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30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30화
30화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털어놔!
그런 눈빛이었지만, 하지만 이무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물었다.
“구룡성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성주의 지위가 무참하게 뭉개졌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는 않은가 보군요. 그분께서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시다니.”
‘내가 잘못 생각했나?’
엽상은 혼란을 느끼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거기에는 말 못할 이유가 있소. 한데 성주님의 손자 되신다면서 왜 검운장에 있는 것이오?”
의심을 떨치지 못한 엽상이 악착같이 파고들었다.
이무환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검운장은 제 어머니의 집입니다.”
더 따지고 들 수 없을 만큼 충분한 이유였다.
엽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무환이 말을 이었다.
“조만간에 구룡성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괜찮다면 같이 갔으면 싶습니다만.”
“나와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번 임무만 마치고 갈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 수 있게 바꾸려는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야 나중에 찾아도 될 테니까요. 혹시 압니까? 제가 도움이 될지.”
이무환이 마지막 말을 하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엽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잖아도 최근 들어서 내분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뒤숭숭하던 차였다. 게다가 확실하지는 않아도, 눈앞의 이무환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것과 차라리 직접 뛰어들어서 움직이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제쯤 갈 거요?”
“이틀이면 이곳의 일이 다 끝날 겁니다.”
“좋소. 그럼 사흘 후 아침에 이곳에서 만납시다.”
“그렇게 하지요.“
대답하는 이무환의 입가로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흠, 덕분에 한 가지 걱정은 덜었군. 엽상과 함께 가면 그자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겠어.’
그야말로 가장 걱정했던 일 중 하나가 해결된 셈이었다. 또한 잘하면 괜찮은 사람도 하나 얻을 것 같았다.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제3장. 첩첩난관(疊疊難關)
1
마차가 합비에 들어선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검운장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하늘색 청삼을 입은 오십여 명의 무사가 앞장서서 검운장의 사람들을 인도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이무환은 감색 장포를 벗어 보따리에 집어넣고, 뒤로 돌아가 풍운대의 복장으로 그들과 합류했다.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누구도 지난 한나절 동안 사라진 일에 대해서 따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 이리 일찍 돌아왔냐는 눈빛이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일각.
천오백 리를 달려온 마차가 마침내 오 장 넓이의 거대한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남궁세가(南宮世家).]
그곳이 바로 수백 년간 안휘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남궁세가였다.
끼이이이익.
마차가 멈춤과 동시, 거대한 정문이 육중한 굉음과 함께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 중 가운데 서 있던 탐스런 백염의 중년인이 밝은 표정으로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이다!”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총관인 남궁원이었다.
사마성안과 사마성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가주가 나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서열 십위에도 들지 못하는 남궁원이 마중 나올 줄이야.
겉으로는 밝은 표정으로 마주 인사를 했지만, 속까지 좋을 수는 없는 일. 입을 꾹 다물고 포권을 취한 두 사람은 남궁세가의 인도를 받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뒤에 처져 있던 이무환도 십삼조원들과 함께 털레털레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열심히 익혔겠지?”
“예, 조장.”
약간 절며 걷던 영호승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밤에 시험해 볼 텐데, 살아남을 수 있겠어?”
“어제 이미 두어 번씩 죽었습니다.”
한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쥐고 걷던 단우경이 이를 갈았다.
“그래?”
“아마… 오늘 밤에는 조장님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똑같은 초식을 펼치신다면야…….”
막위와 혁수린이 광기 어린 눈빛을 번들거리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무환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아, 정말로 열심히 익힌 것 같군. 그럼 오늘 밤에는 다른 걸 배워볼까?”
동시에 네 사람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따졌다.
주위에서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이.
“비, 비겁하게……!”
“그래도 시험은 해보셔야죠!”
이무환이 그들을 향해 씩, 웃었다.
“걱정 마. 살아난 사람만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마차에서 내린 사마하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숙부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담담한 눈빛, 마치 제집을 찾아온 것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그래, 내 동생이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이무환은 내심 뿌듯함을 느끼고 남궁세가의 거대한 전각군을 둘러보았다.
근 천 평에 달하는 연무장 건너편에는 거대한 전각이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었다.
그 좌우와 후면으로는 수백 년 전통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전각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굉장하긴 굉장하군. 검운장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느껴져.’
그때였다.
전면의 커다란 전각문이 열리더니 십여 명이 걸어나왔다.
그들을 바라보던 이무환의 눈빛이 반짝였다.
한가운데에 황의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는데, 비룡도를 떠난 후 처음 보는 고수였다.
그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자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현인가?’
그랬다. 그가 바로 남궁세가의 당대 주인인 창궁검신 남궁현이었다.
이무환은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옆에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조금은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한 소녀. 남궁산산이었다.
‘쳇! 저 꼬마가 이런 자리까지 나오다니.’
남궁진에게 얼핏 말은 들었다. 남궁산산이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자리까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무환은 슬그머니 영호승의 뒤로 걸어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장, 왜 그러십니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살펴보려고.”
그 바람에 이무환은 미처 보지를 못했다. 묵묵히 서 있던 남궁산산의 눈빛이 샛별처럼 반짝 빛난 것을.
2
“놈들이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섰다 합니다, 부방주.”
“빌어먹을! 오령주는 어떻게 되었느냐?”
“추적이 감지되어서 남경으로 바로 가지 말라 했습니다.”
“멍청한 놈.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그 정도 일도 처리 못하고 부상을 입어?”
벌떡 일어선 중년인의 눈이 새파랗게 번뜩였다.
장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엎드려 있던 백의문사가 몸을 더욱 깊숙이 숙였다.
“금천신문에서 연락 온 것은 없느냐?”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피해도 피해지만, 저희를 못 믿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흥! 누구 덕분에 남궁세가와 자웅을 겨룰 정도가 되었는지 잊은 모양이군.”
“한 번쯤 주의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게 저희 만유당의 생각입니다.”
“그것도 필요하겠지. 하나 아직은 사부님께서 놈들을 필요로 하고 계시다. 지나친 압박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그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 일은 너에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부방주.”
“그리고 소주에 연락해서 호천이를 올려 보내라고 해.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 아이에게 맡겨야겠어.”
엎드려 있던 백의문사가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3
별빛이 암흑창공을 흐르기 시작할 무렵.
저녁식사를 마친 이무환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작은 연무장 하나를 빌렸다.
타인의 무공 수련을 엿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 남궁세가는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후원 쪽의 구석진 장소를 이무환에게 제공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차갑게 얼어붙은 달이 중천에 떠올랐을 때였다. 후원에서 기이한 비명과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흑! 어떻게 그런 동작이 거기서…….”
“말도 안……. 허억!”
“그건 가르쳐 주지 않은……. 꺼헉!”
퍽! 쿵! 털썩!
“말도 안 되긴. 내가 안 가르쳐 주긴 왜 안 가르쳐줘? 그대들이 제대로 변화를 깨닫지 못한 것이지. 자, 다시 시작해 볼까? 이제 겨우 오 초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렇게 반 시진이 흘렀다.
사람들은 궁금했지만 다가가지는 않았다.
왠지 소름이 돋았다.
끊임없이 들리는 신음이 남일 같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송충이가 기어가는 기분이 들고, 덩달아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상황이 한 시진이 넘어가자 검운장의 신검대와 금검대원은 물론이고, 풍운대의 살아남은 사람들도 이제 십삼조원들이 불쌍하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하필 악귀 이무환에게 잡혀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넘나들다니.
심지어 남궁세가의 순찰무사들은 그 근처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설령 침입자가 있어도 도망갈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렇게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자시 초가 되자 비명과 신음이 멎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잠을 청했다.
겨우 숨만 붙인 네 사람도 방으로 기어들어 가 운기에 몰두했다. 후원에 남은 사람은 오직 이무환뿐.
홀로 남은 이무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구룡성에서 가지고 나온 일곱 권의 무서 중 하나에 적힌 무공이었다.
초연십이식(超練十二式).
정형화된 초식이 없이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마저 사용해야 하는 무공. 두 권의 금서를 제외하면 가장 강하면서도 익히기 어려운 무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익히기가 힘든 무공. 그래서 지난 백 년 동안 아무도 익히지 않아 천룡비고에서 썩어가던 무공.
자신은 그걸 열네 살 때 익혔다.
‘제법이란 말이야. 나도 아버지에게 배울 때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는데.’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포기할 수만 있었다면 포기했을 만큼 초연십이식은 익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대신 이무환이 사자탄에서 자신만의 무공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바로 초연십이식일 만큼 그 변화는 무궁무진했다.
말이 십이식이지, 응용하면 백팔식도 될 수가 있었다. 초수를 늘리는 것은 온전히 익히는 자의 몫이었다.
아마 시간이 많았다면 다른 것을 가르쳤을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영호승은 일 년 안에 진정한 고수가 되어야 하니까.
고통과 시련은 그 과정일 뿐. 아마 수련 중 죽지만 않는다면 영호승은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세 사람도.
‘견뎌. 죽음과 싸워 이기면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아침 햇살이 예리한 칼날처럼 창문을 가르고 쏟아진다.
이무환은 남궁세가에서의 첫날을 잠만 퍼자며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경 좀 해봐야지. 옥이와 아들딸 구별 말고 열을 낳다 보면 나중에 나도 이렇게 큰 집을 지을지 모르잖아?’
장포를 걸친 그는 훗날 옥이와 살 집을 머릿속에서 멋지게 지으며 밖으로 나섰다.
덜컹.
하지만 문을 열고 방을 나서던 이무환은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나서는데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꼭 도둑놈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못 말릴 놈이라는 듯 금방 혀라도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왜 그런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남궁산산.
꼬맹이가 방 앞에 서 있었다.
영악한 것이 여시처럼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왜 왔어?”
이무환이 묻자 남궁산산이 대뜸 절을 했다.
“소녀가 이 대협을 뵈어요.”
검운장 사람들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만일 남궁산산이 ‘죽기 싫으면 절대 관여하지 마!’라고 강력하게 말해놓지 않았다면 벌써 달려들어서 남궁산산을 말렸을 것이었다.
그러든 말든, 이무환은 악귀답게 연약한(?) 소녀를 냉랭하게 몰아붙였다.
“왜 왔냐니까?”
남궁산산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빠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나요? 분명 들었을 텐데요?”
당연히 들었다.
‘자신을 울릴 정도로 강한 사람에게 시집간다고 했다며? 쬐끄만 것이 말이야.’
가만, 그런데 이 영악한 것이 어떻게 알았지? 남궁진이 일러바쳤나?
“오빠는 아무 말 안 했어요. 오빠라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아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그런데 대협의 눈빛을 보니, 역시 말을 한 게 확실하군요.”
눈치도 귀신이 따로 없었다.
‘완전 백여시군. 그런데,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이무환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들이 장난하다 가끔씩 하는, 그런 말?”
“저는 장난이 아니에요.”
“내 눈에는 아직 네가 꼬맹이로밖에 안 보이는데?”
“몇 년 지나면 달라질 거예요.”
달라져? 뭐가?
이무환이 멀뚱히 쳐다보는데, 남궁산산이 홍조가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애 낳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