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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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51화
51화
제1장. 흔적(痕迹)
1
이무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남궁산산의 차갑게 굳은 눈을 직시했다.
“얼마 전에 그 무공을 쓰는 놈을 만난 적이 있어.”
“아! 그때 그자들!”
뭔가가 생각난 듯 영호승이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발했다.
이무환은 여전히 남궁산산의 눈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놈을 합비로 가던 중에 만났지. 놈은 가슴과 어깨가 갈라진 채 도주했는데, 그놈이 마지막에 펼친 것이 바로 묵령운이었다. 내가 잘못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남궁산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그자가… 금천신문과 연관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것까지는 정확히 몰라. 다만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남궁산산이 입술을 깨물며 한광이 번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이함마저 느껴지는 섬뜩한 눈빛.
이무환조차 그 눈빛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내면에 억제하기 힘든 또 하나의 자신이 있다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에혀…….’
이무환은 마음이 착잡했지만, 재빨리 말을 이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세가가 걱정되는 거라면 너무 염려 마라. 그들 무리는 다른 곳에서 상대할 것이니까.”
남궁산산의 눈이 커졌다. 한광이 많이 수그러든 상태였다.
“예? 누가요?”
“정천무림맹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어. 내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이미 그들에 대한 색출 작업에 들어갔을 거야.”
그제야 남궁산산의 눈빛이 예전의 순진한 소녀처럼 부드러워졌다.
“고마워요, 오빠. 역시 나에겐 오빠가 곁에 있어야 돼요.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킁, 쪼끄만 한 게 여우가 다 되어가지고 기회만 되면 놓치지 않는군.’
대답 대신 휙, 고개를 돌린 이무환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 악귀대주가 언제 또 그런 수작을 부려놓았을까?
도무지 사람 같지 않다는 눈빛들이었다.
이무환은 일단 빽, 한 소리 내지르고 명을 내렸다.
“좌우간! 절대 놈들이 눈치 채면 안 된다는 점 명심하고,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처럼 움직여. 놈들과 지금 당장 싸우자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시간마다 각자가 수집한 정보를 나에게 보내는 거 잊지 말아. 소홀히 생각한 것에 진짜 정보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거든.”
“알겠습니다, 총대주.”
“춥다고 주루에 가서 술 마시고 허튼짓하는 사람은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어?!”
잘나가더니, 장강에서 고래 잡지 말라고 설치는 이무환이다. 그런데 그 덕분에 차갑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엽상이 힐끔 남궁산산을 바라보고 한마디 했다.
“총대주나 딴 짓하지 마쇼.”
아직도 종리난경으로 인한 불만이 풀리지 않은 듯 까칠한 말투였다.
“나? 내가 뭘?”
2
백색의 방이 촛불에 하얗게 일렁인다.
방의 주인이 결벽증에 걸린 사람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의 모든 장식이 다 하얗다.
벽도, 휘장도, 침상도, 탁자도…….
하얀 벽에 한 마리 백룡이 똬리를 틀고 있는 방.
언제부턴지 그 방에 쉰 전후의 중년인 둘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찻잔이 거의 빈 걸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난 듯했다.
“석치상이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황의중년인이 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방과 잘 어울리는 백색 비단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자가 뭐가 아쉬워서 직접 손을 썼겠나? 아마 그의 제자나 측근을 보냈을 거야.”
“그대로 두실 겁니까?”
“공손척은 지금 어디 있지?”
“쌍귀의 움직임을 쫓고 있습니다.”
“그에게 강서로 가서 순우결을 만나보라고 하게.”
황의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괜찮겠습니까?”
“흐름이 빨라지고 있어. 아마 그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금방 알아들을 거네.”
“만에 하나… 그가 관여되어 있다면, 공손척이 위험해질 겁니다.”
“글쎄, 그러면 대신 이번 일에 그들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공손척을 잃는 건 손해가 크네만, 그걸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만도 아니야.
“미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입니다, 부주.”
“미끼가 좋아야 큰 고기가 무는 법이네. 그것도 확실하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황의인이 고개를 숙였다.
“정히 그러시다면, 명대로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말게. 그리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백의인은 말을 하다 말고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찻잔이 탁자에 내려진 후였다.
“수룡단에 대해 알고 싶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황의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룡단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어떤 면이 말인가?”
“그동안 조용했는데, 더 조용해졌습니다.”
“흠, 확실히 이상하군.”
“그러다 며칠 전부터 바쁘게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호연청이 움직였나?”
“아닙니다. 대주들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호연청은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백의인의 이마에 세 줄기 골이 졌다.
그것만으로도 황의인은 흠칫했다. 자신이 아는 한, 눈앞에 있는 사람은 거의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염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염려라기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러네. 한번 자세히 알아봐. 호연청 대신 누군가가 있을 거야. 그가 누군지에 따라 우리 역시 움직임을 달리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부주.”
“아참, 천룡부에서 혼인 이야기가 나왔다고?”
“셋째 따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상대는?”
“이충선의 둘째 아들인데, 제법 뛰어난 아입니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의인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예물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 같네만.”
“일단은 부주님의 의중을 묻고 있습니다.”
백의인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들이 먼저 바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이건가? 훗, 그것도 괜찮지. 그들이 묻거든 말하게. 더도 덜도 말고, 비고의 구석에 있는 먼지 쌓인 물건 하나 집어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대로 말하겠습니다, 부주.”
3
어둠이 짙게 깔린 술시 무렵.
이무환은 외성의 용루객잔 이층 객방에 앉아 눈을 반쯤 뜨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있는 천룡부의 동남쪽 저만치, 처마를 맞대고 이어져 있는 일곱 개의 거대한 전각이 보였다.
마룡부.
그곳이 바로 당금 구룡성에서 신룡부와 함께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마룡부였다.
“마룡부와 신룡부가 그들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옆에 앉아 있던 남궁산산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냥 놔두는 걸까?”
“둘 중 하나겠죠. 필요해서 끌어들였는데 너무 커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갈 생각을 했든지 말이에요.”
“두 곳 다 그럴까?”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별거 아냐. 한 곳 정도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거꾸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니고, 구룡성이니까요.”
그랬다.
구룡성. 이곳은 구룡성이었다.
단독으로는 아무리 신비의 세력을 등에 업었다 해도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의 결집체.
천룡부가 신룡부와 마룡부에 밀리고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마 천룡부를 완전히 몰아내려면 자신들의 몰락도 각오해야만 했을 터,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신비 세력이 뒤를 노릴지도 모르고, 정천무림맹이나 강서의 천마교 역시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들의 힘도 이미 스며들어 있을지 모르지. 그냥 놔두기에는 구룡성이 너무 먹음직스럽게 보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골치가 아팠다.
‘근데 내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서 속이 시커먼 놈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지?’
괜히 아버지가 얄미웠다.
아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을 맡겨놓고, 정한도로 놀러나 다니며 즐기고 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돌아가면 두고 보자고요. 절대 술을 못 마시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방으로 다가오더니, 약하게 문을 세 번 두드렸다.
“구대 삼홉니다, 총대주.”
“들어와.”
들어온 자는 수룡구대의 삼호, 오지병이라는 대원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굽히고는 자신이 모아온 정보를 이야기했다.
마룡부를 집중적으로 살핀 지 두 시진, 그동안 그럴듯한 정보는 한 건도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최소한 마지막 말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금룡부에서 손님 둘이 방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금사당의 당주인 금적태세 양화중이고, 다른 한 명은… 잘 모르는 자였습니다.”
“잘 모르는 자?”
“나이는 쉰 정도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양화중의 뒤만 따랐습니다.”
이무환의 눈이 반짝였다.
나이 쉰이면 남의 뒤나 따라다니며 심부름할 나이가 아니다.
더구나 밤중에 마룡부를 방문하는 자가 아닌가?
지위 역시 낮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룡단이 모르는 자라니.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지?”
“일각 반가량 되었습니다.”
이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맹이, 너는 여기 있어라. 아니지, 아예 수룡단으로 돌아가 있어라.”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갈 곳은 남궁산산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말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합비로 돌아가고 싶어?”
남궁산산이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아뇨, 수룡단으로 돌아갈래요.”
이무환은 남궁산산의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이 마구 엉클어뜨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래야 이쁜 꼬맹이지.”
그러고는 오지병을 바라보았다.
“같이 좀 가줘. 밤에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 돌아올지 모르니까.”
“예, 총대주.”
“피이…….”
남궁산산이 머리를 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조금 가다가 몰래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무환이 먼저 눈치 채고 감시자를 딸려 보내려고 한다. 정말 잔머리 하나는 대단한 오빠였다.
“요것아, 너만 머리 굴릴 줄 아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얌전히 돌아가서 기다려.”
이무환의 말에 남궁산산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알았사와요, 오빠. 가서 깨끗이 씻고 기다릴게요.”
그러고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지병의 소매를 잡고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이무환은 남궁산산이 떠나자, 촛불을 끄고 객방을 나왔다.
촛불이 꺼진 이상 객방은 더 이상 연락처가 아니다. 사람들은 객방 대신 이제 두 번째 약속 장소로 모일 것이었다.
이무환은 두 번째 약속 장소인 다루로 향했다.
그곳은 용루객잔에서 삼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룡부의 동쪽 담장에 인접해 있었다.
귀향루(歸鄕樓).
이무환이 힐끔 깃발을 바라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점소이로 분장한 수룡삼대의 대원이 그를 맞이했다.
“팔룡회의 모임에 오셨습니까?”
“모두 와 있소?”
“예, 공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팔룡회라는 이름은 이무환이 지었다. 머리 없는 구룡성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엽상 등이 먼저 와 있었다. 촛불이 꺼진 걸 보고 곧바로 온 듯했다.
이무환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금룡부의 손님이 어디로 갔지?”
유군명이 대답했다.
“전마각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봤습니다.”
“그곳에서 갈 수 있는 방법은?”
“전마각은 유마각과 이어져 있습니다.”
“마룡부에 지하 통로가 있다는 문서를 봤는데, 혹시 아는 것 없어?”
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무환이 핀잔을 주었다.
“수룡단의 문서 좀 살펴봐. 공부해서 남 줘? 살려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대주들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무환이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좌우간 내가 직접 들어갈 거야. 그대들은 마룡부를 지켜보면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어디로 가는지 조심해서 따라가 봐. 놓치지 말고.”
“예, 총대주.”
“절대 무리하게는 접근하지 마. 이제 시작인데 죽고 싶지 않으면.”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이무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어디 마룡의 낯짝을 보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