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60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60화
60화
잠시 후, 뒤쪽의 벽이 한 쪽으로 밀려나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무채색의 고요한 눈을 지닌 그는 길가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일반 청년들처럼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는 제갈무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 다른 어떤 예도 취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기이한 일이었다. 자식이라곤 딸만 넷이라는 제갈무진에게 아들이라니.
제갈무진은 그를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나서줘야겠다.”
청년, 제갈신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 정도로 심각한 일입니까?”
“뇌정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내 일기다. 비문으로 적혀 있어 누구도 쉽게 해독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에 하나 해독이 되면… 그걸로 우리 와룡은 끝장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제갈신걸의 무채색 눈에서 기광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제가 그걸 찾아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아버님.”
“찾아만 온다면…… 들어주마. 그게 무슨 부탁이든.”
“고맙습니다.”
“잊지 마라, 아들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부디 몸조심하거라.”
“예, 아버님.”
찬바람이 불던 그날, 그렇게 또 다른 바람 한줄기가 와룡부를 나섰다.
6
이무환은 골을 싸매고 책자를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쳐다봐도 한 장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글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글이 하나도 이어지지 않았다.
용사비등한 필체만 아니었다면, 와룡부에서 훔친 것만 아니었다면 짝짝 찢어서 불쏘시개로 썼을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인간.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이무환이 끙끙거리며 책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남궁산산이 들어왔다.
“왜 또 왔어?”
“심심해서요.”
“심심해서?”
문득 이무환의 두 눈이 장난꾸러기처럼 반짝였다.
“내가 심심하지 않게 해줄까?”
“오빠가요? 어떻게요?”
남궁산산이 잔뜩 기대감을 품고 슬그머니 이무환의 옆에 앉았다.
이무환은 슬쩍 엉덩이를 한쪽으로 빼고 탁자를 가리켰다.
“이게 무슨 말인지 풀어봐. 아마 심심하지 않을 거야.”
남궁산산의 눈이 탁자 위를 향했다.
그때 밖에서 엽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대주, 단주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래? 곧 가지.”
이무환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나는 단주를 만나고 올 테니까, 열심히 풀어보라구.”
이무환은 골치 아픈 문제를 남궁산산에게 떠맡기고 나자 속이 다 시원했다.
오늘따라 하늘도 더 맑아 보였다.
“진작 맡길 걸. 크크크, 요놈, 어디 골치 좀 썩어봐라.”
엽상이 고개를 틀며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눈발은 몰라도 돼, 그냥 그런 게 있으니까. 그런데 단주께선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조용하니 먼저 움직여 볼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먼저 움직인다? 조금 이른 것 같은데?”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얼마 전부터 귀환하는 대원들의 숫자가 늘었는데, 그 일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도 그렇군.”
‘흠, 이제 슬슬 속마음을 드러내겠다는 건가? 하긴 딴에는 오래 기다렸겠지.’
호연청은 넓은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무환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호연청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록 완벽한 힘은 아니네만, 어느 정도 힘이 모였으니 뭔가 실속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불렀네.”
“아직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적에 대해 알고도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 봐야 일부분일 뿐입니다. 정작 진짜 수뇌부는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지요.”
“일부를 치면 몸통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법 아니겠나?”
호연청이 밀어붙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무환이 물었다.
“그걸 원하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나도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힘을 빌려줄 자들이 더 기다리기 힘든가 보더군.”
‘글쎄,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더 기다리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만일 움직인다면, 계획은 서 있습니까?”
“다른 곳도 그렇지만, 천룡부와 창룡부와 검룡부에서도 그동안 남들 모르게 키운 고수들이 있네. 그들 오십 명으로 별동대인 구룡수호단을 조직했네. 우리가 놈들에 대한 정체를 밝히고, 그들이 반항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면, 구룡수호단이 놈들을 집중적으로 칠 생각이네.”
‘구룡수호단? 차라리 삼룡수호단이라고 하지?’
그들이 쉽게 말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나쁜 계획도 아니었다. 어쩌면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고.
다만 그만큼 많은 피가 흐를 것이고, 자칫하면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
문제는 이미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호연청은 그 일을 진행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결정되었다면 반대해 봐야 의미가 없는 일. 대놓고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언제부터 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대답에 호연청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 말이네만, 본 단의 일백 대원이 귀환해서 명을 기다리고 있네. 광룡대만 움직여 준다면 오늘 밤부터 진행할 생각이네.”
엽상의 말대로였다.
그 말에 이무환이 마지막 조건을 걸었다.
“좋습니다. 단, 그들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일을 저희들의 움직임에 맞춰달라고 말입니다.”
호연청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전하지.”
광룡대로 돌아온 이무환은 대주들을 소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엽상과 종리난경과 유군명이 곧바로 방으로 찾아왔다.
그때까지도 남궁산산은 제갈무진의 일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이무환은 남궁산산을 힐끗 쳐다보고 만족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흐흐흐크크크, 네가 아무리 영리해도 그건 못 풀 거다.’
혼자 히죽거리는 이무환을 향해 엽상이 물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음? 아니, 좋은 일은 무슨……. 다 왔어? 그럼 회의실로 가자고. 꼬맹이 독서에 방해되니까.”
그래도 남궁산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무환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방문을 닫았을 때다. 남궁산산의 봉목이 커졌다.
“그래, 그거였어.”
그녀는 눈을 들고 이무환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오빠야, 한 삼 일이면 다 해독이 될 거 같거든? 근데 말이야, 내용이 제법 재미있을 거 같아.”
나직이 중얼거리는 남궁산산의 입가로 엉큼한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
‘절대! 그냥은 알려주지 않을 거야. 히히히…….’
이무환은 호연청과의 대화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말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회의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으면 미리 써놔야 할 거야.”
이무환이 그렇게 말을 맺자 종리난경이 입을 열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요.”
유군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작년의 팔월분쟁이 재현될지도 모르겠어.”
엽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허공만 응시했다.
이무환이 그런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난리가 나는 거야 기정사실이고, 분쟁도 일어날 거야.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움직여. 광룡대는 어느 한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세 사람이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이무환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광룡대는 오직 광룡대만을 위해 움직일 거다. 만일 어느 누구든 광룡대에 위협이 된다면 나는 그들도 적으로 생각할 거야.”
“총대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이 시작되면 광룡대에겐 오직 친구와 적만이 있을 뿐이야. 명심해.”
“후우…….”
한숨을 내쉰 엽상이 물었다.
“어디부터 시작하실 생각입니까?”
“마룡과 신룡은 당장 무리야. 해서… 일단 돼지부터 때려서 반응을 볼 생각이야.”
‘돼지라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금룡부주 금화산의 몸무게가 삼백 근에 이른다고 했다.
아마 구룡성뿐만이 아니라, 무창 일대에서 기르는 어떤 돼지보다 더 무거울 것이었다.
이무환의 말인즉 금룡부를 건드려 본다는 말.
‘크크크, 악귀와 돼지의 대결인가?’
제5장. 구룡수호단
1
석양이 지고 어둠이 천지를 검게 물들일 즈음.
금룡부의 정문이 막 닫히려는데 한 사람이 검을 검집째 집어넣어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누구냐?!”
“문을 열어라!”
정문을 지키던 위사는 핏대를 세우고 벌컥 문을 열었다.
“누구냐고 묻지…….”
하지만 두어 마디 내뱉기도 전에 몸이 얼어붙었다.
세 치 눈앞에 패 하나가 허공에 들려 있었다.
감찰부인 수룡단의 수룡패였다.
일개 위사에게 수룡단의 수룡패는 생사패와도 같았다.
“무,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엽상이 수룡패를 거두어들이며 차갑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지 그대에게 보고를 해야한단 말인가? 비켜라!”
그러고는 머뭇거리는 위사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종리난경과 유군명이 수룡단의 대원들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이무환은 뒤에서 영호승과 단우경과 막위와 혁수린을 대동하고 느긋이 들어갔다.
광룡대가 금룡전 앞까지 기세등등하게 들어가자 사방에서 무사들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개중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중년인이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엽상이 조금도 굴하지 않고 차갑게 받아쳤다.
“수룡단이 구룡성의 반도를 잡기 위해 왔소!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지 않길 바라겠소!”
“뭐라? 반도?”
중년인이 고리눈을 떴다.
수룡단의 상당수가 몰려온 것도 마음에 걸리거늘, 반도라니!
그가 망설이자, 엽상이 뒤를 보지도 않고 외쳤다.
“들어가서 본 성의 반도, 금사당주 양화중과 진금당주 도종택을 잡아들여라!”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유군명과 종리난경이 수룡대원들을 이끌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엽상이 한마디 더 소리쳤다.
“막는 자는 본 성의 반도로 취급할 것이다!”
반도!
그 말에 수룡대원들을 막아서려던 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눈치만 봤다.
처음에 소리쳤던 중년인도 이를 악물고 있을 뿐, 함부로 막지 못했다.
덜컹! 덜컹!
금룡부 건물의 문이 여기저기 열렸다.
난데없는 소란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금룡부의 넓은 마당과 건물 앞이 백수십 명의 무사로 가득 찼다.
그러든 말든 수룡대원들은 금사당과 진금당이 있는 좌측 건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은 사람은 엽상과 이무환과 영호승 등뿐.
그때 금룡전 쪽에서 십여 명이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금룡부의 수뇌 인물들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누가 감히 금룡부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전면에 나선 백염의 노인이 노성을 질렀다.
금룡부의 장로 장시경이라는 자로, 금룡부 내에서 서열 오위 이내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엽상이 그를 향해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단주의 명으로 반도를 색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장로님께선 저희들의 행사를 막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반도? 누가 말이냐?!”
눈이 커진 장시경을 향해 엽상이 말했다.
“금사당의 당주 양화중과 진금당주 도종택입니다.”
“양 당주와 도 당주가 반도라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엽상이 차갑게 웃었다.
“이미 모든 증거가 모아져 있습니다. 만일 그가 반도가 아니라면, 본 성을 노리는 잠풍련의 간자가 아니라면 제가 목숨을 걸지요!”
“잠풍련? 무슨 말이냐?”
“정말 잠풍련을 모르십니까?”
장시경의 눈이 역팔자로 치켜떠졌다.
“네놈이 감히 수룡단의 이름을 믿고 나를 놀리려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