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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룡기 32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광룡기 32화

 

32화

 

 

 

 

 

 

 

 

그날 점심 무렵, 남궁현이 이무환을 불렀다.

 

말로는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검운장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안에서 들려오는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무환이 누군가. 악귀가 아닌가!

 

여차하면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들은 제발 악귀가 말조심해주기만을 부처님께 빌었다. 십삼조원들이야 잘되었다며 낮잠을 잤지만.

 

보나마나 밤에 못잘 것이 뻔했으니까.

 

‘오늘 밤에는 더 지독하게 굴릴 거야.’

 

네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각, 이무환은 남궁산산의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서 영 불편했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미치겠군. 후우웁, 하나, 둘, 셋…….’

 

이무환이 숨을 들이켜고 속으로 천을 세는데, 남궁현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중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사부는 어떤 분이신가?”

 

천지풍운.

 

이무환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그다음에는 ‘자연이 내 스승이오.’라고 해야 하는데, 보나마나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소란을 최대한 피해야 할 입장에서 그것은 옳은 대답이 아니었다. 이무환은 서른셋을 세고 숨을 내쉬었다.

 

“광노(狂老)라는 분입니다.”

 

“광노? 처음 듣는군.”

 

‘처음 듣기는. 미친 늙은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속으로야 그런 마음이었지만, 대답은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담담히 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지요.”

 

“그래? 호오, 역시 세상은 넓군. 자네 같은 고수를 키운 분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니 말이야.”

 

자신을 키운 건 무식한 아버지였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일. 이무환은 시간이 갈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사실 그는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나철위가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자네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가서 가주의 비위 좀 맞춰주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왔다. 오로지 동생을 위해서.

 

하지만 따분한 것은 따분한 것이었다.

 

“식사는 언제 나옵니까?”

 

밥이라도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남궁산산이야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오빠, 배고파요?”

 

“너 때문에 아침도 못 먹었잖아.”

 

“어머? 그래요? 미안해요.”

 

남궁산산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유모! 식사 좀 빨리 가져오라고 해요!”

 

“예, 아가씨!”

 

이무환과 남궁산산의 목소리만이 오갈 뿐 방안이 조용했다. 그렇게 질문을 퍼붓던 남궁현도 입을 다문 채 바라만 봤고.

 

‘끄응, 제기랄. 분위기가 왜 이래?’

 

이무환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자신과 꼬맹이를 빼고 다섯이 더 있었다. 남궁종원, 남궁현, 모용 부인, 남궁석, 남궁민. 

 

남궁진은 처리할 일이 남아 바쁘다며 참석하지 않았고.

 

그들이 일제히 남궁산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심지어 모용 부인은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뭐라고 했나?’

 

하지만 그들이 말을 잊은 것은 이무환 때문이 아니었다.

 

남궁산산.

 

지금 같은 그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항상 차갑기만 하고, 화나 내고, 너무 냉철하고 똑똑해서 어렸을 때부터 키우기가 여간 어려운 아이가 아니었다.

 

남궁종원과 남궁현과 모용 부인이 아니면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 애교라고 해봐야 기껏 가슴을 파고드는 정도가 다였고.

 

그런데… 그토록 까탈을 부리던 손녀가, 딸이, 여동생이 말괄량이 소녀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꽃을 보고 기뻐하는 보통 아이들처럼.

 

모용 부인은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딸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또 뭐야?!

 

이무환은 좌불안석, 엉덩이 밑에 가시라도 꽂힌 것 같았다.

 

“저… 제가 뭘 잘못한 것 같은데, 이만 나가도 될까요?”

 

다섯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무슨 소리!”

 

“나가지 말게나!”

 

“아니에요, 이 공자!”

 

“아무 잘못 없으니 그냥 앉아있게!”

 

남궁세가, 정말 머리 아프게 하는 집안이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이무환은 동생만 아니라면 정말 천장을 뚫고서라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럭저럭 식사가 끝나고, 차도 마시고, 이제나저제나 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남궁종원이 말했다.

 

“그래, 모레 떠난다며?”

 

“예, 내일 잔치가 끝나면 모레 아침에 떠날 생각입니다.”

 

“우리 산산이, 잘 좀 돌봐주게.”

 

“예?”

 

갑자기 벼락이 천장을 박살내고 백회혈에 내리꽂힌 기분이 들었다.

 

홱 고개를 돌리자 남궁산산이 말했다.

 

“제가 다 말했어요.”

 

“뭘?”

 

“제가 아프다는 거, 오빠가 저를 치료해 주실 거라는 거.”

 

‘치료? 내가 의원이냐?’

 

묻기도 전에 남궁산산이 말을 이었다.

 

“아침에 장강을 타고 여행을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무창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는 게 편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저도 따라가려고요. 이미 허락은 받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무환이 절대! 안 된다며 거부하려는데, 남궁종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이 아이가 워낙 강경해서…….”

 

그리고 남궁현이 애잔한 눈으로 남궁산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 년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더군. 이 아이도 나이답지 않게 제법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자네 일에 방해되지는 않을 거야.”

 

어느 부모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딸을 여행 보내려 할까. 그것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장거리 여행을.

 

그런데도 보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똑똑해서 탈인 아이가 말했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약도 없다고,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이무환뿐이라고.

 

그러면서 피를 토할 듯이 우는데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성격이 조금 괴팍한 것 같지만, 그것은 딸아이도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천생연분처럼 느껴졌다.

 

무공이야 자신이 이미 후원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상태. 안전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잡을 수만 있다면 딸을 억지로라도 맡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부인이 뭐라고 할까 봐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부탁하네.”

 

이무환이 손을 들었다. 그가 막 손을 젓기 직전. 남궁산산이 못을 박듯이 전음을 보냈다.

 

<안 데려가면 안 돼요, 오빠. 그럼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저도 몰라요. 데려가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저를 죽여야 할 거예요.>

 

이 꼬맹이가 어디서 공갈협박을!

 

이무환이 무저의 바다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용없었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듯 남궁산산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저도 이런 제가 무섭단 말이에요. 일 년이에요. 일 년만 저를 데리고 다녀주세요, 예?! 그 정도면 제가 스스로 저를 다스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모습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이무환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때다. 남궁현이 넌지시 말했다.

 

“혹시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게.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다 들어주겠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잖아? 그런 말 누가 못해?’

 

그때 문득 사마하연이 떠올랐다.

 

남궁현은 이미 결정이 내린 듯했다. 자신이 거절하면 하연이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직 검운장 풍운대의 조장이 아닌가?

 

‘결국, 저 꼬맹이를 데리고 일 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지? 정말 미치겠……. 가만? 그냥 구룡성 구석에다 콱 처박아놔?’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구룡성의 일을 해결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테니까.

 

그러고는 일 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뭐.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이무환이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죠. 하연이… 아니, 하연 아가씨를 잘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노장주님께서 특별히 저에게 아가씨의 안전을 부탁하셨거든요.”

 

“사마하연을?”

 

“만일 하연 아가씨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제가 노장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셈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것도 그렇군. 좋네, 내 책임지고 돌봐주지.”

 

차라리 사마하연이 자신의 외사촌 동생이란 걸 밝힐까도 생각해 봤다. 나중에 어차피 밝혀질 일이니까.

 

하지만 자칫하면 거꾸로 약점만 잡힐 뿐, 당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가주인 남궁현마저 약속했으니, 자신이 없어도 남궁진이 다시 미친개가 되지는 못할 터. 자신이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다였다.

 

‘하연아, 내 예쁜 동생!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그것도 여동생에게 뭔가를 해줬다는 생각이 들자 이무환도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정확한 계산 뿐.

 

“대신 네 밥값은 네가 내야 돼.”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겉보기보다 짠돌이군.’

 

‘생활력이 강해서 허튼 돈은 안 쓰겠어.’

 

‘끊고 맺음이 확실한 아이 같군.’

 

‘남자가 쪼잔하게.’

 

남궁산산이야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이무환과 함께 여행을 갈 수만 있다면 기둥뿌리라도 뽑아갈 수 있었다.

 

“걱정 말아요. 한보따리 싸갈 테니까요.”

 

 

 

그날 밤.

 

이무환은 잔뜩 인상을 쓴 채 고민하다 방을 나왔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승낙은 했지만 앞날이 캄캄했다.

 

“제길, 안 된다고 끝까지 우길 걸 그랬나?”

 

털레털레 걸어서 후원 쪽으로 돌아가자 수련을 하고 있는 십삼조원들이 보였다.

 

이무환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마음도 답답한데 저들을 상대로 기분이나 풀어볼까?

 

하지만 맥이 빠져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람?’

 

이무환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영호승 등을 향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자유 수련을 해. 나 없다고 농땡이 피우지 말고.”

 

영호승 등은 좋아서 입이 찢어지려는 것을 꾹 참고 짧게 대답했다.

 

“예, 조장!”

 

“걱정 마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무환은 그들의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남궁세가의 지붕 위로 쏟아지는 밝은 달빛이 왠지 누리끼리하게 보였다.

 

‘에혀, 사나이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이무환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무환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거처가 아니라 옆쪽의 별원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걷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끄응. 이무환아, 꼬맹이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바로 그때였다.

 

“이 공자님?”

 

꾀꼬리 우는 소리보다 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헛! 우리 예쁜 하연이 목소리다!’

 

이무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쳐서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원의 건물 회랑 구석진 곳에서 사마하연이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주무시지 않고 어인 일이시오, 소저?”

 

“잠이 오지 않아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요.”

 

“밤바람이 찬데…….”

 

“이 시간에 수련하는 분도 있는데요, 뭐.”

 

“그래도 밤이 늦었는데 들어가시지 않고.”

 

말하는 사이 사마하연이 이 장 앞까지 다가왔다.

 

연분홍 복사꽃 같은 얼굴이 밝은 달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보였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확실히 화 낭자보다 더 예쁜 것 같아. 우흐흐흐.’

 

그때 사마하연이 물었다.

 

“그런데 이 공자님께선 이곳까지 웬일이세요?”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

 

“수하들의 수련 좀 봐주고 잠시 생각할 일이 있어 걷다 보니 이곳까지 왔소이다. 제가 생각이 좀 많은 사람이라서요. 하, 하, 하!”

 

이무환은 짐짓 너털웃음을 낮게 흘리며 사마하연을 향해 씩 웃었다.

 

사마하연은 그런 이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무환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마하연의 미소다.

 

문제는 큰 눈망울에서 감돌던 촉촉한 눈빛. 활짝 핀 복사꽃마냥 발그레해진 얼굴이었다.

 

단순한 눈빛, 얼굴색이 아니었다. 입술을 닦아주던 그날, 옥이에게서 보았던 표정과 비슷했다.

 

번개가 이무환의 뇌리에 꽂혔다.

 

‘서, 설마? 아이고, 하연아! 나를 좋아하는 것은 괜찮지만, 사모하면 큰일 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하연이 묻는다. 눈을 잘게 떨면서.

 

“저… 이 공자님은 좋아하는 여인이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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