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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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58화
58화
“아주 질긴 장갑이라고 보면 된다. 천룡비고에 있던 건데, 어떻게 알았는지 와룡부의 제갈무진이란 놈이 예물로 달라고 했다더구나.”
이무환의 눈이 반짝였다.
‘질긴 장갑이라고?’
단순히 질긴 장갑은 아닐 것이다. 와룡부의 부주가 겨울에 손이 시려 장갑을 원한 것도 아닐 것이고.
‘왜 그 많은 보물을 마다하고 뇌정갑을 원한 거지?’
사실 와룡부주가 왜 그 장갑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무환은 왠지 모르게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아주 질긴 장갑이 하나 필요했다.
‘아깝군.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와룡부주의 손에 들어갔다면 이미 늦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는 걸까?
이무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건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건천이 은근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놈이 원하는 물건을 예물로 줬다는 것은 그만큼 굽히고 들어간다는 말인데, 감히 와룡이 천룡을 놀리려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래서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무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어째 이 집안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가만두지 못한단 말인가. 대책도 없으면서.
‘아버지나 백조부나……. 어휴!’
패도의 제왕 구룡무제라더니, 이제 보니 다 헛소리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대책없이 고집만 센 노인, 딱 그 모습이었다.
이무환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정말 제가 알아서 하면 됩니까?”
“물론이다. 더한 물건을 줘도 좋으니까, 놈이 원하는 물건만 주지 않으면 된다.”
뭐, 그렇다면야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더 좋은 보물을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이무환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럼… 그거 회수하면 저 주시죠.”
“부자가 잘 논다. 도적놈들……. 가져, 이놈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건천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무환은 피식 웃으며 서서히 주위의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그때 이건천이 몇 마디 덧붙였다.
“저놈은 내가 제자처럼 키운 놈이다. 내가 속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지. 쓸 만한 놈이니까, 어려움이 있거든 저놈하고 상의하도록 해라.”
팔월 내전에서 이건천은 두 아들과 함께 치명상을 입었다. 그나마도 장남 이충문은 죽고 둘째 이충광도 단전이 부서지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천룡부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조카인 이충선과 이충현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이름과 달리 그다지 선하지도 않았고, 현명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조카 중 이충신이 조금 생각이 밝지만 그는 너무 힘이 없었다.
외롭고 늙은 제왕에게 무설강은 지팡이와도 같은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이무환은 홱 몸을 돌리고 무설강에게 물었다.
“무 형, 혹시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좀 없수? 우리 꼬맹이가 배고픈 거 같은데.”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무설강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따라오게. 천룡전이 아무리 가난해졌어도 그 정도는 대접할 수 있으니까.”
무심히 답하고 돌아서는 무설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넉 달 만이었다. 사부님의 환한 웃음을 본 것이.
저자는 어떻게 사부님을 저렇게 웃게 했을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무환은 남궁산산과 함께 천룡전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이건천을 위해 만든 음식이 남아 있어 새로 음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린 무설강은 이무환과 남궁산산이 배를 두드리며 일어서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자네를 최대한 도와주라 하더군.”
“역시 통이 크신 분이시군요. 천룡전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무 형께 직접 저를 도와주라고 하시다니.”
무설강은 입술을 닦고 빙그레 웃는 이무환을 보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만.”
“말씀하시죠.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데 어르신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 건가?”
이무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
무설강의 이마에 깊은 골이 세 줄 그어졌다. 더 헷갈렸다.
“도둑이라…….”
“뭐, 옛날이야기라 무 형께선 모르실 겁니다.”
끝내 무설강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이무환이 그런 무설강을 향해 물었다.
“혹시 말입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럴듯한 장갑 하나 없습니까? 낡은 것이면 더 좋은데.”
무설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옛날에 내가 권을 연마할 때 쓰던 것이 하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선물 좀 하려고 그럽니다.”
“선… 물?”
제4장. 나는 여우가 정말 싫다
1
회색 구름이 우중충하게 끼더니 밤이 되자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광룡대는 날씨와 상관없이 열기가 충천했다.
요즘은 영호승 등만 수련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신들과 비슷해 보이던 영호승 등이 어느새 자신들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은 걸 알고 수룡단의 대원들도 수련에 열을 올렸다.
당연히 엽상과 유군명과 종리난경도 대주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밤을 잊고 수련에 매달렸다.
진눈깨비 정도는 그들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쌓일 틈도 없었다.
이무환은 광룡대원들이 수련에 열중인 그 시각, 청의를 벗고 흑의에 가까운 회의로 갈아입고는 거기에 더해 두건 하나를 둘러 묶었다.
영락없이 밤손님의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묵린도를 등에 묶은 이무환은 자신의 복장을 둘러보았다.
‘음, 완벽하군. 이 길로 나가도 되겠는데?’
스스로에게 만족한 이무환은 촛불을 끄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밖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모두가 뒤쪽의 광룡대 연무장에서 펄펄 끓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무환은 자신의 방을 조심스럽게 나섰다. 정말 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그가 건너편의 방을 향해 조그만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꼬맹아, 내가 올 때까지 방 잘 지키고 있어.”
“알았어요, 도둑 오빠. 걱정 말고 잘 다녀와요.”
도둑질을 잘하고 오라는 남궁산산의 말이 조금 찜찜했지만, 이무환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지붕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한줄기 바람이 진눈깨비를 흩뜨리는가 싶더니 이무환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남궁산산이 자기 방을 나와 이무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이무환의 침상으로 다가가더니, 겉옷을 훌렁훌렁 벗고 침상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내가 확실하게 지켜준다니까……. 아! 기분 좋다.”
2
구룡성 북동쪽의 와룡부.
지붕 위에서 바라보니 시커먼 장강이 거대한 뱀처럼 휘돌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장강에서 한 줄기 수로가 구룡성으로 흘러들고 있었는데, 그 입구가 와룡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수룡단의 문서고에서 구룡부의 건물에 대한 것을 숙지하지 못했다면, 지붕 위에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만큼 교묘한 위치였다.
‘유사시에는 배를 타고 장강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겠는 걸?’
그 말인즉, 성벽에 설치된 철창만 열리면 언제든 장강을 통해 사람이 오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과연 여우와 너구리들이 득시글대는 곳답군.’
이무환은 곰곰이 와룡부의 건물 특징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건너편의 커다란 건물이 와룡의 주인 제갈무진의 거처였다.
삼층 전각인 그곳의 내부는 구중천처럼 복잡한 미로로 얽혀 있다고 했다.
게다가 적어도 오십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그의 거처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개중 고수라 할 만한 기운도 십여 줄기나 되었다.
‘흠, 어디다 숨겨놓았을까?’
자신의 목적은 뇌정갑이었다.
하지만 꼭 뇌정갑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와룡부를 탐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적지 않은 소득이 될 테니까.
사실 와룡부가 다른 곳에 비해 고수가 적어 몰래 방문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것 또한 그도 잘 알았다.
이곳은 와룡부. 어떤 기관진식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둥! 둥! 둥!
자정이 되었는지 구룡성의 성문에 있는 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무환은 다시 한번 두건을 점검하고는 그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순간, 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밤의 제왕 암천귀영객 허참이 백팔십 년 전 정천무림맹의 일백 고수를 농락했다는 암영무류(暗影無流)가 시공을 초월해 펼쳐진 것이다.
천룡비고에서 훔친 무공 중 하나.
‘아버지가 무공은 제법 쓸 만한 걸 골랐단 말이야.’
제갈무진은 오늘 밤 부인과 함께 보물을 얻은 기쁨을 나누고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이무환은 제갈무진의 집무실 쪽을 노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얻으면,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곳에 그것을 놓아둔다.
더구나 제갈무진이 스스로 원해서 가져간 보물이 아닌가.
하기에 이무환은 뇌정갑이 제갈무진의 집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백색 방에.
자신이 얻은 보물을 부인에게 자랑할 정도로 제갈무진은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문제는 그곳까지 들키지 않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암영무류는 어둠 속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신법이지만 밝은 곳에서는 그 이름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제갈무진의 집무실에 이르기 위해선 일곱 개의 기관진을 통과해야만 했다.
다행히 이무환은 그 일곱 개의 기관에 대해서 문서고의 설계도를 보고 대충 파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연기처럼 움직인 이무환이 호위고수들의 눈을 피해 세 개의 기관을 통과했을 때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문진!’
이무환은 즉시 눈을 감고 자신의 육감을 개방했다.
동시에 천광지령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우었다.
순간이었다. 억지로 비틀어놓은 대기의 흐름에 한 줄기 길이 보였다.
이무환은 즉시 그 길을 따라 몸을 꺾었다.
그동안에 단 한 번도 바닥을 밟지 않았다.
바닥을 밟으면 진세가 어떻게 변화할지 아무도 몰랐다.
남궁산산이 말하길, 진세를 만나면 절대 주위의 상황에 동요하지 말고 바닥도 밟지 말라고 했다.
그것도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기에 할 수 있는 충고였다.
이무환은 대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이 찾은 길을 따라 허공을 유영했다.
그렇게 반의반 각. 이무환은 눈앞이 환해지자 즉시 통로의 천장 기둥 구석에 몸을 붙였다.
‘여우새끼들! 대체 저것들 머리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저런 괴상한 진을 만들다니.’
다행이라면 기관과 기문진을 믿고 있어서인지 건물 안에는 호위무사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무환은 어렵지 않게 세 개의 기관을 더 지나 마지막 통로에 들어섰다.
제갈무진의 집무실로 이어지는 곳.
그런데 집무실로 가는 통로는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는 사정이 달랐다.
통로가 꺾어진 곳에서 두 가닥의 기운이 느껴졌다. 절정 그 이상의 기운이었다.
이무환은 슬그머니 눈만 내밀고 통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백색으로 칠해진 문 앞에 두 명의 호위무사가 정좌한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말로만 들은 제갈무진의 집무실, 백색 방이 그곳인 듯했다.
잠시 망설인 이무환은 뒤로 조금 물러나서 천장의 이음새를 찾았다.
그러고는 천장 위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음이 확인되자 소리를 차단한 채 천장을 밀어 올렸다.
그렇게 틈이 한 자가량 벌어진 순간, 이무환의 신형이 빨리듯이 천장으로 사라졌다.
‘젠장, 쥐새끼가 싫어서 천장으로 다니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찍소리도 나지 않게 두 명의 호위무사를 처리할 수 없는 이상은 쥐새끼가 아니라 쥐 떼가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이무환은 조심스럽게 천장에 검지를 박았다 뺐다.
뚫린 구멍에 눈을 대자, 저만치 아래쪽에 부처처럼 근엄하게 앉아 있는 두 호위무사가 보였다.
이무환은 숨을 가다듬고 양손의 검지를 세웠다.
찰나, 검지 끝에 붉고 영롱한 구슬이 맺혔다.
홍옥지(紅玉指)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