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49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49화
49화
반 각도 되지 않아 남궁산산이 도착했다. 그제야 이무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만권서를 읽었다는 남궁산산이다. 그녀가 있는 한 수천 권의 책자쯤은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꼬맹아, 내가 말한 내용이 있는 문서를 찾아봐.”
“알았어, 오빠!”
“일단 최근 십여 년 사이에 구룡성에 들어온 자들 중 무공이 절정고수인 자들. 그들이 어디로 흘러들어 갔는지 적힌 것이 있는가 보고. 각부에서 유난히 변동이 심한 곳에 대한 문건이 있는가. 갑자기 실세로 부상한 자들에 대한 것도. 외부와 자주 접촉하는 간부들도. 구룡삼화에 대한 것도…….”
정보는 문파별로, 유형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남궁산산이 달려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책으로 엮인 문서가 수북이 쌓였다.
‘꼬맹이를 데려오길 잘했군.’
자신은 하루 종일 걸려도 찾을 수 없는 걸 남궁산산은 스윽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귀신처럼 찾아냈다.
마음이 흡족해진 이무환은 자신의 입술에서 깨 하나 떼어 먹은 남궁산산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겨우 깨 하나 먹었을 뿐인데 뭐.’
그렇게 책이 쌓이자 이무환은 남궁산산이 가져온 책을 하나하나 읽어봤다.
자신이 원한 것은 대부분 다 있었다. 구룡삼화에 대한 것만 빼고.
한 권, 두 권, 세 권…….
읽은 책이 옆으로 수북이 쌓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무환은 마지막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남궁산산이 탁자 위에 손을 세우고, 그 손에 턱을 기댄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오빠.”
“뭐가?”
“배 안 고파요? 오줌도 안 마려워요?”
“이 꼬맹이가 못하는 말이 없어.”
그런데 이상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고 고프고 오줌이 마려웠다.
“어, 얼마나 지났지?”
남궁산산이 말했다.
“점심 먹고 들어왔는데… 날 샜어요.”
날 샌 두 사람이 거처로 돌아가자 광룡대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이미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지하 문서고에서 하루 종일 뭘 했을까? 설마 그 지겨운 문서만 읽고 있진 않았겠지?
“뭘 봐!”
빽 소리친 이무환이 방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일제히 남궁산산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남궁산산도 수줍게 배시시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분명 뭔 일이 있었어! 남궁 소저가 언제 저렇게 웃는 거 봤어?’
광룡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엉큼한 대주!’
방으로 들어간 이무환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천룡부의 전력은 과거에 비해 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구룡무제 이건천은 치명상을 입어 공력이 반 이상 쓸 수 없었고, 그의 두 아들 중 이충문은 죽고, 이충광은 단전이 파괴되다시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원로도 세 명만이 남았고, 열두 명의 장로와 호법 중 제대로 힘을 쓸 만한 자는 겨우 다섯뿐이었다.
천룡부 총 사백의 무인 중 남은 사람은 겨우 이백.
검룡부와 창룡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천룡 이씨 가문은 예전에 지워졌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더 심하군. 제길, 골치 아프게 생겼어.’
이무환이 사람들을 부른 것은 방으로 들어간 지 세 시진이 지나서였다.
광룡대원들과 남궁산산이 들어오자 이무환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역천사룡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모을 생각이야. 정보를 어떻게 모을지는 세 명의 대주가 더 잘 알 테니 굳이 관여하지 않겠어. 다만 방향을 조금 달리해 줬으면 해.”
엽상과 유군명과 황보진욱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룡부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모은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아는 까닭이었다.
유군명이 고요한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대주.”
“간단해. 일단은 깊이 파고들려 하지 말고, 핵심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봐.”
그걸 끝으로 입을 다무는 이무환이다.
유군명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답니까?”
집중적인 정보수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했다.
수룡단이 어느 곳인가?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곧 이무환의 설명이 이어지자 유군명의 표정도 굳어졌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야. 사소한 것도 놓치면 안 되거든. 길을 가다 어느 쪽을 바라보는지, 식사를 언제 했는지, 누굴 만나는지는 당연히 철저하게 알아봐야 하고. 그렇게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다 보면 분명 걸리는 것이 있을 거야. 그때 가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거지. 길은 여러 갈래여도 결국 도착점은 하나니까.”
그의 말대로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경계가 늦춰지면 그만큼 활동이 활발해진다. 놓치기가 쉽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일에 매달린 모두가 목숨마저 걸어야했다.
“일단 내 나름대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뽑아봤으니까, 세 사람이 상의해서 나눠 맡아.”
3
“유흔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디서 발견되었지?”
“안산을 지나 함령 북쪽 오십 리 지점의 제당 옆에 있는 야산에서 찾아냈습니다.”
준수한 삼십 초반의 은의인이 몸을 돌렸다.
뒷짐 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세 개의 반지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침묵을 깼다.
“쌍귀는 뭐라 하던가?”
“만나지 못했다는 걸로 봐서, 그들을 만나기 전에 당한 것 같습니다.”
“적혈삼마에 대한 것은 알아봤다던가?”
“이마 서웅기의 시신만 찾았을 뿐, 나머지 두 사람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합니다.”
끝내 은의인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놈들을 믿고 일을 벌인 것이 실수였나? 젠장! 시간과 사람만 헛되이 소비했다는 말이군. 썩을 놈들, 그놈들 때문에 사부님께 진탕 욕을 먹겠는데?”
바로 그때였다.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올리던 회의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대령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유흔의 시신에 난 상흔을 조사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점?”
“가슴이 가공할 장력에 함몰된 것이 사인으로 보였는데, 그 장흔이 꼭… 말로만 들은 ‘운(雲)’의 무공 같았습니다, 대령주.”
순간 은의인이 홱 몸을 돌리고 회의인을 노려보았다.
“운이라고? 분명하더냐?”
“‘운’의 정확한 상흔을 알지 못해서 아직 십 할 자신은 할 수 없습니다만, 가슴이 둥글게 함몰된 것이, 마치 구름 문양처럼 보였습니다.”
은의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래? 흐흥! 그렇단 말이지? 하긴 유흔을 그렇게 쉽게 죽일 만한 자는 천하에 몇 안 된다. 물론 그놈들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말이야.”
“일단 좀 더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대령주.”
“철저히 조사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정말 놈들이라면 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부님께 할 말은 있겠어.’
은의인의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은 확신을 가진 표정. 회의인은 굳이 반박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복명!”
제10장. 손을 앞으로 뻗어!
1
일월 초닷새 점심 무렵..
북적거리는 구룡성의 외성 저잣거리에 남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이제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청년이 뒷짐을 지고 걸었다.
한가한 걸음걸이.
세상에서 제일 할 일 없는 한량의 걸음이다.
옆에 쫄랑쫄랑 따라가는 여자애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다.
‘저놈은 분명 얼굴 씻는 것도 저 꼬마애를 시킬 거야.’
‘밥도 떠먹여 달라고 할 걸?’
사람들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도 걸음걸이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눈치가 없는 건지, 얼굴이 두꺼운 건지. 한량 같은 청년, 이무환은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걸어갔다.
“오빠, 그게 무슨 노래예요?”
남궁산산이 궁금한지 물었다.
이무환은 언젠가 영호승 등에게 했던 대답을 돌려서 했다.
“상아하고 비아라고, 내 예쁜 친구가 부르는 노래지.”
“오빠 예쁜 친구?”
“혹시 돌고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몰라요.”
“내가 살던 곳에 돌고래가 두 마리 사는데, 나와 친구야. 거기에는 장대도 있고, 빨래판도 있어. 빨래판은 등이 방만 한 커다란 거북이지.”
“우와!”
남궁산산의 반응은 십삼조원들과 달랐다.
역시 계집아이는 계집아이였다.
“항상 물속에서 그 친구들과 놀았어. 심지어 무공을 익힐 때도. 그 친구들에게 배운 것도 많았지.”
“진짜 재미있었겠다.”
이무환은 신이 나서 몇 마디 더 하다 말고 이상한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남궁산산의 눈을 보니 더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산산이 물었다.
“나중에 오빠하고 그곳에 가면, 나도 같이 놀 수 있어요?”
“네가 왜 거길 가?”
“에이, 그걸 몰라서 물어요?”
“얘가 정말!”
이무환이 고리눈을 뜨고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남궁산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입술 닦아줬잖아요.”
“그, 그거야 내가 당한 것이고……. 너, 정말 계속 그러면……!”
이무환이 짐짓 눈을 부릅뜨고 남궁산산을 야단칠 때다.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그렇지! 이제 아주 패려고 하는구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이무환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였다, 종리난경.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연약한 소녀를 때리려 하다니, 완전히 야만인 아냐?”
이무환은 남궁산산과 종리난경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약? 이 꼬맹이가?”
“흥! 꼴에 칼을 찬 걸 보니 무공을 익혔나 본데, 대체 어떤 작자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무공을 가르쳐 준 거지? 가르쳐 준 무공으로 어린 소녀를 때리라고 하든?”
이무환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거야 내 사정이고, 근데… 왜 당신이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거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이무환의 코앞까지 다가온 종리난경이 얼굴을 바짝 디밀고 으르렁거렸다.
“난, 체질적으로 너 같은 놈이 싫거든.”
“잘생겨서?”
“미친놈!”
옆에서 빙글빙글 웃던 남궁산산이 종리난경의 옷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저기요, 언니. 우리 오빠 성질이 좀 그렇거든요? 그렇게 다가가면 큰일 날지 몰라요.”
종리난경이 고개만 돌려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내가 바로 성질 지랄 같은 놈들만 전문적으로 때려잡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보니까 좀 참아요.”
그제야 종리난경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수십 명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자는 창틀에 턱까지 괴고 구경했다.
홱, 고개를 돌린 그녀가 말했다.
“조용한 데로 갈까? 설마 남자 새끼가 도망가지 않겠지?”
마다할 이무환이 아니었다. 아니, 속으로는 잘되었다며 쾌재를 불렀다.
“이쁜이가 안내해 봐.”
“건방진 놈. 따라와!”
몸을 돌린 종리난경이 빽 소리쳤다.
“불났어?! 왜들 그렇게 쳐다봐?!”
그녀는 사람들이 흩어지자 남자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이무환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리가 울어대듯 꽥꽥 대는 종리난경이 그렇게 싫지가 않았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무사로서.
‘검룡부 척검당의 삼대주라고 했던가?’
여자로서 대주 이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자신의 실력으로 오른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고. 그중 대표적인 여자가 바로 종리난경이었다.
사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의 미모는 구룡삼화에 못지않았다.
성질만 조금 괜찮았으면 젊은 무사들의 우상이 되고도 남았을 거라는 게, 원단에 술 먹고 몽롱한 눈으로 침을 튀겨가며 늘어놓은 엽상의 말이었다.
‘엽상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크크크, 나중에 잡혀 살지나 않을지 모르겠군.’
이무환이 실실거리며 걸어가자 종리난경이 다시 빽 소리쳤다.
“빨리 안 와?!”
‘간다, 가. 걱정 마라. 나도 오늘 날 잡았으니까.’
그때 걱정되는지 남궁산산이 속닥거렸다.
“오빠,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마. 엽상 아저씨가 좋아하는 거 같던데.”
역시 꼬맹이의 눈치는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이무환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얼굴하고 가슴하고 엉덩이는 절대 안 때릴 테니까.”
앞서 가던 종리난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 앞에 사람이 없던 게 다행이었다.
‘내 꼭 네놈의 그것을 콱 터뜨려 버리고 말 테다!’
2
이무환과 종리난경이 얼굴을 마주쳤을 즈음, 수룡구대의 수하로부터 엽상에게 한 가지 정보가 전달되었다.
“어제저녁 극비리에 관으로 추정되는 나무 궤가 하나 마룡부로 들어갔습니다. 칠호가 거꾸로 궤가 들어온 흔적을 추적해 갔는데, 안산(安山) 쪽에서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안산? 분명한가?”
“예, 칠호가 직접 추적해서 보내온 연락입니다.”
“좋아, 즉시 대원들을 대기시키고, 다음 명을 기다려라.”
‘안산에서 발견된 시신. 마룡부. 마침내 그자의 시신이 발견된 건가?’
엽상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무환을 찾아야 했다.
‘완벽히 숨길 수 있었던 시신을 대충 숨기는 게 이상했는데, 그럼 혹시 이런 경우를 생각한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엽상은 일단 외성의 저잣거리로 나갔다.
이무환의 행로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게 미리 갈 곳을 말해놓았으니까.
그런데 엽상이 이무환이 있을 만한 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두 군데의 객잔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 양반이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때 창가에서 두런거리는 말이 들렸다.
“그 한량 같은 놈, 검랑화(劍狼花)에게 걸렸으니 내년 오늘이 제삿날이 되겠구만.”
엽상은 그들이 말한 두 사람이 누군지 깨닫고 즉시 그 말을 한 자를 닦달했다.
“이보시오, 혹시 그 한량 같은 자가 소녀와 함께 있지 않았소?”
“있었소. 진짜 예쁜 소녀였는데, 재수없이 그런 한량에게 걸려서…….”
엽상은 객잔을 박차고 나와서 꽁지에 불붙은 수탉처럼 정신없이 달렸다.
자신이 없을 때 두 사람이 만나다니.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멍청한! 진작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악귀가 누군가. 결코 여자라고 대충 손을 쓸 리가 없다.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종리난경, 그녀를!
다행히 종리난경의 행선지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에도 가끔 자신과 비무를 위해 가던 한적한 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동쪽 성벽에 인접한 장원의 뒤편.
‘제발 조금만 참아라, 난경! 대주, 엉뚱한 말도 좋고 헛소리도 좋으니, 제발 시간 좀 끌어주쇼!’