 위 안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생각해 보니 웃기지도 않았다. 이십 위면 어떻고, 백 위면 어떻단 말인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사람의 이십 초도 막아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자신의 검을 다 펼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일 뿐. 실력이 없어서 검을 펼치지도 못한 것이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어느 누가 기다려 준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펼쳤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만큼 자신은 약했고, 이무환은 강했다. 굳이 칼을 뽑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큭큭큭, 그런 알량한 실력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듯 살았더냐, 엽상!’
죽었다. 엽상은 이제 죽은 것이다.
자괴감에 낯부끄러워 아침 해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자가 못나서 사부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문득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애검 설홍이 보였다.
구룡성 십대보검 중에 하나라는 설홍이다.
아무 말도 없는 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인이 약해서 네 이름을 깎아 먹었구나.’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