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57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57화
57화
밖에서 본 것보다 천룡전의 내부는 더 넓었다.
그 큰 내전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금 천룡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충량이라면 몰라도 더 이상의 어떤 마음을 느끼기에는 이무환과 천룡부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었다.
‘아버지가 원해서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스스로 일어설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일으켜 줄 재주까지는 없으니 알아서들 하슈.’
혼자 설쳐서 상황을 뒤집기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구룡성이 너무나 컸다.
게다가 너무나 깊숙이 검은 세력이 스미어 있었다.
천마교조차 끼어들었을지 모르는 마당이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수룡단의 문서를 보고 판단한 대로라면, 천룡의 남은 힘은 과거에 비해 반도 되지 않는 상태. 그나마도 천룡이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면 미미한 승률조차 모든 것이 공염불일 뿐이었다.
‘후우, 일단 만나고 보자.’
문득 대전을 길게 가로지른 무설강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디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잔잔한 기운이 전면에서 밀려들었다.
동시에 무설강이 전음으로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더니, 밀려들던 기운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으흥! 아직 용은 용이다, 이 말인가?’
적어도 네 줄기의 기운이 느껴졌었다. 절정의 기운이.
비록 신룡과 마룡에 밀려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지만, 천룡이 왜 천룡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순간 이무환도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좋아! 일단 아버지가 진 빚은 갚고 보겠어. 최선을 다해보고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생각한 승률은 이 할.
하지만 없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불가능에 가까울 뿐,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이충량의 아들이 아닌, 악귀 이무환으로 움직이는 이상은!
구룡무제 이건천은 삼층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무환과 남궁산산은 그곳까지 가는 데 세 번의 검문을 더 거쳐야 했다.
역시 검문자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실을 의미했다. 얼굴을 감춘 자들이 그만큼 무설강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정말 소문대로 백조부의 제잔가?’
이무환이 무설강의 뒤통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는데, 무설강이 커다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이무환이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나온 것은 반의반 각도 안 되어서였다.
“들어오게. 일각가량의 면담을 허락하셨네.”
무설강이 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무환의 눈도 자연스럽게 안을 향했다.
저만치 삼 장 앞에 커다란 침상이 하나 보였다. 침상 위에는 나이를 짐작키 힘든 노인이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누워 있다 방금 일어난 듯했다.
이무환은 천천히 안으로 발을 옮겼다.
행여나 놓칠세라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소매를 잡고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꼬맹이, 너는 여기 있어.”
남궁산산은 힐끔 이무환을 올려다보더니, 이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걸음을 멈추고 무설강의 옆에 섰다.
결국 이무환 혼자서 이건천을 향해 걸어갔다. 삼 장의 거리가 삼십 리는 되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이건천이 코앞에 보였다.
일 장의 거리.
이무환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룡단의 무환이 삼가 천룡지주 구룡무제를 뵙습니다.”
이건천이 검버섯 낀 눈을 들어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허허허허, 구룡무제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이제 언제 들을지 모르겠네만.”
이무환이 고개를 들었다.
“몇 십 년은 더 불리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천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러기가 힘들 것 같구먼.”
“그거야 어르신 마음에 달린 것이겠지요.”
“거참, 내 설강에게 듣기는 했네만, 꽤나 당돌한 젊은이군.”
“젊을 때는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지요.”
“흠, 하긴……. 그래, 무엇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이무환이 잔잔한 눈으로 이건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풍련에 대한 것을 말해주었다.
이미 호연청을 통해 보고를 받았는지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혈지겁난과 삼악이라는 말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건천을 향해 이무환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광룡대를 맡았습니다.”
이건천이 눈을 조금 치켜떴다.
광룡대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는데, 역시나 이건천조차 듣지 못한 듯했다.
이무환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든, 누구든. 약조해 주신다면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묘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이건천이 뭔가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무환은 이건천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건천이 답했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할 목숨. 뭘 망설이겠나. 내 약조하지. 말해보게.”
순간이었다.
이무환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일더니, 찰나간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이무환과 이건천의 몸을 감쌌다.
이 장가량 떨어져 있던 무설강이 그걸 보고는 흠칫한 표정으로 옆구리의 철검을 잡았다.
“무슨 짓……!”
하지만 이건천이 손을 들어 흔들자, 무설강은 의아해하면서도 천천히 검병에서 손을 떼었다.
“젊은이가 대단하군.”
이건천이 진정으로 놀란 듯 눈마저 크게 뜨고 감탄했다.
음파만 차단된 것이 아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기운으로 인해 표정이나 입 모양조차 보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놀람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무환이 천천히 우수를 들더니 엄지와 중지를 모으고 가슴에 가져다 댄다.
“혹시 아셔도 절대 놀라셔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니까요.”
이무환의 가슴에서 환한 구슬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진 순간! 영롱한 삼색 구슬이 엄지와 중지에 끼어져 빙글빙글 돌았다.
그걸 바라보던 이건천의 눈빛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놀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무는 그의 표정에 이무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놀라지 마시라니까요.”
“나더러 그걸 보고 놀라지 말라면, 아예 이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으라는 말이냐?”
이무환의 엄지와 중지에 끼어 있던 구슬이 점차 커지더니, 주먹만 해져서 손바닥 위에 놓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무환의 손에 놓여 있던 구슬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에! 천광! 분명 천광이지? 맙소사! 내 살아생전에 전설로만 전해지던 천광주(天光珠)를 보게 되다니!”
이건천이 더듬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검지를 들어 쿡 찌를 듯이 가리키며 물었다.
“너, 충량이 놈 아들이지?”
이무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떻게 알았지?’
“솔직히 말해라. 절대 야단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요?’
이무환이 망설이자 이건천이 검지를 흔들며 나직이 윽박질렀다.
“말 안 하면, 절대 이 방에서 못 나가게 할 것이니라.”
그러고는 ‘어쩔래?’ 하는 눈으로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이무환은 뒤통수를 긁으며 슬며시 눈을 돌렸다.
사실 말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건천에게만은 자신을 밝힐 작정이었으니까.
진기로 주위를 감싸고 천광주를 보여준 것도 그런 의미였다. 어쨌든 아버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분이 아니던가.
그런데 묘했다. 막상 인정을 하려니까 가슴이 찡하니 울렸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닌 듯했다. 노려보는 백조부의 눈 깊은 곳에서도 격정의 파도가 치고 있었다.
이무환은 먹먹해진 가슴을 달래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헤헤, 어떻게… 알았어요? 제자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제자라고 버릇까지 같을까? 네놈이 조금 전에 장난스럽게 웃었잖느냐! 충량이 그놈 어릴 때처럼!”
‘이런 젠장할!’
아버지를 그렇게 원망했는데,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니랄까 봐 버릇을 그대로 이어받았단 말이 아닌가!
이무환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말했다.
“좌우간 말이죠,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백조부님 믿고 말씀드린 거니까요. 알았죠?”
“썩을 놈. 어째 사람 놀래키는 것이 부자간에 그렇게 똑같냐 그래?”
“말하면 저도 훌쩍 떠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오냐, 누가 니 애비 자식 아니랄까 봐 이제는 똑같이 떠나겠다고 협박까지 하는 거냐?”
“에이, 협박은 누가 협박한다고 그러세요? 그래도 아버지는 걱정돼서 저를 보냈는데, 백조부님이 자꾸 그러시면 저와 아버지만 나쁜 사람 되잖아요.”
“끄응…….”
이건천이 뒤 마려운 표정을 짓자 이무환이 다급히 말했다.
“아, 표정 좀 푸시라니까요?”
그제야 이건천이 한숨을 내쉬며 겨우 안정을 찾아갔다.
“그놈 어디 있냐?”
“말 못합니다.”
“왜? 내가 잡으러 갈까 봐?”
“뭐, 그런 것도 있고…….”
“아니면, 그놈이 가져간 거 다시 뺏어갈까 봐?”
“쪼끔은 그런 것도 있는데 말이죠, 흐으…….”
무안한 듯 씩 웃으며 말하는 이무환이다.
이건천이 그런 이무환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놈아, 그놈이 무슨 용 잡아먹는 재주가 있다고 삼중으로 문이 닫힌 천룡비고에 몰래 들어갈 수 있었겠느냐?”
“예? 그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이무환을 보더니 이건천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휴우, 사실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다만, 내가 문을 열어놨었다. 그놈이 잔뜩 술에 취해 울면서 횡설수설하는 게 떠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선물을 하나 주는 셈 치려 했지. 설마 그놈이 백수십 년 동안 감춰져 있던 금서까지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이무환이 멍하니 이건천을 바라보았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득 아버지가 술 취해 하던 말이 떠올랐다.
“흐흐흐, 내가 잘못해서 조상님의 신상이 깨졌는데, 그 속에 책이 두 권 있더구나. 나오면서 들고 나왔는데, 그게 초대 천룡께서 감춰놨다는 금서인 줄은 나도 구룡성을 나와서야 알았지.”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수십 년간 감춰져 있었다면서 아버지가 금서를 가져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조상님의 깨진 신상 안에 글이 적혀 있었다. 금서를 봉하는 이유가… 익히는 게 너무 위험하고, 처절한 고통이 동반되어야 하는 게 패도마공에 버금가서, 자칫 욕심내다가는 후손이 끊길 것 같아 봉한다는 내용이었지. 더구나 하나는 마지막 구결이 없어서 익히지도 못하고 전신혈맥이 터져 죽을지 모른다는 말까지 있었지.”
그랬다. 자신이 그렇게 익혔으니까.
그런 자신도 아마 상아와 비아가 없고, 해저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무환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이건천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당장은 아버지가 계신 곳을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이건천은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 애비 아들인데 고집이 오죽하겠느냐? 알았다. 대신 내가 죽기 전에는 꼭 말해다오.”
“예. 저…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당분간은 저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놈들의 눈과 귀는 구룡성 전체에 깔려 있으니까요.”
이건천이 표정도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빽, 고함을 질렀다.
“이놈이… 알았다니까!”
‘쩝, 금방 쓰러지게 생긴 분이 고함은…….’
더 있어봐야 좋은 말 듣기는 그른 것 같다. 일단 첫 만남은 이 정도면 되었다.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뭐.’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난 후에.
“그럼 다음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이무환이 돌아가기 위해 음파를 차단한 기운을 거두어들일 때다. 이건천이 깜박 잊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와룡부에서 뇌정갑을 가져갔다는 말을 들었다.”
‘뇌정갑(雷霆匣)? 혹시 조금 전의 선물이라는 것이……?’
이무환은 거두어들이던 기운을 그대로 놔두고 이건천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