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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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54화
54화
밤이 늦어서 주위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보진욱은 목표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이자가 어디로 가는 거지?’
이상했다. 놈은 신룡부가 아닌 서쪽 성벽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신룡부로 갈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담장을 반 바퀴쯤 더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릴 뿐.
‘아직도 의심을 떨치지 못한 건가? 흥!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걸?’
내심 그렇게 생각한 황보진욱은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세 번째 골목을 막 잡아 돌았을 때다.
“컥!”
저만치 앞쪽의 골목 안에서 짧은 신음이 들려왔다.
황보진욱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두 번째 신음이 보다 더 확실하게 들렸다.
“이런……. 헉!”
그 소리가 들린 순간, 황보진욱은 더 이상 조심스럽게 걷지 않고 날듯이 달려갔다.
“이런, 썅!”
아는 목소리였다. 수하 중 하나인 장병추의 목소리.
상황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놈이 작정하고 손을 썼다. 그리고 두 명이 당했다.
황보진욱이 몸을 날리자 좌우 멀리 떨어져서 따라오던 수룡육대의 두 대원도 정신없이 달려왔다.
막 골목 안으로 들어간 순간, 황보진욱은 골목 한가운데 서 있는 중년인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중년인은 장병추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축 처진 장병추의 머리가 뒤로 꺾인 걸 보니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다.
달빛 아래 서서 차갑게 웃는 그를 보자 황보진욱은 소름이 돋았다.
그가 급히 뒤를 향해 소리쳤다.
“오지 말고 돌아가!”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네놈들은 한 놈도 돌아가지 못한다.”
눈이 가늘게 찢어진 중년인이 말함과 동시, 좌우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더니 수룡육대의 대원들 앞을 가로막았다.
황보진욱이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흥! 감히 수룡단을 공격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흐흐흐,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냐?”
중년인은 손에 들린 장병추를 한쪽에 던지고는 황보진욱을 향해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좌우에서 나타난 자들도 수룡육대의 대원들을 덮쳤다.
3
광룡대의 거처로 돌아간 이무환은 황보진욱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종리난경과 함께 돌아온 유군명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좀 더 살펴보려고 남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이무환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니까. 놈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자…….”
그때 남궁산산이 불쑥 한마디 했다.
“위험해요, 오빠. 빨리 찾아야 해요.”
‘뭐?’
순간 번뜩 든 생각에 이무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맞아! 빨리 황보 대주를 찾아!”
“예?”
엽상이 엉거주춤 일어서자 이무환이 다급히 말했다.
“놈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어. 놈이 작정하고 황보진욱을 죽인 후 사라지면 우리는 놈이 누군지 알 수 없단 말이야. 뭐 해? 빨리 찾아봐!”
엽상과 유군명이 수하들을 대동하고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사람이 광룡대의 거처로 달려들어 왔다.
그를 본 엽상이 대경해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황보 대주는?!”
피로 얼룩진 그는 한쪽 팔이 반쯤 잘려서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수룡육대 대원 중 하나였다.
“빠, 빨리……. 대주께서 위험…….”
“뭐야? 황보 대주는 어디 있어!”
“서, 서쪽 성벽 근처……. 저는 대주께서 적을 막는 사이 겨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내가 먼저 갈 테니까 따라와!”
이무환이 먼저 몸을 날렸다.
뒤따라 엽상과 유군명과 종리난경을 비롯해 영호승 등 네 사람이 다급히 광룡대를 빠져나갔다.
4
황보진욱은 자신의 뚫린 가슴을 보며 툴툴 웃었다.
수룡단의 보편적인 행동 수칙대로, 들켰다는 걸 알았을 때 그냥 돌아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수하도 죽지 않고, 자신 역시 자신의 심장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었다.
수하도 죽고 자신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분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고개를 든 황보진욱은 아른거리는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노려보았다.
놈이 가느다란 눈을 치켜뜨고 웃는 게 보였다.
거리는 이 장. 단 한 번의 도약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아마 마지막 공격을 하고 나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라! 나 황보진욱, 그냥 죽지는 않는다!’
“이놈!”
가슴에서 손을 뗀 황보진욱은 웃고 있는 중년인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놈이 손을 드는 게 보였다.
손에서 녹색 기운이 일렁거렸다.
황보진욱은 상대가 손을 내려치는 걸 보며 두 주먹을 교차시켰다.
순간, 그의 손 안에서 뭔가가 터졌다.
동시에 내뻗은 주먹을 펼치는 그의 입가에도 만족한 웃음이 걸렸다.
찰나 중년인의 녹기 가득한 손이 그의 천령개에 떨어졌다.
퍽!
‘총대주… 부디…….’
어렴풋이 중년인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이런, 남자새끼가 무슨 향수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5
비릿한 바람이 움직임을 멈춘 네 구의 시신을 쓸고 지나갔다.
이무환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이 끝났음을 알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주위로 겁에 질린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금 늦었군.”
눈앞에 네 구의 시신이 있었다.
황보진욱과 수룡육대의 대원 셋의 주검.
적지 않은 죽음을 본 그였다. 위험이 동반된 일에 죽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도 막상 황보진욱의 시신을 보자 분노가 끓었다.
‘흥! 한번 해보자 이거지?’
그가 황보진욱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엽상과 유군명이 골목 안으로 들어오며 놀라 부르짖었다.
“헛! 황보 대주!”
그들은 곧바로 황보진욱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머리가 부서진 황보진욱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어떤 개 같은 새끼가!”
“개새끼들! 가만두지 않겠어!”
그들을 향해 이무환이 말했다.
“한 놈이 아냐. 적어도 세 놈이야. 꼬리를 자르기 위해 작정하고 손을 쓴 것 같다.”
바로 그때였다. 분노한 채 이를 부드득 갈던 엽상이 코를 킁킁거렸다.
“엇?”
유군명도 뭘 깨달았는지 엽상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거지?”
엽상은 대답 대신 황보진욱의 손을 뒤집었다.
사기조각 같은 것이 그의 손바닥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엽상은 황보진욱의 손바닥에 코를 대더니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마지막에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런 엽상을 향해 이무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지? 이게 무슨 향기인 줄 알아?”
엽상이 고개를 돌려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비상 작전 시, 일행들과 멀리 떨어질 경우 자신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서 쓰는 추종향이 있습니다. 여자들이나 쓰는 향수 같아서 평소 때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 황보 대주가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그 향수가 든 병을 깨뜨렸습니다.”
순간 이무환의 눈이 새파랗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황보 대주가 그냥 죽지는 않았다, 이 말이지?”
“그 향은 몸을 씻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십 보 거리 내에 있으면 저희 대원들이 맡을 수 있습니다, 총대주.”
“그래? 그럼 지워지기 전에 찾아야겠군. 복수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악귀가 복수를 해주겠다고 한다.
엽상의 입가로 진한 살소가 맺혔다.
‘이놈! 너는 절대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6
황보진욱과 수룡육대 대원들의 죽음으로 광룡대의 분위기가 깊게 가라앉았다.
구룡성 내에서 감찰부인 수룡단의 대주와 대원들이 죽다니.
보고를 받고 분노한 호연청이 짧게 말했다.
“누굴 조사하든, 이 대주 맘대로 해! 전권을 줄 테니까!”
하지만 이무환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용히 지냈다.
하루의 반은 영호승 등의 무공을 봐주고, 반은 자신의 무공을 되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엽상이 불만을 토해냈다.
“총대주, 이대로 그냥 있을 겁니까?”
힐끔 이무환을 바라본 남궁산산이 슬며시 말했다.
“우리가 움직이면 놈들이 움직이지 않아요. 그러면 향이 묻은 그놈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그들의 정신이 해이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 향이 지워지면 소용이 없잖소?”
“그러니 그놈과의 싸움은 시간 싸움이라고 볼 수 있어요. 놈이 먼저 움직이냐, 아니면 향이 먼저 지워지냐. 향이 칠 일은 간다고 했죠? 그럼 아직도 이틀이나 남은 셈이잖아요.”
이무환이 엽상을 째려봤다. 한 자는 나와 있던 엽상의 입이 조금은 들어간 듯 보였다.
“쯔쯔쯔, 어째 꼬맹이만도 못해? 요즘 수련을 게을리 하는 것 같더니.”
수련 이야기가 나오자 엽상이 눈을 부릅떴다.
“총대주, 난경에게는 무서만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무서만 줬잖아?”
“어제부터는 영호승 등과 함께 수련하는 것 같던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하라고 했나?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지.”
그건 그랬다. 종리난경도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함께 수련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황보진욱을 대신해서 수룡육대의 대주로 임명되었으니 그들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면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속은 것만 같았다.
“안 하면 안 됩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물어봐? 종리 대주에게 물어보지.”
물으나마나 구박만 들을 터.
엽상의 입술이 다시 앞으로 삐져 나왔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더니 유군명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총대주, 놈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광룡대의 대원들이 신룡부와 마룡부와 금룡부와 도룡부의 입구를 정기적으로 오갔다.
특별히 누군가를 감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향이 나는 사람이 나오는지만 신경 썼다.
그러길 닷새. 마침내 수룡삼대의 대원 하나가 향을 맡았다.
신룡부를 나서는,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중년인에게서 향이 나고 있었다.
중년인, 신곽은 좌우를 살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거처를 나섰는데, 알게 모르게 자신을 조여오는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흥! 아직도 뜨거운 맛을 덜 봤군.’
마음 같아서는 골목으로 끌고 가서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낮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맡은 임무가 있었다.
그는 걸음을 돌려서 방향을 틀었다.
더러운 것은 피해가면 되었다. 자신이 먼저 안 이상 멍청한 수룡단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개중에는 일반 양민들도 있었고 무사도 있었다.
수룡단으로 추정되는 놈들은 저만치서 어정쩡하니 움직이며 다가오지 못했다.
‘크크크, 그래도 이 어르신이 두렵긴 한 모양이군.’
신곽은 만족한 표정으로 재빨리 골목에 있는 다루로 들어갔다.
“흠, 귀향루라……. 좋은 이름이군.”
그가 들어가자 점소이가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옵쇼!”
신곽은 자연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래, 여기는 뒷간이 어디 있지?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싶은데.”
십여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다지 수상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두 푼짜리 작은 은편을 꺼내 점소이에게 내밀었다.
“그냥 가는 게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점소이는 날렵하게 신곽의 손에서 은편을 낚아채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리 따라오시지요.”
신곽은 점소이가 안내해 준 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네 개의 다실이 보였다.
점소이는 정면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라 했다.
신곽은 점소이의 말대로 정면에 있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남녀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다실을 지나자, 열네댓 살 정도의 소녀가 남자와 마주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게 보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쯔쯔쯔……. 네년 부모가 누군지 걱정된다, 걱정돼.’
혀를 찬 그는 비어 있는 다실을 지나 점소이가 말해준 방문을 열고 한 발을 디뎠다.
순간!
갑자기 커다란 손이 두 눈에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