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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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2화
22화
이무환도 지지 않고 양 손을 내밀었다.
백의노인, 혈안마수 여조문의 입가로 차디찬 웃음이 걸렸다.
놈이 손을 마주 내민다. 바위도 문드러질 위력이 담긴 자신의 혈혼마장을 향해서.
‘흐흐, 두 팔을 뭉개주마!’
그때였다.
이무환이 두 손을 빠르게 휘젓자 여조문의 장력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미풍으로 변해 버렸다.
“헛!”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여조문이 멈칫했다.
찰나, 이무환이 빠르게 여조문의 전면으로 달려들며 허공을 세 번에 걸쳐 짓눌렀다.
첩첩이 쌓인 파도가 밀려가듯 이무환의 장력이 여조문의 가슴으로 밀려갔다.
대경한 여조문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구성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밀려드는 장력을 향해서 쌍장을 내쳤다.
간격이 벌어지자 이무환이 다시 세 번 더 허공을 눌러 장력을 밀어냈다.
구중만첩파(九中萬疊波) 중 여섯 번째 파도가 밀려갔다.
쿠르르릉!
파도가 쌓이고 쌓이더니 해일이 일어났다.
아연해진 여조문은 눈을 홉뜨고 이를 악물었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하늘색 청삼을 입은 초로의 중년인이 대뜸 검을 뽑아 옆을 쳐왔다.
“여기도 있다, 이놈!”
해일은 이미 손을 떠난 상태.
콰르르릉!
이무환은 밀려가는 해일은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 직후 우수의 묵린도를 도집째 들어 청의인을 가리켰다.
“크으윽!”
옆에서 여조문의 답답한 신음이 들려오는데도, 이무환의 눈빛은 한 점 동요도 일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도 되는 양.
청의초로인은 그런 이무환을 보고 파르르 눈을 떨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놈이다. 이제 갓 스물 정도로 보이는 놈이 이리도 강하다니!
‘황은쌍교가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그는 최대한으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처음부터 전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의 검에서 검기가 푸른 안개처럼 뿜어진 순간, 두 사람의 도검이 정면으로 얽혀들었다.
떠더더덩!
일순간 십여 번에 걸쳐 교차하던 도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밖으로 뻗어 나왔다.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검강의 초입, 검기성형의 경지에 이른 기운이었다.
눈을 부릅뜬 청의초로인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검을 뻗었다.
찰나! 정면으로 충돌한 검과 도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터져 나갔다.
콰아앙!
동시에 굉음이 일고, 두 사람이 뒤로 튕겨지듯이 물러났다.
거의 비슷한 일 장의 거리. 하지만 겉보기일 뿐이다.
차갑게 굳은 눈으로 전면을 노려보는 이무환은 혈색이 약간 창백해졌을 뿐이지만, 청의초로인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에 입가에는 선혈마저 보일 지경이다.
“정녕… 괴물 같은 놈이로구나!”
이무환이 도를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러게 왜 건드려?”
청의초로인, 문하겸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렸다.
분노와 이성이 교차하며 검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그때, 이를 악문 여조문이 이무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쉽지 않을 걸?!”
마주 소리를 내지른 이무환이 여조문을 향해 좌수를 뻗었다.
허공을 향해 휘젓는 그의 두 손에서 백색의 와류가 흘러나온다.
“조심하시오, 여 형!”
심상치 않음을 느낀 문하겸은 자존심도 팽개치고 여조문과 함께 이무환을 향해 합공을 펼쳤다.
이무환은 사자탄에서 익힌 일곱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수룡회(水龍回)를 좌수로 펼치고, 우수의 도로는 일도만참(一刀萬斬)을 펼쳐서 문하겸을 압박했다.
백색 와류에서 한 마리 수룡이 튀어나가 여조문을 덮쳤다.
문하겸의 검세를 갈가리 찢으며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일도!
콰우우!
쩌저저정!
여조문과 문하겸은 이무환의 곁에 접근도 못한 채 뒤로 튕겨졌다.
“허억!”
“크으읍!”
신음을 흘리며 뒤로 튕겨진 문하겸의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직접 상대해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어찌 이런……!”
“문 호법, 일단 물러나세!”
그때 한쪽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여조문이 입에서 피를 튀기며 소리쳤다.
문하겸은 상황 판단이 뛰어나서 이 일의 책임자로 지명된 사람이었다.
이미 싸움의 향방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았다. 자신과 여조문이 합세하고도 막지 못하는 이상 누구도 눈앞의 괴물을 막을 수 없을 터.
비참하지만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시다!”
한번 결정을 내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렸다.
이무환은 갑자기 도주하는 두 사람을 향해 빽 고함을 질렀다.
“이봐! 아직 끝나지 않았어! 돌아와!”
그러나 소리만 질렀을 뿐, 더욱 빨리 사라지는 그들을 쫓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자 인상을 찡그리며 한 모금의 핏물을 뱉어냈다.
“퉤!”
입술에 묻은 피를 닦은 그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한심하군. 너무 서두른 바람에 두 가지 내력이 꼬여 버렸어. 아버지가 알았다면 하루 종일 잔소리를 했을 텐데…….”
단번에 결정을 내려고 무리하게 두 가지 힘을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그 바람에 성질이 다른 두 기운이 충돌해서 찰나간 혈류가 역류했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혈류가 역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적도 놓치지 않았을 텐데.
결국은 고수와의 실전에 대한 경험부족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도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마음 놓고 도를 쓸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
그러나 묵린도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도였다.
‘젠장, 이판사판 사용해버릴 걸 그랬나?’
그때였다. 금검대와 싸우고 있는 금천신문의 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을 상대로 실전경험이나 쌓아볼까?”
모두 다섯.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었다. 그들 정도 실력이면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당하는 사람들이야 기분이 좀 더럽겠지만.
오래지 않아 안유병은 나철위의 검에 심장이 뚫린 채 고혼이 되었다.
쓰러진 금검대원 중 다섯 명이 죽고 일곱 명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상태. 그나마 부상이 덜한 금검대원 여덟 명이 뒷정리를 했다.
그때 살아남은 신검대 대원과 풍운대원들이 허겁지겁 계곡 안으로 들어왔다.
“헉, 헉, 마차는 어떻게……?”
하지만 그도 잠시, 멈춰 선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풍운대의 악귀 이무환이 적과 싸우고 있었다.
수효는 모두 셋. 적들은 절벽을 등에 지고 있어서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금검대의 대원들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침중한 표정으로 사망자를 한쪽에 눕히고 부상자의 상처를 돌보고 있을 뿐.
심지어 사마성문과 사마성안조차 마부석에 앉아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사공위정은 조용히 서 있는 나철위에게 다가갔다.
풍운대가 비록 신검대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지만 어쨌든 명색이 대주 아닌가. 더구나 조금 전에 본 나철위의 무위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그동안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로선 나철위가 자신의 실력을 숨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공위정이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된 겁니까? 왜 악귀 혼자서 저자들을 상대하는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그냥 자신이 상대할 테니 다른 사람들은 상처나 돌보라고 해서 맡겨두고 있을 뿐이오.”
“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공위정은 이마를 찌푸리며 뒤를 향해 명했다.
“가서 끝을 내라.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출발해야 하니까.”
나철위가 힐끔 사공위정을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마시오.”
“예?”
“저기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은 이미 이무환에게 죽은 적이고, 정신을 잃고 저쪽에 누워있는 금검대원 둘은 얼쩡거리다가 이무환에게 얻어맞은 사람들이오. 아! 이제 정신을 차리는군.”
사공위정과 앞으로 나서려던 신검대원들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금검대원 둘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고 있었는데, 싸우고 있는 이무환을 발견하더니 기겁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신검대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부대주님?”
사공위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사상자를 먼저 살펴보고 떠날 준비를 해라. 곧 어두워질 것 같다.”
그때였다.
퍼버버벅!
이무환이 세 사람의 뒤통수를 거의 동시에 후려쳐서 바닥에 널브러뜨렸다.
“흠,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신검대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신검대원들이 바빠졌다.
“이봐, 빨리 정리하고 떠나자고!”
“거기! 뭐 해? 부상당한 말은 마차에서 떼어내!”
제8장. 검은 구름[墨雲]을 보다
1
사팔뜨기는 자신이 꿈을 꾼다 생각했다.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끄어억!”
목을 조여드는 악마의 손아귀는 쇠로 만들어진 듯 차가웠다.
부러진 정강이뼈가 살점을 뚫고 나왔는데도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공포가 전신을 집어삼키고 혼조차 갉아먹고 있었다.
“말해, 누가 털었지?”
지옥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
사팔뜨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어릴 때 젖을 어떻게 먹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이건 꿈이야, 곧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야.’
“분명 네놈들 중에 하나가 털었을 것이야. 누구지?”
“모, 모… 라…….”
“몰라?”
우두둑!
그나마 성하던 왼팔이 거꾸로 꺾이더니 몸에서 생으로 뜯겨질 것처럼 늘어났다.
꿈치고는 더러운 꿈이었다.
“끄아아아!”
“말하면 된다니까? 누구야? 누가 흑비파의 졸개가 훔친 것을 털은 거지?”
흑비파, 졸개.
자신이 알 리가 없다. 이미 다 죽은 흑비파의 이름이 왜 여기서…….
순간 사팔뜨기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룻밤 만에 목이 잘려 죽은 흑비파의 소매치기들.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악마가 그들을 죽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 악마는 그전에 벌어진 일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뭘 찾는 걸까?
그때 악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작은 동패, 정말 못 봤느냐?”
대체 동패가 뭔데 다짜고짜 스무 명에 달하는 칠도회 건달들을 개 잡듯 잡아 죽이고 나서야 묻는단 말인가.
“거기에 숫자가 하나 쓰여 있지. 말해봐. 무슨 글잔지 알면 살려주지.”
그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번개처럼 뭔가가 뇌리에 스쳤다.
주머니, 그리고…… 돈과 함께 나온 철패에 쓰인 숫자.
“사…….”
광유의 입가에 파란 웃음이 걸렸다.
“맞아, 사(四) 자야. 누가 가지고 있지?”
“독… 사… 누우…….”
“지금 어디에 있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을 때면 둘 중 한 곳에 있곤 했으니까.
사팔뜨기는 그중 하나를 골라 말했다.
“강가…… 마작…….”
‘꿈이어야 하는데…….’
목을 쥔 악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꿈인가?
“독… 사…….”
순간이었다. 광유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마지막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사팔뜨기의 목뼈가 수십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 바람에 그는 다음 말을 영원히 듣지 못했다.
―독사눈이 악귀에게 뺏겼어.
그 말을.
독사눈은 정신없이 달렸다.
자신이 골목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몰랐다.
“개새끼, 씨벌 놈, 악귀보다 더 마귀 같은 놈!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다니…….”
다 죽었다.
만복루에 있던 스무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
처참하게. 목이 떨어지고, 사지가 잘리고, 머리가 부서져서.
“분명 그놈이야, 흑비파를 몰살시킨 놈.”
기분이 꿀꿀해서 잠시 전당강의 강바람을 쐬고 왔다. 그리고 간 김에 강가의 판잣집에서 벌어진 마작판에 잠시 끼어들었다.
그저 잠깐만 놀고 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악귀 이무환이 떠난 마당이니 바쁠 것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돈을 너무 따버렸다는 것이다. 중간에 빠져나올 수도 없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딴 돈을 돌려주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이판사판, 하는 수 없이 그는 판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나중에 사팔뜨기와 칼자국이 뭐라고 하면, 계집까지 끼어서 술 한잔 거나하게 사면 될 것이 아닌가.
결국 달이 천공에 걸린 자시가 넘어서야 판이 끝나고, 독사눈은 이백이십 냥에 달하는 거금을 들고 판잣집을 나섰다.
그런데 입이 귀밑까지 쫙 찢어진 그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서 영업이 끝난 만복루의 뒷문 쪽으로 다가갈 때 그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