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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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7화
27화
나철위의 눈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말해보게.”
“그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간단합니다. 내일 밤에 저 먼저 합비에 갈 겁니다. 볼일이 좀 있거든요. 그러니 사람들이 찾으면 대주님이 대충 변명 좀 해주십시오.”
그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합비를 가든, 소림사를 가든.
정 따지면 도망갔는가 보다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아마 악귀가 떠났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꽤 될 걸?
“알겠네. 어디 말해보게.”
“저와 싸운 자, 가슴과 어깨에 제법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적어도 몇 달은 고생해야 나을 겁니다. 아마 근거지로 돌아가기 전에 응급처치를 했을 거 같은데 말이죠.”
나철위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무환이 뭘 말하려는지 충분히 알아듣고 남았다.
“위소!”
밖에서 즉시 대답이 들렸다.
“예, 대주!”
“비찰들을 동원해서 싸움이 벌어진 곳부터 남경까지 이르는 길을 샅샅이 훑어라. 중상을 입은 자를 치료한 의원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
“복명!”
만일 그러한 사실이 발견된다면 훌륭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몰래 추적을 하면 근거지까지 확인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철위는 이무환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은 채.
“고맙네, 이 조장.”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군요. 그런데 대 정천무림맹이 그 무공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철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네. 강호의 판도가 달린 문제지. 예전처럼 소수의 세력이라면 모를까, 그 무공을 익힌 자들이 대세력을 갖췄다면 언제 어느 때 피를 부를지 모르거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굳은 표정으로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십여 년 전, 그 무공을 사용해 무림 명숙들을 죽인 자들이 누군지 아나?”
이무환이 고개를 저었다.
이를 악문 나철위가 쓰디쓴 약초를 씹다 만 것처럼 한 단어를 뱉어냈다.
“삼악(三惡). 바로 삼악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네. 이십이 년 전, 이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혈지겁란(血池劫亂)을 일으켰던 자들 말이야. 우리는 그들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이 한목숨을 마쳐서라도! 그게 의협을 아는 사람들이 갈 길이 아니겠는가?”
한순간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활활 피어났다. 누구도 끌 수 없는, 그의 인생을 태우는 의지의 불꽃이었다.
그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조장!”
나철위의 방을 나온 이무환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익힌 무공 때문이기도 했고, 대장부가 되어서 한시 빨리 옥이 입술이나 닦으러 갈 궁리나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어서이기도 했다.
남들은 별 이득도 없는 일에 십수 년의 인생을 바치기도 하거늘, 자신은 기껏 옥이 생각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제길. 제기랄!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 양반아?’
나철위의 비장한 목소리가 귓전에 왱왱거린다.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이 한 말이지만, 거기에는 구구절절 진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었다. 흑이고, 백이고, 지랄이고를 떠나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일은 자신의 일과도 연관되어 있지를 않은가 말이다.
이무환은 허공에 떠 있는 황금빛 달을 바라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젠장, 나도 모르겠다! 일단 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생각해 보자.’
그중 첫 번째가 오늘 밤 십삼조원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단순히 비무나 하면서 상대의 무공을 봐주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지닌 것을 가르쳐 줘야 한다.
이무환은 그 일을 생각하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열 걸음을 옮기는 사이 입가에 웃음마저 떠올랐다.
‘남의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좀 힘들어도 참으라고. 강해지는 게 어디 밥 먹듯이 쉬운 일이겠어?’
잠시 후, 객잔의 후원에서 봄도 아닌데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려 두 시진 동안. 평소보다 한 시진이나 길게.
다음 날.
태양이 떠오르자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마차를 앞세우고 달린 지 두 시진, 눈앞이 확 터지며 바다처럼 드넓은 소호(巢湖)가 보였다.
이무환은 소호가 보이자 영호승을 불렀다.
“오늘 밤에 내가 먼저 합비로 떠날 거야. 그러니까 멋쟁이가 당분간 십삼조 대원들을 이끌어.”
부은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린 영호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함께 가시지 않을 겁니까?”
“볼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려고.”
합비에 가본 적도 없다는 사람이 무슨 볼일?
그때 이무환이 말을 이었다.
“개 한 마리 잡으려고 그래.”
“예?”
악귀 조장이 개고기를 좋아하나? 영호승을 비롯한 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데 이무환이 말을 이었다.
“우선은 그렇게만 알아둬. 남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대주님께 허락은 받았습니까?”
“받았으니까 걱정 마.”
순간 영호승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눈에서도 안도의 빛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젯밤에 알려준 거, 좀 힘들겠지만 눈을 가리고 해봐. 내일 밤에 시험해 볼 테니까. 제대로 익히지 못한 사람은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내가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까.”
혁수린이 터진 입술을 손으로 가리고 눈을 크게 떴다.
“누, 눈을 가리고 말입니까? 그 위험한 동작을?”
“어차피 죽을 각오하고 시작한 건데 뭐?”
“…….”
콧구멍을 천으로 막은 단우경과 머리를 얼룩진 천으로 두른 막위는 입을 꾹 다물고 땅만 바라보았다.
제2장. 빙심소혜와 합비의 미친개
1
바다처럼 드넓은 소호(巢湖)를 끼고 북서쪽으로 두 시진을 달리자 커다란 도읍이 나타났다.
그곳이 바로 한나라 이전에 노주(蘆州)라 불렸던 곳, 합비였다.
이무환은 합비로 들어가기 전에, 가슴의 풍운이라는 글자 부분을 접어서 감추었다. 그러고는 합비에 들어가자마자 막 문을 닫으려는 포목전에서 감청색 옷을 하나 사 입고, 머리를 쓸어 올려서 무사건까지 둘렀다.
그렇게만 했는데도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무환은 오랜만에 검운장의 옷을 벗어버리자 새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엽상부터 만나봐야겠군.”
일단 약속 장소인 소호대루를 찾아야 했다.
포목전을 나서자 마침 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말 좀 물읍시다.”
담을 바라보고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서른 전후의 건장한 장정이었다.
그런데 왠지 짜증내는 표정이었다.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군.’
하지만 그 정도 인상은 칠도삼사에 비하면 순진한 강아지가 인상 쓰는 것에 불과했다.
이무환은 당연히 물러서지 않고 상냥하게 물었다.
“소호대루가 어딘지 아십니까?”
건장한 장정이 버럭 소리쳤다.
“이 멍청한 놈이! 너 지금 나를 놀리자는 거냐?”
“모릅니까?”
“이 새끼가 정말!”
아쉬운 건 이무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되는 욕을 참을 그도 아니었다.
퍽!
이무환은 앞에 있는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왜 욕이야?”
건장한 장정이 어기적거리지도 못하고 팩 거꾸러지더니, 물(?)이 흥건한 바닥에 철퍼덕, 낯짝이 그대로 처박혔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개새끼! 누가 모른대? 코앞에 있잖아, 씨발 놈아!”
퍽!
이무환이 다시 그를 걷어찼다.
철퍼덕!
“욕하지 마라니까? 에이, 지린내.”
이마를 잔뜩 찌푸린 이무환은 바로 그 자리를 떴다.
뒤에서 건장한 장정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못들은 척했다.
“가만두지 않겠다, 개자식! 하필 싸는데 건드려?”
‘그러게 누가 아무 데나 싸래? 강아지도 아니고 말이지.’
담을 빙 돌자 정문이 나왔다.
소호대루는 뒤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컸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십여 개의 탁자가 넓은 일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시가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반 정도 손님이 차 있었다.
이무환은 빠르게 일층을 훑어보았다. 엽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층에 있나?’
혹시 몰라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다가가는데,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손님, 처음 오시는 분이시죠?”
“그런데?”
“그럼 적어도 은자 한 냥은 있어야 이층에 올라가실 수가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군요.”
“모르는데, 왜?”
“헤헤헤, 그냥 아시고 올라가시라고요.”
“더 올라가려면 돈이 더 많아야 하나?”
“사층까지 있습죠. 삼층은 세 냥, 사층은 다섯 냥이 있어야 합죠.”
“그냥 올라갔다 오는 것도 돈 줘야 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비켜. 사람 좀 찾아보고 내려올 테니까.”
움찔한 점소이가 옆으로 비켜나자 이무환은 터덕터덕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였다.
“비켜!”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무환은 설마 자신에게 한 말일까 싶어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앙칼진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숫돌에 잘 간 칼날처럼 뾰족한 목소리였다.
“거기! 키 껑충한 놈! 비키라는 소리 안 들려?”
동시에 우당탕탕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대여섯 명이 계단을 오르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그들과의 거리가 지척이 되고, 어정쩡하니 서 있는 사이 그들이 바로 아래 계단까지 올라왔다.
미처 피하지 않을 줄은 몰랐던 듯,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앞으로 쏠리는 몸을 가까스로 세우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자식이. 비키라니까!”
이무환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방금 네가 말했냐?”
여자였다. 그것도 아무리 잘 봐줘야 열네다섯 살. 옥이보다 서너 살은 어린, 소녀!
이무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대는 당연했다.
그런데 소녀의 기준은 이무환과 다른 것 같았다.
“뭐야? 네가 말했냐? 이게 어디서!”
소녀는 자신이 반말을 해야 옳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무환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쯔읍, 나이도 어린 것을 팰 수도 없고. 만에 하나라도 꼬맹이 계집을 때렸다는 걸 옥이가 알면 길길이 화를 낼 텐데…….”
소녀는 그런 이무환의 염려를 단숨에 씹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안 비킨다, 이거지?”
남자라면 나이를 떠나 잘못한 점을 가르쳐 줬을 것이다. 아주 확실하게!
그러나 상대는 나이 어린 소녀였다.
이무환은 꾹 참고 소녀를 타일렀다.
“여기 술 파는 데거든? 어지간하면 부모에게 혼나기 전에 그냥 가라, 꼬맹아.”
그 대가로 주먹이 날아왔다.
휭!
이무환은 슬쩍 계단을 하나 더 오르며 주먹을 피했다.
“어쭈? 한가락 한다, 이거지?”
소녀는 가느다란 눈썹을 역팔자로 치켜 올리고는, 조막만한 양손을 휘둘러 번개처럼 네 번의 주먹질을 했다.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제법 매서운 주먹질이었다.
설맞은 주먹에 난간이 움푹 파일 정도. 상당한 내력이 실렸다는 말이었다.
휭휭휭! 퍽퍽!
문제는, 상대가 다름 아닌 항주의 악귀 이무환이라는 점이었다.
네 번째 주먹이 덥석, 이무환의 손에 잡혔다.
“이 나쁜 놈이! 안 놔?”
동시에 소녀의 아래쪽에서 그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던 자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손을 놔라!”
“어디서 감히!”
“소공녀의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상대의 등과 옆구리에 검이 매달려 있었다. 무사라는 말. 행여나 소녀가 잘못될까 봐 그들은 무력을 쓰지도 못하고 악만 질러댔다.
“놓으면 팔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용서해 주겠다!”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곱게 말할 때 놓아라, 이놈!”
그들은 그 정도 위협하면 이무환이 당연히 손을 놓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하긴 이무환의 성격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무환은 못 들은 척 소녀의 주먹을 감싸 쥐고 말했다.
“머리를 숙이고, ‘잘못했습니다’ 하면 놓아주지.”
“너, 이……. 악!”
벌겋게 변한 얼굴로 욕을 퍼부으려던 소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간 소호대루가 급살이라도 맞은 듯 조용해졌다.
백여 명의 사람들은 마치 머리를 두들겨 맞은 사람들처럼 멍하니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이제 너는 죽었다!’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무환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해.”
“나쁜, 네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참새처럼 단절된 말을 뱉어내는 소녀를 향해 이무환은 친절하게 소녀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먹을 휘두른 자를 그냥 보낸 적이 없으니까. 사실 네가 어린 계집아이가 아니었으면 진즉 팔을 부러뜨렸을 거야.”
무심한 눈빛.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소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뭐 이런 자가 있지?’
그때였다.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귀청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이 이층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